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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희망의 세계: 댄싱섀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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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댄싱섀도우를 봤다. 댄싱섀도우는 차범석의 ❮산불❯을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나쉬탈라, 마마 아스터, 신다, 솔로몬이고 태양군(太陽軍)과 달군(月軍)의 전쟁, 그리고 두 군대가 연합한 후 (가상의) 외국군대와의 전쟁이란 시대적 상황 속에 있는 산촌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사실 뮤지컬보다 뮤직컬로 만들어지기 전의 ❮산불❯의 줄거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잘 다가온다. 점례, 사월, 인텔리인 규복, 그리고 6.25전쟁 시 소백산맥에의 어느 산골마을, 밤을 지배하는 빨치산과 낮을 지배하는 국군.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칙들의 대립

여기서 이런 줄거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뮤지컬을 보면서 나는 태양군 대 달군, 북한과 남한,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칙들의 대립을 보았다. 이것은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지않을까? 원칙과 이상에는 나쉬탈라가 정점에 서있고, 현실('삶'이라고 해야 할까?)의 정점에는 마마 아스터가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현실주의에 가까운 이상주의자인 솔로몬이, 또 이상주의에 가까운 현실주의자인 신다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도 그 극단 사이 어디엔가 서있을 것이다.

그런데, 희망의 원천은 무엇일까?

댄싱섀도우의 주제의식은 희망일 것이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어지는 희망! 그런데,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미래의 어느 시점에 우리가 원하던 어느 상태에 도달할 것을 기대하는 것일까? 하지만 실제 희망의 모습은 이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어떤 희망도-희망에 대한 이야기도-미래가 아닌 현재의 비극성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행동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은 새로운 세계가, 다가올 미래의 상태가 아닌 이미 존재하고 하고 있는 세계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희망-오지않은 미래-이 아닌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하나의 원칙으로서 주장하고, 몸으로 만들며 그 세계에서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주의의 원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를 보면 '공산주의는 현실 노동운동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도 이런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댄싱섀도우에서 나쉬탈라와 솔로몬의 희망은 복고적(과거에 얽매여있다는 의미로)이기 조차하다. 

나는 궁극적으로 이상주의자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주의는 현실의 모순, 삶의 어려움의 반영이다. 이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넘어서려는 가장 '현실주의자'이다. 다만 현실을 넘어선 세계가 어떤 세계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이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따라서 공상(다가올 미래라기 보다 새롭게 만들 세상)과 과학(현실 분석) 속에서 좌충우돌해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현재의 어려움과 신념, 이들을 추종하하는 대중들의 시선은 이런 좌충우돌, 내면적인 갈등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하튼 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베르그송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삶이란, 베르그송이 장벽을 돌파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사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야만성이며 사회적인 모임 속에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기주장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의 이런 행동이 선택할 수 없는,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자기 운명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하고 슬플 따름이다.

마마 아스터의 입에서 튀어나온 희망이란 단어를 볼때 그렇다면 희망은 현실주의자의 몫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주의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희망'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뱉는 말일 뿐이다. 댄싱섀도우에서 보면 딸인 신다가 자궁 속의 아이를 버리고, 숲을 버리고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딸을 설득해서 살려놓으려는 아주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오는 희망이다. 이들이 말하는 희망이란 비루한 현실을 인정하고 목숨을 유지하자는 판단에 근거한다. 이렇다면 삶이란 욕체적 생명, 종족 보존 이외에 무엇일까? 하지만 우리가 만든 문화가 인간적인 삶이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고 가르키며 삶, 생존, 또는 거창하게 생명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이것은 '현실에 만족하고 살어라, 돼지처럼!',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래도 살아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 역시 독특한 정신문명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초인'이 아닌 생물적 존재인 인간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가 얽혀져 만들어진 '자궁 속의 태아',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느쪽에도 서지못하는 기회주의자의 몫이다. 희망은 "이곳을 떠나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절망"(현실주의자의 현실)이거나, 꿈이 이뤄질까 물어오는 "회의의 핏줄기에 가볍게 붙어 기생하는" 것(이상주의자의 이상)이거나, 이 둘 모두에게 있는 "몰락의 자각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는 극 속에서 
전형화된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가 아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자체의 비극적 기반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주제는 감동으로 다가오면서 어디에서 오는지 모를 '불안'감과 언젠가 내가 겪은듯한 기식감으로 몸과 마음을 '뒤틀'게 만든다.

댄싱섀도우, 상기된 과거들


댄싱섀도우를 보면서 오래전에 쓴 2편의 시와 편지글 형식의 일기가 떠올랐다. 모두 90년대의 세계를 대변한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같다고, 자기동일성을 주장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뮤지컬(연극)의 또하나의 기능은 상기(想起)시키는 것이다.

내가 불현듯 1991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말까지 있었던 정선군 임계면이 떠오른 것은 뮤지컬의 소품인 사과상자 덮어놓은 듯한 누추한 집들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갈등구조 때문이다. 그 집들과 똑같은 집들을 그때 고한과 사북에서 봤고, 그런 갈등을 지금도 겪으며 살고있다. 사진은 댄싱섀도우의 한장면이고, 바로 옆의 그림은 사북에서 광부들이 '살았던' 집을 그린 것이다.

