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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 시집, <그대의 하늘길> 사이에 꽂힌 쪽지: 아침, 강을 건너며 / 불안한 희망 / 빈 마루

<겨울 공화국>을 꺼내 읽다가 양성우의 다른 시집들도 꺼냈다.<북치는 앉은뱅이>와 <그대의 하늘길>이다. 두 권다 매주 한권의 시집을 읽겠다고 결심하고 십여년 전 용강동(마포)에서 여의도로 출퇴근하면서 버스에서 읽었을 것이다. <그대의 하늘길> 사이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불안한 희망의 시대
4.30

떼무덤

각성
빈마루
아침, 마포대교를 건너며

매출이 인쇄된 문서 한 구석을 찢어서 써놓은 쪽지다. 차를 타고가면서 시집을 읽다가 어떤 단어, 어구가 떠오르면 계속 중얼거리다가 사무실에 들어가서 잊기 전에 적곤했다. 중얼거리다보면 점점 길어져 다시 외울 때마다 내용이 바뀌었다. 그런데 바로 전 것에 대한 좋은 느낌이 나았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짜곤 했다.


more.. 
쪽지에 적혀있던 것은 모두 시의 제목이 되었다. 그 땐 아침에 출근하고 있다가 퇴근하면 자취방에서 혼자 짐승처럼 씩씩대며 시를 썼다. 나 자신과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닌지? 군대를 제대한 후 십여년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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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를 건너며'라는 시를 1996년 11월 27일 썼다. 그래서 제목을 '아침, 강을 건너며'로 바꾼 것 같다. <그대의 하늘길은>은 1997년 3월 초에 읽기 시작했나보다. 아마 양성우의 시를 이때 함께 읽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시인을 만나면 줄창 읽어대는 습관이 있으니.

 아침, 강을 건너며 1


아침의 강은 눈이 부시다
강 위에서 부서지는 빛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리다
강 위를 지나는 버스 속으로 스며든다
사람들이 빛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
한사람씩 얼굴을 쳐다본다

그들의 눈에는 부서져 내리는 아침의 밝은 햇살은 보이지않고 피곤에 지친 얼굴들, 화장으로 가린 얼굴들이 졸리운 눈, 감은 눈으로 버스를 따라 흔들리고, 이어폰에 입을 중얼중얼거리거나 멍하니 버스에 메달려 있는게 고향집 처마 밑에 매달린 곰팡이가 난 메주 같았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몰려 내리고 몰려 타는 부산함에 강에 반사되어 부서져 들어오던 빛살들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다시 유리창으로 강물을 본다
강이 은빛으로 출렁거리며 흔들린다

아침의 강은 눈이 부시다
강 위에서 부서지는 빛살들이
사방에서 흩어져 내릴 때
어떻게 하면 노동의 고역을 저 강물로 씻어낼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강을 지나 건물들 사이로 들어가며
내 얼굴에서도 날로 이끼가 끼는 것을 느낀다.

1997. 3. 12

이젠 얼굴에 이끼가 낀지 오래되어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시를 쓰는 것이 하루하루의 반성이었고, "각성"제였다.

 아침, 강을 거너며 2


아침 강은 눈 부시다
밤섬가 물오리들
스티로폴 조각처럼 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 바쁜 움직임 속에서
그 물오리를 보면
가만히 물에 앉아
아침 햇살에 밤 사이 깃든
어둠을 말리려는게 틀림없다
그 모습에 강가로 내려가
밤 사이 가슴에 싸인 절망,을 꺼내
빛 속에 담가 휘적휘적
흔들어 탁탁 털어 널고싶어진다

물오리들 움직이질 않고
물 속에서만 물갈퀴질을 부산스럽게 하면서
그림처럼 떠서 靜中動
하지만 내 가슴 속 물갈퀴질엔
내내 피범벅, 저린 가슴에
아침 강은 눈이 부시고
부서져 내리는 빛무리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물오리 내일이며 북으로
차디찬 벌판을 찾아 떠나고
이젠 나도 푸른 소나무 한그루 서 있는
겨울 한가운데로 돌아가야겠다

이 좋은 봄날 아침
못견디게 파고드는 그리운 것들
부서져 내려 강 위를 흘러
바다로 가는 빛살처럼
깊은 바닥으로 흘러들어가고
보이지는 갈 수 없는 밤섬,가
스티로폴 조각처럼 널려있던 물오리들
물오리들 날아오르네

1997. 3. 12
그때 스스로 절망하고 있었을까?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혼자 담금질을 하고 있었다. 변할 수 없다는 것! 절망하지 않고 세상을 투명하게 만들겠다는 것! 쪽지를 적은 다음 날 쓴 시이다.

