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게시물

『논리철학론』의 구조: 의미 있는 명제와 말할 수 없는 것 (R. M. 화이트)

R. M. 화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이렇게 읽어야 한다』에는 "『논리철학론』의 구조"라는 도식이 실려 있다. 책 전체의 얼개가 한 장에 들어 있어서, 『논리·철학 논고』(논리철학론의 한국 번역본 명)을 볼 때 이 그림을 가끔 다시 찾아보게 된다.


『논리철학론』의 구조 (R. M. 화이트,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이렇게 읽어야 한다)

도식 「『논리철학론』의 구조」, R. M. 화이트,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이렇게 읽어야 한다』


세계: 대상(Gegenstand, object), 사태(Sachverhalt, state of affairs), 사실(Tatsache, fact)

도식 맨 아래가 세계(Welt, world)다. 세계는 사물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들의 전체다. 『논리철학론』 1.1의 생각이다.

사실(Tatsache, fact)은 사태(Sachverhalt, state of affairs)들로 이루어지고, 사태는 대상(Gegenstand, object)들이 결합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며(2.01),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2). 세계는 그렇게 존립하는 사태들의 총체다(2.04).

그림에는 층마다 성격이 적혀 있다. 대상은 단순성, 사태는 절대적 구체성, 사실은 상황의 복잡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가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물들이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성립하는 사실들의 총체라는 점이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사실을 이루는지를, 그들 간의 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언어: 이름(Name, name), 요소 명제(Elementarsatz, elementary proposition), 명제(Satz, proposition)

그 위가 언어(Sprache, language)다. 언어도 세계와 같은 모양(구조)으로 쌓인다.

이름은 대상을 지칭하고(지칭 관계), 이름이 결합한 요소 명제는 사태를 그리며(그림 관계, Bild, picture), 요소 명제들을 진리 함수(Wahrheitsfunktion, truth-function)로 결합한 복합 명제는 그 진리 조건에 따라 세계의 가능한 상황을 기술한다.

도식 왼쪽의 '명제의 일반 형식(allgemeine Form des Satzes, general form of the proposition)'이 이 모양(언어의 구조, 세계 서술 과정)을 보여준다. 요소 명제를 재료로 복합 명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데, 이러한 명제들이 세계를 그릴 수 있으려면 명제와 그것이 그리는 상황 사이에 논리적 다양성(logische Mannigfaltigkeit, logical multiplicity)이 대응해야 한다. 논리적 다양성은 복합 명제를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만이 아니라, 명제와 세계가 공유해야 하는 구조적 복잡성을 가리킨다.

이렇게 세계의 모습을 그린 명제가 '의미 있는 명제(Sinn, sense)'다. 정확히는 명제가 세계의 가능한 사태를 그리며 참 또는 거짓일 수 있을 때, 그 명제는 뜻(Sinn)을 갖는다.

그래서 지성의 언어는 실재의 구조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라고 적혀 있다.

  • cf. Large Language Model?

이것이 『논리철학론』의 그림 이론(Bildtheorie)이다. 명제는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명제와 세계는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명제는 세계가 어떠할 수 있는지를 그릴 수 있다.


논리학: 의미가 퇴화된 명제

오른쪽 점선 너머는 논리학이다.

논리의 명제(Sätze der Logik, propositions of logic), 곧 항진 명제(Tautologie, tautology)와 모순 명제(Kontradiktion, contradiction)는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림은 이를 '의미가 퇴화된 명제(sinnlos, senseless)'라고 부른다. 항진명제는 세계가 어떠하든 언제나 참이고, 모순명제는 세계가 어떠하든 언제나 거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의 특정한 가능성을 기술하지 않는다.

그래도 『논리철학론』은 이런 명제가 세계에 대해 말하지는 않지만 언어의 논리를 보여준다(zeigen, show)고 본다.

여기서 뜻이 없는 것(sinnlos)과 헛소리(unsinnig)는 구별해야 한다. 항진명제와 모순명제는 어떤 사실도 기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뜻이 없지만, 논리적 기호체계 안에서는 정당한 위치를 갖는다. 비트겐슈타인은 4.4611에서 이들이 헛소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의 명제들은 사실을 기술하지 않으면서도(사실늘 말하지 않으면서도 것이면서도, 세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사태를 그림 그리듯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드러낸다. 말하지 않지만 보여주는 것이다.

