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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넷플릭스 제휴를 보며, 다시 TV포털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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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와 KT의 제휴를 보면서, 그리고 그 이전 LGU+과 넷플릿스를 보면서 우리가 2006년 IPTV시범서비스를 시작하면서부터 진행했던 SBS TV포털이 생각났다. 우리가 그렇게 '싸우면서도' 가지 못한 길을 넷플릭스는 훌쩍 올라탄다. 우리가 7~8년 넘게 졸라도 '안해주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생각했던 N스크린 전략이나 DCP(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전략의 구체화된 모습을 넷플릭스가 보여준다. 국내로만 한정하면 우리 꿈(가입자수)이 훨씬 컸었던 것 같다! 그런 '욕심' 때문에 안된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아전인수'식으로 생각하면 넷플릭스의 (아래 기사에서 말하는) 무임승차를 따질 수 있는 곳은 통신사보다 방송사가 아닐까! IPTV가 초기 투자가 많이 들어가고, 가입자 마케팅에 돈을 많이 써서 적자일 수 밖에 없으니 콘텐츠를 싸게 달라 말에 넘어가, 콘텐츠를 제공해 천만이 넘는 가입자를 모으는데 힘을 보태놓고도 이젠 넷플릭스보다 못하다는듯 차별을 받는 곳 말이다. 내가 느끼는 '차별'을 '차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도 넷플릭스와 같은 조건으로 셋톱에 올라가고 싶어요!'라고. 이걸 받아준다면 차별이 아니라고 하겠다. 우린 이런 조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는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사실 나는 '못 간'이 아니라 '안 간'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부터 2012년 푹(pooq)까지 모든 plan에 넣어 놓고도 선택하지 않은 길이다. 상대인 통신사의 반대도 있었지만 내부의 도전도 만만치않았다. 우리의 데브옵스 수준(능력)을 보라는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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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많다. 복합연계성(complex connectivity) 개념이 떠오른다. 2012년 ❮뉴미디어 탐구, 10년❯ 기념으로 그간 쓴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인용하고, 이용자 상황에 적용했었다. 의사결정 과정에 적용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야 '아전인수'식 해석을 못할테니.
" … 신자유주의에 의해 개인적,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블록적, 지구적 차원이 서로 복합적으로 연계된 지구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여전히 불멸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추동하는 것은 로망스 서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국민국가의 로망스 서사도 파편화되고, 현재 국민국가가 동원하려고 해도 로망스를 아이러니로 전환해서 받아들이기에 잘 동원되지 않는 상황이다. 복합연계성(complex connectivity) 덕분으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국민국가에 고착된 민족문화만 가지고 자신의 삶을 정의하고 그 정의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종렬, ⟨뒤르케임의 전통에서 본 신자유주의와 문화⟩ (뒤르케임을 다시 생각한다, 한국사회이론학회 엮음, 동아시아, 2008, pp.290~291))
'복합연계성'란 개념을 스마트TV, 스마트폰이 출시된 새로운 매체상황에 적용했었다. 사람의 몸(경험) 중심으로, 현상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다는 생각으로 이렇겠썼다.
디지털화와 경쟁의 심화로 서로 다른 많은 수의 기기들, 네트워크들, 플랫폼들, 서비스들이 (과거와 비교하여 콘텐츠 제공 경로가) 파편화되지만 사용자의 몸(경험)을 중심으로 복합적으로 연계
➔ TV 경험을 더 이상 TV만 놓고 이야기하기 어렵게 됨
똑같은 개념을 TV포털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도 적용한다면 개별적인 산업적 주체들(players), 또 어떤 특정회사 내의 주체들(부서들)에도. 다 떠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많은 연결들이 있고, 그 연결선들의 힘의 관계에 따라 '어떤 것'이 출렁되면서 만들어진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한번 들어진 개체(entity - business model)는 잘 분해되지않는다. 응축된 역관계는 제도(법, 계약, 관행/관습 등)로 고정되기 때문이다.그 개체(사업모델) 안에 rule이 내재되어있다. 그 rule의 적용이 공정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넷플릭스가 변화된 rule을 보여준 것이라면 방송사도 현재의 rule과 변화된 rule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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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옛날 발표자료들을 들쳐본 이유는 어제 읽은 아래 기사 때문이다. 또 어제 저녁을 먹으며 오랜만에 'OTT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동기가 되었다.