1992년 3월 3일 화요일

아침도 어제 먹다남은 식빵 한 조각으로 떼웠습니다. 전화를 신청하는데 돈을 다쓰고 2,000원이 남아 그것으로 빵과 우유를 산 것입니다. 아침 일찍 낙천리를 가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이른 것 같아 10시에 출발했습니다. ㅈ씨에게 신문배달하는 자전거를 빌려타고요. 사실 10시에 출발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자전거를 아침 신문 돌리며 쓰기 때문이죠. 이곳은 동아일보 3월3일자가 아침에 나옵니다.(1992년 동아일보는 석간이었다.)

자전거로 한 30분 걸렸습니다. 그런데 길이 비포장이라 흙탕물이 튀겨 신, 양말, 바지, 잠바 등부분까지 다 버렸습니다. 어제 말했듯이 가면서 내를 끼고 또 산 밑으로 집이 띄엄 띄엄 있습니다. 그리고 고개가 나오죠. 그것을 넘어야 낙천리입니다.

낙천리에는 당원이 삽니다. ㄴ씨라고 교회 집사이고 농사를 짓습니다. 진짜 촌사람같이 꺼벙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도 좀 꿈뜨게합니다. 낙천리에서 택백가는 시외버스 길 옆으로 가게가 있고 그 집에 공중전화가 달려있습니다. 그 집이 이 동네의 모든 정보가 집중되는 곳인 것 같습니다. 방에 40~50대의 아저씨들이 하나 차있고 그 집 둘레의 햇빛을 따라 임계에 나올 화장한 아줌마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기서 좋았던 것은 젊은 30대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집에 선전물을 돌리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정운환씨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민중당이 뭐냐?"하는데 "정운환씨가 위원장 아냐?"하고 한 사람이 받았죠. 나는 신이나 "맞습니다......"이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가 났습니다. 

버스 길가로 낙천1리고 "樂川"을 건너 산 골짜기에 형성된 촌락으로 가면 낙천2천입니다. 이곳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고 낮에도 소여물을 썰거나 아니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녹화된 방송을 트는 유선방송을 보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 처음 보이는 흰건물이 낙천교회입니다. ㄱ씨가 전도사이고 ㄴ씨가 집사죠.
ㄱ씨는 둥근 얼굴에 안경을 쓰고 작은 못집의 퉁퉁한 사람입니다. 연고자 카드에는 '적극적 지지자'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 ㄴ씨와 만나 이야기하니 '아직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실 아직 모릅니다. 한번 정도 만나보고 정선사무실에서 분류한 것이니까요. 좀 더 지켜보고 만나봐야겠지요. 교회가 보여 다리를 건너는데 교회가 등지고 있는 산 모퉁이를 돌아 한 30여집이 있었습니다.


한집 지붕이 보여 찾아가면 또 한 집이 보이고 그런 식이지요. 그리고 한 5~6미터씩, 또는 10미터씩 떨어져 있는 집을 두고 가기가 그래서 [선거 홍보물을] 돌리다 보면 몇개 골짜기를 헤메는 겁니다. 낙천2리를 돌리고 전도사에게 ㄴ씨 집을 물어 찾아갔습니다. ㄴ씨는 임계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ㄴ씨와 사랑방 좌담회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한 5만원 투자해서 술 좀 사고 윷놀이를 하면 사람이 올까 오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민주자유당 후보인] 박우병씨가 낙천3리에는 10만원을 주고가서 마을 잔치를 3일간 했다고 합니다. 이에 나는 "우리당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과일하고 음료수, 과자를 좀 사서 해보자"고 했습니다. ㄴ씨가 "교인 한 50여명을 초대하면 늙은이는 안오고 20~30명 정도가 올거다."라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후보와 유권자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ㄴ씨를 이지역의 진보를 위한 정치적 구심으로 서게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당 활동과 함께! 이런 하나 하나의 작업이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에게 정치적 교육도 필요합니다. 아주 많은 정치적으로 교육받은 사람을 이땅은 요구합니다. [돌아오는데] 3~4시간 헤멘듯 합니다.

ㅇ씨가 태백에서 왔나 봅니다. 그리고 오늘 되리라던 전화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전화를 하려다 그만 두었습니다. 오후에는 좀 쉬다가 (다리가 아픕니다) ㅇ씨가 ㄱ씨를 소개해줘 술을 한잔 했습니다. 그러다 다른 곳에서 ㅈ씨가 술을 한다고해 그곳으로 가 자리를 합쳤습니다. 그곳에서 ㄱ씨, ㅇ씨, ㅇ씨 등과 정식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죠. 그리고 어떤 젊은 사람이 거기서 나오는데 "힘들게 일한다는 것을 안다. 수고한다"라고 할 때, 힘이 났습니다. 인사치례일지라도 말입니다.

좀 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계라도"에 대해서. 그리고 "보안관 ㅇ"씨에 대해서. 이것은 내일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ㅂ이 씁니다

추신: 오늘은 터미널에서 차에 올라 선전지를 돌렸습니다. 뻔뻔하게요. 언젠가 지붕의 모습도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 술자리에서 있던 것하고요. 