  • 논리학의 명제 예: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와 같은 동의반복 명제 -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새로운 정보도 주지 않으며, 구체적인 사실을 기술하지 않음.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의 명제들을 '무의미(sinnlos)'한 것이라고 부름(여기서 무의미는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적 내용이 비어 있다는 뜻)

언어의 한계,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

지성의 언어를 둘러싼 테두리가 언어의 한계(Grenzen der Sprache, limits of language)다. 이는 곧 사고의 한계이자 세계의 한계다.

  • cf. LLM의 한계 - 언어/정보로 표현된, 과거의, 사후적 셰계 (즐뢰즈적 개념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할 잠재성의 결여)

비트겐슈타인은 5.6에서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고 말한다. 또한 5.61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고 한다. 여기서 언어의 한계란 외국어나 어휘의 부족이 아니라, 의미 있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는 논리적 한계를 뜻한다.

이 바깥에서 세계에 관해 말하려는 시도는 헛소리(Unsinn, nonsense)가 된다.

  • cf. 들뢰즈의 철학 - 비트겐슈타인적 의미로 헛소리

그런데 그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가장 바깥에 '말할 수 없는 것들(Unaussprechliches, the inexpressible)'을 놓는다. 윤리(Ethik, ethics), 미(Ästhetik, aesthetics) 같은, 지성의 영역 밖에 있는 신비로운 것(das Mystische, the mystical)들이다.

언어가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모두를 감싸는 맨 바깥 틀이 '인간의 실존적 삶'이다.

언어의 안쪽을 엄밀하게 그리는 까닭은 바깥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읽을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도 인간의 삶 안에 있다.

이 지점에서 『논리철학론』을 논리실증주의의 관점만으로 읽는 데는 한계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연과학의 명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의 전형으로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윤리나 미, 삶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학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삶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말한다(6.52).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긋는 일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한계가 분명해질 때 비로소 논리적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이 점에서 『논리철학론』은 논리학에 관한 책인 동시에, 논리학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6.522: 말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책의 끝부분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적는다(『논리철학론』 6.522). 아래에 독일어 원문, 영어는 Ogden과 Pears·McGuinness 번역, 한글은 이영철 번역(천지, p.143)과 필자 번역을 차례로 실었다.

  • "Es gibt allerdings Unaussprechliches. Dies zeigt sich, es ist das Mystische."
  • "There is indeed the inexpressible. This shows itself; it is the mystical." (Ogden)
  • "There are, indeed, things that cannot be put into words. They make themselves manifest. They are what is mystical." (Pears·McGuinness)
  • "실로 언표 불가능(言表不可能)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로운 것이다." (이영철)
  •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필자)

그림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칸 밖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위 문장은 그것이 언어를 떠난 곳에 따로 있다고 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여기서 '드러난다(zeigen, shows)'는 것은 명제로 기술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다만 그 드러남이 반드시 언어 안에서 일어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논리철학론』에서 논리적 형식은 명제 속에서 드러나지만, 6.522의 신비로운 것은 논리적 형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윤리와 미,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도 여기에 관계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언어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공간적 구분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구별이며, 말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거나 인간의 경험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6.522가 남기는 문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가.그림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칸 밖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위 문장은 그것이 언어를 떠난 곳에 따로 있다고 하지 않는다. (언어 안에서) 보여진다(zeigen)고 한다.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요즘 관심사다. 말할 수 없는 것, 이것을 어떻게 가리칠 것인가? 페리클레스 사후, 고대 아테나이에서 소크라테스가 제기한(직면한) 문제라는 관점에서. 파레시아를 읽고 있다.