"지상파 3사와 연합해 지난해 9월 출범시킨 ‘웨이브’는 가입자가 줄고 있다. 월간이용자 수는 지난해 10월 379만명에서 올해 5월 346만명으로 8.8%나 감소했다"는 내용을 보면서 가슴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 결과는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로서 자기정체성을 정한 댓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품종이 다른 것과 비교되면서 회초리를 맞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2011년, 푹을 사업계획서를 쓰기 바로 직전 발표한 자료이다. "CP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면, 또 "네트워크 없는 플랫폼 사업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면 지금 도달해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KT-넷플릭스 제휴를 보면서 그 구체적 모양을 보게된다.
"한국형 OTT"의 진짜 모습은 넷플릭스와 같은 방식으로 원하는 '방송사'에게 IPTV와 D-Cable TV 셋톱을 개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넷플릭스 대항마가 여러 개 나올 듯 하다. 한국에서 OTT 플랫폼 사업자가 안나오는 이유는 콘텐츠 문제라기 보다는 기존 미디어(IPTV-방송사) 간 맺어진 관계 때문이라 생각된다.
❮Difference and Repetition, 차이와 반복❯ 중역 (영어 to 한글): 한역본 2. 대자적 반복, 4절. 반복과 무의식: "쾌락원칙을 넘어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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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psychical life implies a field of individuation in which differences in intensity are distributed here and there in the form of excitations. The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process of the resolution of such differences is what we call pleasure. A totality of this kind -- a mobile distribution of differences and local resolutions within an intensive field -- corresponds to what Freud called the Id, or at least the primary layer of the Id. The word 'id'[Ça] in this sense is not only a pronoun referring to some formidable unknown, but also an adverb referring to a mobile place, a 'here and there'[Ça et lá] of excitations and resolutions. It is here that Freud's problem begins: it is a question of knowing how pleasure ceases to be a process in order to become a principle, how it ceases to be a local process in order to assume the value of an empirical principle which tends to organise biopsychical life in the Id. Obviously pleasure is pleasing, but this is not a reason for its assuming a systematic value according to which it is what we seek 'in principle'. This is the primary concern if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not the exceptions to this principle, but rather the determination of the conditions under which pleasure effectively becomes a principle. The Freudian answer is that excitation in the form of free difference must, in some sense, be 'invested', 'tied' or bound in such a manner that its resolution becomes systematically possible. This binding or investment of difference is what makes possible in general, not pleasure itself, but the value taken on by pleasure as a principle: we thereby pass from a state of scattered resolution to a state of integration, which constitutes the second layer of the Id and the beginnings of an organization.
❮Difference and Repetition❯
질 들뢰즈 (지은이),Paul Patton (옮긴이)Columbia Univ Pr1994-05-19, page.96
질 들뢰즈 (지은이),김상환 (옮긴이)민음사2004-03-20원제 : Diffe'rence et Re'pe'tition (1968년), page.220~221
- 생물심리학적 삶은 개체화의 장을 함축한다.
- 사람의 정신과 신체는[생명체인 인간은] 개체화의 장[바탕/토대]이다.
- 인간-생명[심신]은 개체화의 장을 '주름 잡고있다(implied / enfolded)'.
- biopsychic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of, relating to, or involving both psychic and biological phenomena : relating to the place of mind in life
- 개체화의 장 '안(in)'에 강도의 차이가 분배되어'있다'.
- 어떤(a) 개체화된 장(field)의 특징은 강도 '내(內, in)' 차이의 분배/할당에 있다.
- 어떤 개체화된 장은 생물심리학적 삶이고, 이 삶은 강도 내 차이의 분배이다.
- 삶이 과정이고 겪는 것이라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강도 내 차이의 분배가 '변할 것(change)'이다. 삶은 어떤 실체가 아닌 (시간 속에서) 변화를, 차이를 전제한다.
- 분배된 강도의 차이들은 흥분의 형태으로 되어있다.
- 형태는 외관, '띠고있는' 양태이다.
- 모든 강도가 아닌 '생물심리학적 삶'이란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강도이다.