<1992 .3.3="">1992.3.3

태생

여지껏 악다구니도 없이 쉽게
겁 먹고 무너져 내렸다 비겁을 참지 못한
심장만 감정에 복받쳐 덜컹거렸고 머리는
가난이 몸에 밴 어머니의 처세술과
아버지가 남겨준 우유부단한 이상에 감사했다
나는 기회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혈아였다
어머니의 인생에는 여름 한낮 김 매며
속살까지 검게 탄 평생 갈 화상이 있었고
그걸 보며 자란 가슴 깊숙히에는
가난에 대인 자국이 있었다 아버지의 평생은
제 한몸도 못가눌 처지에 짐을 진 어두운 여름밤
전등 불빛 속으로 날아든 풍뎅이의 좌충우돌,
나의 가슴 속 한 구석에는 날개 꺽인
지친 희망의 버둥거림이 있었다
가슴 속 희망이 버둥거릴 때마다
가난에 대인 화상이 쓸려 내내 비명을 질렀고
그래도 언제나 덜컹대며 뛰는 붉은 심장은
피비린내 질펀한 가슴 속에서 이젠
끝장을 보자고 싸워댔다 칼에 배인 흉터
세월에 깊게 패여 주름이 되고 썩은 피
흐르던 고랑에서 겁 없이 풀이 자랐다
<1995 .8.13="">
1995.8.13


불안한 희망

- 1997년 4월 30일
투명하게, 투명하게 살려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의심을 하며 내심 불안해 했다
언제나 꿈 꿔온 세상은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그전에 내가 먼저 흔들리며 주저하고 머뭇거렸다

삶의 투명성이나 정직성을 믿지 못하겠다
하지만 투명한 세상를 만들고 싶다는
믿기 힘든 생각이 내 몸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세상은 너무 처참한 모습이다
떠날 수 있다면 벌써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절망이
불안하게도 희망이 된다

필연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이곳에서 누가 자유로운 수 있을까
회의의 핏줄기가 폭풍우가 되어
가볍게 붙어 기생하는 희망을
몸 속에서 쓸어내버리려 한다

지난 여름 뿌리채 뽑혀 쓸려내려가던
나무둥치와 돼지와 소, 희망을 보았다
꿈 꾸던 자리엔 쓸쓸한 폐허의 자취만이 남고
강변엔 도깨비 불만 날아 도깨비 불만 날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밤새 떨며 어둠 속에
파랗게 반짝이며 갈피를 못 잡는, 도깨비 불
갈피를 못잡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엇이 남았을까 마음의 빈자리에는
파헤쳐진 무덤의 볼상사나운 자취
그 자릴 차지한 절망의 가시덩굴들
일상의 폭발하는 파편에 박혀
불구가 되어버린 머리와 뒤틀린 몸일까
희망을, 신념을 포기 못하는 것은
차라리 절망의 두려움이었다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몰락의 자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불안한 희망을 갖고
불안한 현재를 생각해 보면
투명하게, 투명하게 살려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의심을 하며 내심 또 불안해 한다
강가에는 밤새 도깨비 불만 날고 도깨비 불만 날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밤새 떨며 어둠 속에
기다린다, 절망을 먹고 자라나는 불안한 희망
<1997 .5.1="">
1997.5.1

과거들이 현재의 내 몸 속에서 불안하게 숨을 쉬고 있다. 결코 지금 만날 수 없는 '미래는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희망처럼!

총선에서 지고 임계를 떠나면서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찾아갈 것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임계에서 한 약속은 아직까지도 가슴에 쌓여 빚으로 남아있다. 그때 그분들이 약속을 모두 잊었을지 몰라도 나의 핏 속에 희망이나 꿈이라는 단어가 남아 흐르는 동안은 계속 거친 숨을 내쉬면서 살아 꿈틀댈 것이다. 사실 그것은 변치않겠다는, 언젠가 돌아가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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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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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에 걸쳐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digital content platform)과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에 관련되 서비스에 대하여 정리를 할 예정이다. 첫번째로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및 서비스 모델이 나온게 된 배경에 대하여 정리하겠다.




위 그림은 동영상 포럼 발표자료에서 인용한 것임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전략 개념의 발전과정


1.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2005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에 대한 개념은 이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SBSi 내에 잠재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디지털 콘텐츠 서비스가 진화하면서 ‘주름’이 펴지고 2006년 5월, 이 개념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냈다.

1.1 2005년 상반기 현재 자유이용권S라는 브랜드로 서비스 되고 있는 모든 쟝르가 포함된 디지털 콘텐츠 상품기획에 대한 논의와 의사결정이 있었다. 그 이전에 2002년 9월부터 서비스가 시작된 TV다시보기 쿠폰 100회로 구성된 연정액제 상품인 727멤버십이 있었다.


2. 2005년 5월, 우리는 UCI(Universal Content Identifier) 제안작업을 했고 UCI-RA로 선정되었다. UCI 제안작업을 하면서 야후의 동영상 검색, blinx.com의 동영상 검색 등을 검토하고, 미래의 디지털 콘텐츠 유통방식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작업이 진행되면서 동영상 콘텐츠에 있어서도 Search & Find가 콘텐츠를 이용, 유통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데 생각을 같이 했다. 