전기 사상의 한계

『논리철학론』의 체계는 정교하지만 몇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특히 언어가 세계를 그린다는 생각은 언어의 다양한 쓰임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논리철학론』은 의미 있는 명제를 세계의 가능한 사실을 그리는 그림으로 이해했다. 명령, 질문, 기도, 농담 같은 쓰임은 명제의 일반형식 안에 그 기능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표현의 존재를 몰랐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명제가 사실을 기술하는 방식에 주목한 결과, 언어가 인간의 활동 속에서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둘째, 요소 명제(Elementarsatz)의 구체적인 사례가 끝내 제시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를 완전히 분석하면 요소 명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분석을 완성하지는 않았다. (Logical Atomism).

이는 체계의 중요한 어려움이다. 복합 명제가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요소 명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식별되는지가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논리철학론』은 요소 명제를 논리학이 미리 열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5.557).

셋째, 요소 명제는 서로 독립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 지점이 동시에 빨갛고 초록일 수 없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색을 진술하는 명제들이 독립적이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논리철학론』은 요소 명제의 진리값이 다른 요소 명제의 진리값과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본다(4.211). 또한 같은 시각적 지점에 서로 다른 두 색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진술을 모순으로 취급한다(6.3751). 그러나 실제 색에 관한 진술을 분석할 때 이러한 배제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 「논리형식에 관한 몇 가지 소견(Some Remarks on Logical Form)」에서 이 문제에 부딪혔고, 서로 다른 정도나 색을 나타내는 분석 불가능한 명제들이 서로를 배제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이는 요소 명제의 독립성이라는 자신의 기존 입장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후 『논리철학론』의 논리적 원자론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다만 1929년의 논의는 아직 완전한 논리적 분석이라는 전기의 문제의식 안에서 이루어졌다. 언어의 쓰임과 문법을 중심에 놓는 후기 철학으로의 전환은 이후에도 계속 진행된다. (Wittgenstein Project)

넷째, 자기 적용이 어렵다.

『논리철학론』의 명제들은 사실을 그리는 그림도 아니고 논리적 항진도 아니다. 책의 기준대로라면 이 명제들도 의미 있는 명제가 되지 못한다. 책은 이를 숨기지 않고 6.54에서 직접 밝힌다.

  • "Meine Sätze erläutern dadurch, dass sie der, welcher mich versteht, am Ende als unsinnig erkennt, wenn er durch sie – auf ihnen – über sie hinausgestiegen ist. (Er muss sozusagen die Leiter wegwerfen, nachdem er auf ihr hinaufgestiegen ist.) Er muss diese Sätze überwinden, dann sieht er die Welt richtig."
  • "My propositions are elucidatory in this way: he who understands me finally recognizes them as senseless, when he has climbed out through them, on them, over them. (He must so to speak throw away the ladder, after he has climbed up on it.) He must surmount these propositions; then he sees the world rightly." (Ogden)
  • "My propositions serve as elucidations in the following way: anyone who understands me eventually recognizes them as nonsensical, when he has used them—as steps—to climb beyond them. (He must, so to speak, throw away the ladder after he has climbed up it.) He must transcend these propositions, and then he will see the world aright." (Pears·McGuinness)
  •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註解)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에 의하여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이영철, p.143)
  • "나의 명제들은 이렇게 해명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명제들을 딛고, 그것들을 계단 삼아 그 위로 올라선 뒤에 마침내 그것들이 무의미함을 알아본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오른 뒤에 그것을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르게 본다." (필자)

(『논리철학론』 6.54. 독일어 원문, 영어는 Ogden과 Pears·McGuinness 번역, 한글은 이영철 번역과 필자 번역을 차례로 실었다.)

이 구절은 『논리철학론』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책의 명제들이 결국 헛소리라면, 독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이해한 것인가.

사다리의 비유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독해가 대립한다. 전통적 독해는 책의 명제들이 직접 말할 수 없는 진리를 가리키거나 드러낸다고 본다. 반면 코라 다이아몬드(Cora Diamond)와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 등의 단호한 독해(resolute reading)는 책이 말할 수 없는 진리를 우회적으로 전달한다는 해석 자체를 경계한다. 이 독해에 따르면 독자는 철학적 명제들이 의미를 갖는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Wittgenstein's Ladder).

이 글은 『논리철학론』이 말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남긴다는 점에서 전통적 독해에 가깝다. 다만 사다리를 던진다는 것을 그 영역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는 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논리적 틀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고자 한다.