- 생물학의 대상인 생명체는 흥분을 한다. 흥분이 강도적 차원에서 볼 때, 생명체의 특성이다. 흥분이 생물학적인 특성만이 아닌, (이후에 보겠지만) 심리학적인 특성이 된다. 또는 흥분이 심리학적인 것의 기반(바탕)이 된다.
- '여기저기'는 강도가 할당/분배되는 양태이다.
- 장 안에서 여기저기, 유동적(mobile)으로 할당된다.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생물심리학적 삶은 개체화의 장이고, 개체화의 장은 강도 내 차이로 구성되고, 강도 내 차이는 흥분의 형식으로 장 내에 분배된다.
- 쾌락은 차이들[흥분]의 해소 과정에서 온다.
- 강도의 차이들이 흥분의 형식으로 되어있다고 했으니, 차이들의 해소 과정은 흥분의 해소 과정이다.
- 따라서 쾌락은 흥분의 해소 과정에서 온다.
- '쾌락은 흥분의 해소'라는 개념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온 것이다. 의사인 프로이드는 흥분을 '병리학적'으로 접근하고, 이 흥분이 해소되는 것을 '치유'라고, 쾌락은 이런 흥분의 해소 과정, 치유 과정에서 도달하는 정신적인 안정화 상태로 본다. 정신적 안정화 상태가 'equilibrium'이다. equilibrium의 정의는 'a state of balance'이다. 일반적으로(일상적으로) 쾌락은 어떤 흥분상태를 말하지만 의사 입장에서 흥분은 '어떤 병적 상태'라고 생각한다.
- 이드(Id)-에고(자아, ego)-슈퍼에고(초자아, superego)에서의 이드이다.
- 이드는 생명체[사람의 심신]와 관계된다. 생물심리학적인 삶의 바탕이 된다.
- '사람에게서 발견되는(프로이드가 이론적으로 가정하는)' 이드는 강도적인 장, 개체화의 장, 장 내에서의 차이의 분배/할당, 또는 흥분의 전체적 분포/해소의 제1차적(primary) 층이다.
- 1차적인 층이라고 하는 이유는 위에서 본 위상학적인 '이드-에고-슈퍼에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에 2차, 3차적인 층이 나올 것이다.
- 이드는 대명사가 아니고 부사(adverb)이다.
- Id는 아마 영국에서 번역할 때 사용한 단어이고, 프로이드가 사용한 독일어는 Es로 '그것'을 의미하는 대명사이다. 그런데 그 의미는 '대명사'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 '부사'는 동사, 형용사 또는 다른 부사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Id의 의미가 명사가 아닌 동사, 형용사, 부사가 될 때, 동적인 (생성적인) 의미(뉘앙스)를 담게 된다. 따라서 Id는 어떤 실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닌, 어떤 (생성) 과정을 지시한다고 할까!
- 이드가 대명사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지시대상, 실체가 아니라는 것 같다. 이드는 부사이기 때문에 형용사(띤다는 의미에서 양태), 동사의 일시적인 상태, 특성을 설명한다.
- 그래서 이드는 [심신 내에 있는, 개체화된 장 안에 있는] 어떤 유동적인 장소가 된다. 그 장소는 특정한 수 없고 움직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심신 안에 있으면서 무엇인가 계속 변화(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장소가 이드이다.
- 이드는 '무엇인가 답을 내기 곤란한 미지의 것(some formidable unknown)'이지만, 심신 안에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면서 있다.
- '프로이트의 문제'는 프로이트가 제기한 문제라기 보다는 들뢰즈가 볼 때, 프로이트가 말은 안했지만 보여주는 '프로이트에게 숨겨진 문제'이다.
-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쾌락의 원칙을 넘어, 더 깊은 곳에 '죽음 욕동[충동]'이 있다고 하는데, 들뢰즈가 보기에 이 죽음 욕동이 실제 제기한 문제가 '프로이트의 문제'가 된다.
-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쾌락의 원칙이 적용되지않는[벗어난], 이것을 넘어선 것이 있는가?'로 이야기할 수 있다.
-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초월론적인 선험적(?) 기반/조건이 되는, 죽음 욕동과 다른 어떤 것을 프로이트가 간파했지만 이곳까지 사유를 밀고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며 이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 들뢰즈의 목표이다.