2.1 이때 개인적으로는 돈을 내고 전문교육기관에 다니면서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IT의 A에서 Z까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인터넷을 거래구조, 웹서비스 구조(등록, 검색,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이비니스 구조), SOA(Service Oriented Architecture)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인터넷에서의 혁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등록, 검색/요청, 바인딩/계약/사용 형태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UCI나 웹서비스의 기본 구조이기도 하다.

2.2 일반적인 방송 다시보기의 회차정보(낱개의 VOD 정보)에 대한 검색을 장면(scene) 단위까지 검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것은 동영상의 장면들을 클립핑하고 제목, 내용, 키워드 등을 등록할 수 있도록한 NeTV 서비스를 통하여 해결되었다. NeTV 서비스는 사용자참여를 증진시켜 방송 콘텐츠와 시청자, 시청자들간의 정서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준비되었는데 자연스럽게 동영상 검색이라는 경향과 합류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하였다.

2.3 동영상검색은 2005년 말, 2006년 상반기에 내부논의를 하였고 2006년 5월 NHN(naver.com)과의 동영상검색 제휴를 시작으로 엠파스, 야후, 다음 등과 제휴를 하였다. 내부 논쟁의 쟁점은 검색 피딩(feeding)을 시작하면 '일간 신문사들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 빠질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2.4 검색 피딩을 하면서 하나의 원칙이 만들어졌는데 검색을 위한 메타데이터만 나가는 것이며 VOD 콘텐츠 자체까지 보내는 것(syndication model)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sbs.co.kr은 모든 콘텐츠에 대한 서비스를 요청하면 보여주는 플랫폼(platform)이며 검색은 이 플랫폼에 쉽게 도달할 수 있도록 접근경로를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정책과 함께 피딩된 콘텐츠를 보여주는 페이지(검색결과 페이지) 및 Viewer에 대한 독립성 확보, 국내에서 방송 신디케이션 사업의 중단 등이 결정되었다.

2.4 동영상검색과 함께 현재의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사업 모델이 만들어졌는데 외부 신디케이션 대신 SBSi가 모든 콘텐츠를 보유하고 필요한 사업자, 이용자 등이 요청하면 모든 서비스를 일괄로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관련된 최초 계약이 2006년 8월 다음 큐브를 대상으로 체결되었다.

2.5 따라서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유비쿼터스 환경에서 이용자가 원하는 모든 곳에, 플랫폼에 상관없이, 원하는 콘텐츠를 원하는 시간에 제공한다는 것으로, 멀티플랫포밍, 또는 크로스 플랫폼 전략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다음과의 계약을 통하여 마련했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계기일 뿐이다. 시작이라는 점 이외의 의미를 찾기엔 어려움이 있다. 크로스 플랫폼(Cross Platform), 멀티플랫폼(Multi Platform) 전략으로 넘어가면서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3. 2005년 상반기부터 사이트 개편을 준비하며 현재 sbs.co.kr은 콘텐츠 몰이며 이것에서 벗어나 이용자들이 로그인하지 않고, 돈을 쓰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사용자 참여환경(지금의 UCC와 같은 맥락의 서비스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부논쟁’을 시작했다. 또 사용자 참여환경을 위해 orb.com, slingbox.com, 웹하드 기반 콘텐츠 공유사이트들과 동영상 콘텐츠 편집기 등을 검토하였다.


3.1 이 논의의 결과가 현재의 NeTV 서비스이다. NeTV 서비스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06년 4월 beta 버전으로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4. SBSi에서는 음악과 영화쪽에 자회사를 만들거나, 펀드를 조성하면서 콘텐츠 제작 및 유통을 위해 투자를 검토, 또는 진행하였다. 영화 MCP(Master Content Provider)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이때이다.


5. 2004년 말 PMP와 같은 Portable Device에 대한 서비스 방향/전략에 대한 검토를 했고 몇개의 가전기기 업체들과 업무협의를 시작했다. 이때 iTunes, iPod모델과 레인콤의 MP3플레이어(아이리버), Wibro, 핸드폰 네트워크(무선인터넷, HSDPA 등)을 검토하면서 "디지털화와 Portable User Device 중심의 OUTDOOR 시장이 창출"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5.1 검토는 2004년 말부터 시작하고 준비하였지만 PC, PMP 중심다운로드 서비스는 2007년 5월 16일에야 시작되었다. 결국 실제 서비스까지는 2년 반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고, 현재도 시장 성장여부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5.2 다운로드 서비스, 또는 Portable Device에 대한 접근을 하면서 콘텐츠를 보호하고 배포하기 위한, 영상과 데이터를 묶기(binding) 위한 Application(player, down load manager)의 중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런 Application은 NeTV 편집기, Viewer 등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5.3 2007년 6월 Global Media Hub 사업 협력 MOU 체결 후 디지털 큐브, 코원, 블루핀 등의 PMP 제조업체들과 마케팅 협력 계약을 맺었다. 나는 PMP 시장이 크게 활성화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반은 콘텐츠 서비스 업체에 있다고 2004년부터 생각한다. 단말을 사도 (합법적으로, 쉽게 접근하여) 쓸 수 있는 콘텐츠가 없는 것이다. 현재의 PMP는 GPS일 따름이다.