두 독해의 차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 독해에서 사다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통찰을 얻도록 돕는 수단이다. 단호한 독해에서는 철학적 명제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중요하다. 따라서 두 해석 모두 사다리를 버린다는 표현을 중시하지만, 사다리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이 구절은 『논리철학론』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책의 명제들이 결국 헛소리라면, 독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이해한 것인가.

사다리의 비유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독해가 대립한다. 전통적 독해는 책의 명제들이 직접 말할 수 없는 진리를 가리키거나 드러낸다고 본다. 반면 코라 다이아몬드(Cora Diamond)와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 등의 단호한 독해(resolute reading)는 책이 말할 수 없는 진리를 우회적으로 전달한다는 해석 자체를 경계한다. 이 독해에 따르면 독자는 철학적 명제들이 의미를 갖는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Wittgenstein's Ladder).

이 글은 『논리철학론』이 말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남긴다는 점에서 전통적 독해에 가깝다. 다만 사다리를 던진다는 것을 그 영역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는 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논리적 틀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고자 한다.

두 독해의 차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 독해에서 사다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통찰을 얻도록 돕는 수단이다. 단호한 독해에서는 철학적 명제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중요하다. 따라서 두 해석 모두 사다리를 버린다는 표현을 중시하지만, 사다리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6.54가 사다리를 던지라고 하는 이유는 책의 명제들이 책 자신의 기준으로는 헛소리(unsinnig)이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명제는 사실의 그림이어야 하는데, 책의 명제들은 그러한 그림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세계의 사실을 기술하기보다는,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해 말하려 한다.

그래도 독자는 이 명제들을 딛고 올라선다. 다 오른 독자는 사다리를 던지고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사다리의 역할은 독자를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딛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의미 있는 명제라고 여겼던 것들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하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눈으로 되돌아보면 책은 '세계의 일부만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언어가 세계를 그리는 기능만 가지지 않고 삶의 형식(Lebensform) 안에서 쓰인다고 보면, 『논리철학론』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 가운데 한 측면을 밝힌 책이 된다. (즉, 삶의 일부를 보여준다)

따라서 사다리를 던진다는 비유를 후기 철학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볼 수도 있다. 그것은 논리학 자체를 폐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를 기술하는 논리적 명제의 형식을 모든 언어와 삶을 이해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이러한 해석이 6.54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한 의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전기의 사다리와 후기의 언어놀이는 서로 다른 철학적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기 철학을 거쳐 『논리철학론』으로 돌아와 보면, 사다리를 던진다는 말은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논리적 명제의 유용성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가 모두 하나의 논리적 형식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기대일지 모른다.


후기로 넘어가는 계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론』으로 철학의 문제를 끝냈다고 여겨 철학을 떠났고,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929년에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철학으로의 복귀가 곧 후기 철학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았다. 전기의 논리적 분석에서 후기의 언어놀이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여러 해에 걸친 사유의 변화가 있었다.

이 무렵의 일화로 스라파(Sraffa)의 손짓이 전해진다. 말콤(Malcolm)의 회고에 따르면, 스라파가 턱 밑을 손끝으로 쓸며 "이것의 논리적 형식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비트겐슈타인은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다만 시기와 영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결정적 계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은 언어와 의미를 명제의 논리적 형식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다. 손짓은 명제가 아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뜻하는지는 몸짓의 형식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과 관행에 달려 있다.

돌아온 그는 언어가 그림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철학적 탐구』에서는 낱말의 의미를 쓰임에서 찾고, 언어를 여러 언어놀이(Sprachspiel)로 나누어 본다. 놀이들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Familienähnlichkeit)으로 묶인다(『철학적 탐구』 66~67절).

언어놀이는 삶의 형식(Lebensform) 안에 있다(같은 책 23절, 241절).

이제 언어는 세계의 사실을 재현하는 명제들의 체계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말하기는 명령하고, 질문하고, 약속하고, 기도하고, 농담하는 인간의 활동과 얽혀 있다. 『철학적 탐구』 23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의 다양성을 열거하면서, 언어를 말하는 일이 하나의 활동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변화는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전기에는 명제가 세계를 어떻게 그릴 수 있는가가 중심 문제였다면, 후기에는 사람들이 언어를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심 문제가 된다. 