 불안한 희망

- 1997년 4월 30일

투명하게, 투명하게 살려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의심을 하며 내심 불안해 했다
언제나 꿈 꿔온 세상은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그전에 내가 먼저 흔들리며 주저하고 머뭇거렸다

삶의 투명성이나 정직성을 믿지 못하겠다
하지만 투명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믿기 힘든 생각이 내 몸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침과 저녁 사이의 세상은 너무 처참한 모습이다
떠날 수 있었다면 벌써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절망이
불안하게도 희망이 된다

필연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이곳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회의의 핏줄기가 폭풍우가 되어
가볍게 붙어 기생하는 희망을
몸 속에서 쓸어내버리려 한다

지난 여름 뿌리채 뽑혀 쓸려내려가던
나무둥치와 돼지와 소, 그리고 희망을 보았다
꿈 꾸던 자리엔 쓸쓸한 폐허의 자취만 남고
강변엔 도깨비 불만 날아 도깨비 불만 날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밤새 떨며 어둠 속에
파랗게 반짝이며 갈피를 못 잡는, 도깨비 불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엇이 남았을까 마음의 빈자리에는
파헤쳐진 무덤의 볼상사나운 자취
그 자릴 차지한 절망의 가시덩굴들
일상의 폭발하는 파편이 박혀
불구가 되어버린 머리와 뒤틀린 몸일까
희망을, 신념을 포기 못하는 것은
차라리 절망의 두려움이었다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몰락의 자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불안한 희망을 갖고
불안한 현재를 생각해 보면
투명하게, 투명하게 살려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의심을 하며 내심 또 불안해 한다
강가에는 밤새 도깨비 불만 날고 도깨비 불만 날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밤새 떨며 어둠 속에
기다린다, 절망을 먹고 자라나는 불안한 희망

1997. 5. 1

무서운 것은 일상의 안온함이다. 양성우처럼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이 오고있다고 외칠 수 없을 때, 오늘을 넘어선 내일이 불확실할 때, 남는 것은 합리적 이성, 과학 이전에 하나의 신념이다. 인식론의 제일 마지막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신념"이 아니었던가?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다. '몰락의 자각'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고정이다. 이것에서 일상의 안온함이 온다. 꿈이 없어져버린 세상이란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내일이 오늘같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제를 반성하면서 맞은 오늘은 어제와 차이가 나며 새로운 길로 우릴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이 없는 나날은 우릴 죽음으로 이끈다! (차원은 틀리지만 가끔 팀원들 '네이버를 넘어설 수 없어요!' 또는 '넘어설 수 있어요?' 묻는다. 3년 또는 5년 뒤에보자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묻지말고 스스로 반성하고 변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답은 자신들 속에 있는 것이다. 질문 안에 답이 있는 것이다.) 

 빈 마루


1.
손길 없이 버려진
빈 마루 위
쌓이는 먼지
시간이 이렇게 먼지처럼 가볍다면
내 쓸어내리리
오뉴월 햇살 받으며
한나절 내내
쓸어내고 닦아내 손때를 묻히며
그대 돌아올 날
기다리리

2.
하지만
그대 떠난 뒤 버려진
빈 마루 위
싸이는 먼지
갈라진 나무틈 사이엔
그리워 고개 빼며
자라난 풀잎
하나
외롭게 흔들리는 풀잎
하나
언젠가 시간이 흘러
빈 마루 썩고
빈 집 무너져 내리면
하나 가득 하리
그리움의 풀잎들
오뉴월에 피는 꽃잎들

1997. 4. 7
이땐 마음에 드는 단어, 구절 하나만 있으면 됐다. 마음은 모든 것을 한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손쉽게 밤새 토해냈다. 모든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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