6. 2006년 상반기부터 KT IPTV 포털 서비스를 검토, 협의했고, 2006년 하반기 관련된 계약을 체결하였다. KT IPTV 포털 서비스의 핵심 내용은 SBSi가 모든 편성, 운영을 하는 독립성을 확보하고, 향후 sbs.co.kr의 월정액 회원(예를 들면 자유이용권S 회원)과 단건 이용 회원들이 sbs.co.kr의 사이버머니를 이용하여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게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sbs 회원들은 한번의 과금을 통해 어떤 플랫폼에서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앞서 말한 크로스 플랫폼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제한적이지만 KT의 IPTV 플랫폼을 개방하는 것이다.


7. 2006년 3월 무선인터넷을 위한 WAP 포털 서비스를 시작했다. WAP과 IPTV, Web(유선인터넷)의 서비스를 통합하기 위한 조직을 개편했다.


8. 2007년 6월 Microsoft, KT와 함께 "Global Media Hub 사업" 협력 MOU를 체결하였다. GMH는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사업의 글로벌 확장판이다.

8.1 참고 자료
한국마이크로소프트-SBSi-KT, 콘텐츠 중개 시험서비스 공동 개발에 상호 협력키로 
디지털콘텐츠 중개, 거래, 전달하는 글로벌 미디어 허브(GMH) 사업을 위해 상호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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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 비정규직법을 보는 관점: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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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2007년 7월 26일 "비정규직 법을 고치려는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이전보다 노동계에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일단 비정규직법을 안착시키면서 한편으로 악용 사례를 차단할 수 있는 보완 입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대해서도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이 문제"라며 '법의 문제'가 아닌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에서 원인을 찾았다. (한겨레신문, 2007.7.27, 13면)

법 자체가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과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만을 문제삼아야 할까? 정치체가 아닌 기업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노동자들)이 법 아래서 자유롭다는 것은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닌 법 아래서 모두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야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법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닌 기업가에게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를 유지하려면 (기업가, 전제군주, 또는 독재자의) 임의적 자유재량권의 요소가 없는 정치 체제하에서 살아야 하며 시민권이 국가의 지배자, 지배 집단, 혹은 또 다른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해야만 하는 가능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입법의 유일한 권력이 인민 혹은 그들이 신임하는 대표들에게 있는, 그리고 정치체의 모든 개별적 구성원들이-지배자와 시민 다 함께-그들이 자신에게 부과한 그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치 정부 체제하에서 살아야만 지배자들의 강압적 임의 재량권을 박탈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을 지배자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킬 수 있는 그 어떤 폭군의 등장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푸른역사, 2007

켄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8점
켄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푸른역사


한국노총 위원장의 주장은 결국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가 아닌 '기업가들의 강압적 임의재량권',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을 기업가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키려는 것 아닌가? 자유, 법 앞에서의 자유는 정치체만이 아닌 모든 권력에 대한 제한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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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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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유목민족들이 만들어낸 세계

툰유쿠크의 비문과 '비분강개'한 문체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돌궐 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p.57)

나는 최근 이 이야기를 두번 들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읽은 것 같고 다른 한번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이다. 이 이야기를 두번 듣는 사이에 이 책을 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
김종래 지음/꿈엔들(꿈&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뢰즈의 <천의 고원>과 이책에 대한 해석인 이진경의 <노마디즘1,2>를 읽으면서이다. 이 책에서는 유목민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노마디즘과 탈주의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진경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더 많았었는데 최근 일어난 두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김종래기자의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은 후 내용보다도 문체(style)의 장중함이 더 깊이 다가왔다. 그런데 문체의 장중함은 아주 비극적인 내용들과 뒤섞여 나오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기상을 끌어내는 듯 했다. 그러면서 읽지도 않은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이 생각난 것은 왜 일까? 김훈의 예전 직업과 김종래의 지금 직업이 겹쳐지면서 '기자들이 신문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쓰는 문체'가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 이야기>의 부제는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인데 과거의 유목주의가 디지털 사회와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코드화되는 듯하다. 나는 톤유쿠크의 비문을 보면서 다시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기동전과 진지전이 떠올랐고, 유라시아 초원과 세계적인 대제국을 만들어 냈던 유목민족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묻게 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살피는 이유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이동하면 반드시 망할 것이며, 성을 쌓고 사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라고 뒤집어 생각해야 하는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것(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를 되뇌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있는 맥락(context)나 구조(structure)를 보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톤유쿠크의 비문은 척박한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리저리 옮겨다여야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초원에 성을 쌓고 살려고 한다면 양들, 말들과 함께 굶어죽을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톤유쿠크가 유목민인 자신의 민족에게 남긴 이야기인 것이다.

그람시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시민사회가 발전이 안된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기동전(유목민의 전술과 비슷한)을 통해 혁명에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시민사회(성곽, 진지와 요새, 보루)가 발전한 서유럽에서는 기동전으로 휩쓸고 지나간다해도 그 뒷쪽에 여전히 강고한 성곽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순간적으로 빼앗을 수는 있으되 계속해서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원제국의 운명도 이런 틀로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물론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아니긴 하지만 그람시의 틀을 하나의 은유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기동전 - 진지전 - 화력전

1990년 걸프전을 보면서, 그리고 현존하던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력전'에 대해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진지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기동하는 부대를 화력으로 지원하거나 화력으로 기동로를 봉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은 당시 유행하던 그람시의 책들과 한참 읽기 시작하던 알뛰세르의 책들 영향도 있었다. 1996년 군대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하면서 화력과 기동에 기반한 군사전술, 전략과 함께 이런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지금 <유목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하나의 개념적 은유인) 화력전의 범위를 전세계화 한다. 인터넷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는 것은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동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정보(이 정보들 모두 객관적 투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것들이다)인데, 이 정보는 특정지점(진지)에서 출발한다.