언어놀이의 규칙은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언표 불가능한 것"을 부분적으로는 언어놀이의 규칙, 곧 문법(Grammatik)으로 읽을 수 있다.

가령 한 지점이 동시에 빨갛고 초록일 수 없다는 색 배제 문제는 후기의 관점에서 색을 기술하는 표현들의 문법적 관계를 살펴보는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문법은 학교에서 배우는 문장 구성 규칙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표현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지, 어떤 표현을 받아들이거나 배제하는지를 규정하는 규칙을 가리킨다.

전기에 보여지던 논리형식이 후기에는 문법으로 옮겨 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형식이 그대로 문법으로 대체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기의 논리형식과 후기의 문법은 언어의 가능 조건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는 연결되지만, 그 조건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전기의 논리형식은 명제와 세계가 공유해야 하는 필연적 구조다. 반면 후기의 문법은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과 규칙에 주목한다. 다만 후기의 문법도 임의적인 습관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문법적 규칙은 무엇이 의미 있는 표현으로 성립하는지를 규정하며, 그 안에서 문법적 필연성이 나타난다.

또 6.522의 신비로운 것은 윤리, 미적인 것, 삶의 의미를 가리킨다. 이것이 언어놀이의 규칙인지는 별개의 물음이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하다. 『논리철학론』에서 말할 수 없지만 드러나는 것은 모두 같은 성격을 갖지 않는다. 논리적 형식이 말해질 수 없다는 주장과, 윤리적 가치나 삶의 의미가 말해질 수 없다는 주장은 서로 연결되지만 동일한 주장은 아니다.

따라서 전기의 '말할 수 없는 것' 전체가 후기의 문법으로 옮겨 갔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윤리와 미, 삶의 의미를 언어놀이의 규칙으로 환원한다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신비로운 것에 부여했던 독특한 위치가 사라질 수 있다.

삶의 형식도 해석이 갈린다.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읽기, 인간이 공유하는 바탕이라는 읽기, 둘 다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도 인간의 삶의 방식 안에 있다는 말은 후기의 틀에서 가능한 해석 중 하나이다.

다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을 삶의 형식 안에 다시 배치하려 했다기보다, 언어의 의미를 언어가 사용되는 활동과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렇다면 전기와 후기를 연결하는 물음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문법의 규칙으로 바뀌었는가'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언어의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다.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명제가 세계를 그릴 수 있는 논리적 조건을 밝힘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정하려 했다. 후기에는 그 한계를 언어 바깥에서 미리 정해진 하나의 경계로 파악하기보다, 구체적인 언어의 쓰임과 문법을 살펴보면서 철학적 혼란이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밝히려 했다.

이렇게 보면 『논리철학론』에서 『철학적 탐구』로의 변화는 단지 언어에 관한 이론의 변화가 아니다. 철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의 변화이기도 하다.

『논리철학론』의 사다리는 세계를 올바르게 보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후기의 관점에서 그 사다리를 다시 본다면, 버려야 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논리적 이해가 아니라 그것만으로 인간의 언어와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기대일 것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로 기술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실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논리철학론』이 그려낸 세계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주목한 삶의 형식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남아 있다.


Abstract — Structure of the Tractatus: Meaningful Propositions and the Unsayable (after R. M. White)

Notes on a diagram of the structure of Wittgenstein's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aken from R. M. White's book on the Tractatus. The post follows the diagram from the world of objects, states of affairs and facts to language, where names, elementary propositions and truth-functions picture the world, and on to logic, whose tautologies and contradictions are senseless (sinnlos) rather than nonsensical (unsinnig). It then marks the limits of language (5.6) and the unsayable that shows itself (6.522). Finally it sets out the limits of the early work, including the ladder passage (6.54) and the traditional and resolute readings, and notes the turn to the later Wittgenstein's language-games and form of life.

Keywords: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R. M. White, picture theory, sinnlos and unsinnig, limits of language, saying and showing, Wittgenstein's ladder, form of lif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