- 이 지점(장소)는 이드 안에 부사형태로, 유동적으로, 흥분/차이의 강도적 할당 형태로 있다.
-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통해 들뢰즈는 쾌락이 원칙이 되게하는 조건을 찾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 프로이트 이론에서 쾌락은 원칙이고, 이드 안의 생물심리학적 삶을 조직화하는 경향들이고, 이것은 경험적 원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그런데 프로이트는 '외상적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쾌락의 원칙에서 벗어난 병리학적 사례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죽음 욕동(타나토스)'가 쾌락의 원칙 넘어에 있지않은가 하고 가정한다.
- 프로이트 이론 속에서 죽음 욕동은 생명체가 그 원천인 무기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 자연적 충동을 말한다.
- 쾌락이 만족시키는 것은 (생물심리학적 삶을 영위하는) 생명(생물, 인간)이다.
- 따라서 쾌락이 (위 문장의 내용처럼) '이드 안의 생물심리학적 삶을 조직화하는 경향들'이고, 이 '조직화된 삶의 경향들'이 쾌락을 낳는다는 것은 맞다[사실이다]. 그래서 쾌락이 원칙이 된다.
- 하지만 '그것의 가정된 체계적인 가치', 즉 '쾌락의 원칙'이 원칙이 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쾌락의 원칙' 아래에는 다른 이유[원인]가 있다. 들뢰즈는 프로이드의 '쾌락의 원칙'을 넘어선 것, 어떤 다른 원칙이 있다고 넌짓이 주장한다.
- 쾌락이 실제 원리가 되도록 하는 조건들을 결정하는 것, 조건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프로이드의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가 제기하는 문제이다.
- tied를 연결된으로 해석하면 강도장(신체) 안에 너른 분포 뉘앙스를 갖을 수 있고, 묶이다로 해석하면 어떤 좁은 뉘앙스가 있는 것 같아 '연결'로 해석해 본다. 뒤에 다시 bind가 있기도 하다.
- '다발로 묶여져'는 bind - bound
- 들뢰즈는 위에서(제일 첫문장에서) '생물심리학적 삶은 개체화의 장을 함축하고, 이 개체화의 장 '안(in)'에 강도의 차이가 분배되어'있고, 이 분배된 강도의 차이들은 흥분의 형태으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 이에 따라 차이의 자유로운 형태는 흥분이다. 생물심리학적 삶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모양(양태)는 흥분의 형태이다.
- 생명 안에 '여기저기' 분배되어 있던 흥분이 묶어지는 것이 프로이드가 말한 '리비도 집중(생명 에너지가 어떤 촛점에 모여지는 것?)'이다.
-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 아래에 있는 것은, 프로이드의 답변이라고 말했으니, 흥분의 '수속(收束: 거둘 수 / 묶을 속, 묶기)'이 된다.
- 그 묶기는 체계적인 과정이다. 체계적이라는 것은 일관된 방식을 가진,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이가 결집되는(묶여지는) 데에 법칙성이 있어야 한다.
- 흥분의 해소(resolution)를 심신이 평형상태로 가는 '해결책(resolution)'으로 볼 수 있다. 외적 자극에 따른 불쾌가 해소되는 것이다. 위에서 '쾌락은 차이들[흥분]의 해소 과정에서 온다'고 했다. The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process of the resolution of such differences is what we call pleasure.
- 쾌락의 원리, 쾌락이 획득한 원리적 가치는 흥분의 묶기, 집중 때문에 나온다.
- 묶기/집중은 분산된 해소 상태에서 통합된 상태로의 이행이다.
- 'scattered resolution'은 위 문장에 있는 'local resolutions'과 같은 의미인듯 하다. 강도장 내에 '여기저기, 국소적으로 흩어져 있는 차이를 동반한 미세한 흥분들'이 있고, 어떤 국면(상황)에 이 국소적 해소들이 적분된다(integrated).
- the second layer of the Id를 말하는데 이드의 첫 번째 층위에 대해서는 위에 있는 "A totality of this kind -- a mobile distribution of differences and local resolutions within an intensive field -- corresponds to what Freud called the Id, or at least the primary layer of the Id"에서 말했다.
- 첫 번째 층위는 흥분의분산된 해소 상태이고 두 번째 층위는 흥분의 통합된 상태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