인터넷 내에서도 정보의 소통은 평등한 것이 아니며 위계적이며 제국이 지배한다. 제국의 언어(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인 언어)가 아닌 변방의 언어로는 이 세계를 지배하기 어렵다. 구글의 검색은 원격조정되거나 자동항법장치를 갖춘 스마트 폭탄처럼 정확하게 목표를 명중시킨다. 이렇게 할 때 구글의 거대한 검색DB는 진지인 것이다. 구글의 거대한 검색DB에 매시간 새로운 데이터를 긁어오는 로봇(crawler)들은 기동하는 유목민처럼 전세계의 데이터 베이스를 떠돈다.

구글이 제국이라면 제국이 된데는 이렇게 유목이 아닌 진지가 있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 네이버가 제국이라면 마찮가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디지털 노마디즘 운운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착취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제국(정보사회)에 대한 나팔수 노릇을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 블로그의 제목도 디지털 노마디즘이다.) 언젠가 화력전에 기댄 에세이를 하나 써야겠다. 이런 생각은 이미 10년전에 갖기 시작했지만!

시간 대 장소: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

유목민은 정착민과 달리 시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사고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개를 묶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끈으로 개의 목을 걸어 끈의 길이로 개의 행동반경을 통제한다. 그런데 몽골에서는 두 뼘도 안되는 끈을 가지고 앞발 중 하나의 관절을 반으로 접어서 끈으로 칭칭 감아 절름발이 걸음으로 만든다.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공간을 제한시켜 개의 활동력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하여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다.(p.93)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행동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행동해봐야 한다. 세계는 한가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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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 6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새물결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평, 이진경이 번역한 것을 구해볼 것
노마디즘 1 - 10점
이진경 지음/휴머니스트
<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을 쓰면서 이진경의 노마디즘에 있는 들뢰즈 해석 많은 은 곳에서 이용하였다.
노마디즘 2 - 10점
이진경 지음/휴머니스트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8점
르네 그루쎄/사계절출판사
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 10점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거름
그람시의 옥중수고 2 - 철학,역사, 문화 8점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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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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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만들어진 자유주의 개념은 아주 "공화주의"적이다. "인간 개개인의 육체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처럼, 국민과 국가의 조직체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원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 의지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약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국가란 자유로운 인격체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라는 뜻이다. 즉 자유국가란 정치의 행위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 구성원들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p.81)"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자유주의는 "사적 개인으로서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형성된 자유주의 개념은 "순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타인의 혹은 외부의 간섭이 없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며, "정치 제도와도 상관없이 어떤 체제하에서도 느릴 수 있는 것"이라는 현재의 개념이 아니었다. 현재 사용되는 이런 의미의 자유는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는 자유인 못지않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7세기 공화주의적인 자유주의 개념을 기준으로 현재, 또는 과거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문제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 국주의의 식민지배를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 엄격하게 한국민은 모두 노예상태였으며, 주인(일본)의 시혜없이는 자신의 의지대로는 무엇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아닌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도.

또 60~80년대의 군부정치에 대해서도 똑같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단 전제군주와 같이 한사람만 자유로운 체제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독재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국민들이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같은 경제성장 논리, 현재의 신자유주의를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반대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르조아 정치학 비판"을 통해 비판적인 국가이론을 정립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영국 유학을 생각한적이 있다. 그리고 계급이 없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사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단순하게 진행된 논리, 생각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공화국"은 궁극적으로 계급이 사멸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건들의 제거를 숙고하는 곳에는 경제적 지배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개인의 재산행사의 자유, 사적자유의 영역이 아닌 '의지의 자유'로 읽을 때, 이런 개인들의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을 제약하는 사회경제적인 권력구조가 존재할 때 그것 자체가 노예상태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때, 현재의 자유를 포장하고 있는 형식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로 변화될 수 있게된다.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성을 탈피한 실질적인 경제적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17세기의 혁명적인 자유주의 이론이 현재의 미국독립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기반한 자유주의!



켄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8점
켄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푸른역사




죄수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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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5년 말에서 2006년 초 게임이론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쓴 것이다. 최근 한반도에서 "핵위기"가 해결될 조짐이 보여 다행이다. 하지만 언제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죄수의 딜레마"를 이런 시각으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 6점
윌리엄 파운드스톤 지음, 박우석 옮김/양문

죄수의 딜레마』(양문, 2004)를 구입한 날짜는 2005년 6월 16일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서평' 비슷한 것을 써야지 생각하면서도 손을 대지 못하다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났다. 이 책은 " 존 폰 노이만 | 핵폭탄 | 게임이론"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나는 당시 '게임이론'에 대한 관심으로 간략한 입문서를 찾다가 '게임이론'을 확립한 사람(존 폰 노이만)에 대한 전기와 게임이론을 핵무기, 냉전 등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적고 있는 이 책을 선택한 것으로 기억된다. 먼저 존 폰 노이만, 게임이론에 대하여 간략히 이야기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서평(감상 또는 추천사)'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말하도록 하겠다.

존 폰 노이만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리고 당신이 이글을 읽을 때도 우리가 존 폰 노이만이라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왜냐하면 폰 노이만은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에서와 같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마다 수천 개의 스위치와 회로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주기억장치(Main Memory)에 내장시켜 놓고 명령어를 하나씩 불러 실행시키는 개념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의 컴퓨터 구조를 ‘폰 노이만 구조’라고 한다. (p.116 이하)

‘천재’ 수학자인 폰 노이만은 1903년 헝가리에서 태어났고, 1957년 골수암으로 미국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저서로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 『힐베르트 공간론』, 『게임이론과 경제행위』등이 있다. 특히, 그는 20세기 전반 냉전 시기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정치, 경제, 과학 분야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앞에서 이야기한 컴퓨터 구조 이야기를 떠나서) 체스와 같은 2인게임에서 착안한 게임이론을 통용하여 정치, 군사, 경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삶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임이론

게임이론은 ‘어떤 행동의 결과가 게임(놀이)에서와 같이 참여자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다른 참여자의 행동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상황하에서, 자기 자신에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수리적 접근법(數理的接近法)’을 말한다. 

개구쟁이 아이들 둘이서 케이크 조각을 나누어 먹게 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을 통해 손쉬운 게임이론의 예를 들면 이렇다. ‘부모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잘라도, 한 아이(또는 둘 다)는 자신이 더 작은 조각을 가졌다고 느낀다. (게임이론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한 아이로 하여금 케이
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 원하는 조각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탐욕이 공정한 분할을 보장해준다. 첫째 아이는 케이크가 똑 같은 크기로 나누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케이크를 잘랐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는 케이크 조각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 깔끔한 예는 폰 노이만이 의미하는 바의 게임일뿐만 아니라 게임이론의 기초가 되는 ‘최소최대’ 원리의 가장 단순한 예시이기도 하다. 케이크 문제는 이익의 갈등에 관한 것이다. 두 아이 모두 똑 같은 것(가능한 한 많은 양의 케이크)를 원한다. 케이크의 궁극적 분할은 한 아이가 어떻게 케이크를 자르느냐와 다른 아이가 어떤 조각을 고르느냐 모두에 의존한다. 각각의 아이가 다른 아이가 어떻게 할지를 예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 상황을 폰 노이만의 의미에서 게임이 되게 만든다. 게임이론은 게임의 답(합리적 결과)을 탐색한다.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첫번째 아이의 최선의 전략인데, 왜냐하면 가장 큰 조각을 고르는 것이 다른 아이의 전략이리라는 것을 그가 예견하기 때문이다. 이 해결책은 한 아이의 관대함이나 공정한 경쟁심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아이 모두 자기 이익에 의해 강요된다. 게임이론은 바로 이런 종류의 해결책들을 추구한다.’

이렇듯 ‘게임이론은 오직 승리에만 관심이 있는 완벽하게 논리적인 경기자에 관한 것이다. 상대방이 합리성과 승부욕 양자 모두를 지녔다고 인정하고 당신 스스로 최선의 결과를 도모하도록 경기할 때, 그 게임은 게임이론의 분석 대상이 된다.’ (pp.68~69)

최소최대의 원리와 탐욕과 불신으로 점철된 세계

위 케이크 자르기의 예를 이용해서 최소최대의 원리를 설명하면 이렇다. 자르는 아이는 ‘무제한의 전략’ (자기 마음대로 자를 수 있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면 2개의 전략이 가능하다. 한 전략은 케이크를 똑같이 이등분하지 않는 것, 다른 전략은 가능한 똑같이 이등분하는 것이다. 두번째 아이(선택자)도 큰 조각을 고르거나 작은 조각을 고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떤 케이크 나누기도 완벽하지 않다는’(즉,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전제하는 것과 같은 완벽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적 문제를 인정해야 해야 한다. 이렇게 한 후 케이크 자르기에 참여하는 아이 모두 ‘합리성과 승부욕’을 지녔다는 전제하에서 보면, 자르는 아이는 자신에게 남을 케이크의 조각이 작을 것이라는 것에서 최소 수량을 최대화하려고 할 것(거의 절반에 가깝게 자르려고 할 것)이다. 즉, 선택하는 아이가 자르는 아이에게 남길 최소를 최대화하도록 행동한다. 선택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더 큰 조각을 선택하려고 할 것이고, 이것은 자르는 아이가 가질 최대 수량의 최소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자르는 아이가 취할 최선의 현실적 결과는 최소 수량의 최대화(자신에게 남을 수의 최대화)이고, 선택하는 아이의 최선의 결과는 최대 수량의 최소화(자르는 아이가 가장 적게 갖도록 하는 것)가 된다. 이렇게 최대최소와 최소최대가 동일할 때 그 결과를 ‘안장점’이라고 하고, 어떤 게임이 안장점을 지날 때, 그 지점이 해당 게임의 답이며 합리적 게임에서 기대되는 결과이다. 이러한 답(안장점)이 나오는 것은 게임 참여자들의 ‘탐욕과 불신’에 있다. 게임 참가자 누구도 적수를 도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pp.81~85)

이렇게 폰 노이만은 ‘완벽한 의사소통과 완벽한 정직성이 없는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고, 이곳은 ‘수많은 협조와 변절이 얽혀 있는 갈등의 세계’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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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eautiful Mind (뷰티플 마인드)』
폰 노이만이 살던 냉전시대 지식인들을 정신
구조와 게임이론이 발전되는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존 내쉬는 게임이론 내에서 중요한 이론(내쉬균형)을 정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현대 국가(권력)가 어떻게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개입하고, 또 사람들을 피폐화시키는가하는 것도 볼 수 있다. 
감 독: 론 하워드
출연자: 러셀 크로우, 에드 해리스, 제니퍼 코넬리, 크리스토퍼 플러머, 폴 베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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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 폭격설'과 예방전쟁

앞에서 우리는 간략히 폰 노이만과 게임이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게임이론’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현재 우리가 서있는 남북 분단이라는 삶의 조건, 핵과 전쟁이라는 실존적이면서도 사회구조적인(차라리 월러스타인이 말하는 ‘세계체제’ 내에서의) 불안에 대한 역사적이고 이론적 통찰,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정책(전략적 행위, 선택들)에 의해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뉴스를 장식하는 말들에 대한 이해를 이 책이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변 폭격설'이 횡행하고 핵위기가 고조되던 1994년에 군 복무를 하고 있었고, 북한의 김일성씨가 죽었을 때도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대한 후에 북핵 관련 위기때 마다 나오는 북한의 특정지역에 대한 폭격설에 대해 더욱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더욱 몸을 떨었던 것'은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동원령에 의해 군에 복귀를 해야하고, 처와 어린 아이만이 난리통에 의지할 곳 없이 서울 어디엔가 남아있게 될 것이라는 좀 더 구체적이고, 지켜야할 것이 생긴 자로서 갖게 되는 그런 불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국내외에서 공격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국외자로서의 태도 아닌가 하는 판단에서 나온 심한 '적개심'과 '그런 결정자들 먼저 전쟁에 자식을 보내라'는 감정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런 감정은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연루된 '병역비리'와 '국적문제' 등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화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폭격설이 핵폭탄이 발명된 이후 '평화'라는 미명하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주장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2차세계대전 후에는 소련(舊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서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사전에 소련에 핵을 투하하자는 "예방전쟁론"을 이 책은 소개하고 있고, "정당화 가능한 전쟁의 조건들"에 대한 논의(주장)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pp.120~124) 이런 '예방전쟁'을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우리도 잘아는 영국의 철학자 버틀란트 러셀이다. 훗날, 소련이 핵무장을 공식화 후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이런 주장을 철회하고 '진정한 의미'의 평화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것들은 북한에 대한 부시정부와 우리사회 매파들의 주장의 전반적인 기조와 동일하다. 영변이든 어딘든간에 북한의 핵개발 의혹시설을 폭격하고, "폭정의 전초기지"이고,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정권을 공격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고속도로 겁쟁이 게임과 북한과 미국의 외교정책, 그리고 남한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 미국, 그리고 남한의 외교정책이 '고속도로 겁쟁이 게임'과 유사한 것처럼 보였다. 이 게임은 고속도로에서 두 운전자가 서로 마주보면서 질주를 하는 것인데, 서로가 상대운전자의 결정을 모르는 채로 각각 도로에서 벗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이 게임의 진짜 요점은 자신은 벗어나지 않고 상대 운전자는 벗어나게 함으로써 사내다움을 과시하는 것이다. 자신은 생존하여 흐뭇해하고 상대 경기자는 '겁쟁이'가 된다. 겁쟁이가 되는 것은 차악이며, 최악의 경우는 죽음일 것이다. (pp.290~291)

이제 운전자에 북한과 미국을 넣고, 고속도로를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이해관계로, 그리고 자동차 운전을 핵개발 강행과 북한 폭격(선제공격)으로 대입해 보자. '진실의 순간'이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두 난폭한 운전자는 서로 마주보며 질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겁쟁이 게임에서는 어느 한쪽이라도 실제 '겁을 먹었고, 겁먹은 것이 탄로가 난다'면 거의 상황이 끝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더욱 거세게 몰아부치고 벼랑 끝까지 간 것처럼 (또는 가겠다는 듯이)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북한의 "벼랑 끝 전술/전략"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물러서는 순간 '겁쟁이'가 되고, 체제 자체의 붕괴까지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미국 또한 마찮가지이다. 북한을 그대로 두고 물러선다면 자신들의 세계지배전략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은? 두 게임 주체의 '벼랑끝전술'에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닌가? 양쪽 모두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싸움을 말리거나, 경제적인 부담/지원을 떠맡는 꼴일 수도 있겠다. 좀 더 비약을 한다면 두 게임 주체는 남한에게 '평화'를 볼모로하여 자신들의 이해에 따르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즉, 두 나라가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게임의 결과, 칼날은 남한에 닿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속도로 겁쟁이 게임'에서도 협동의 결과가 있다. 두 운전자 모두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둘다 살아남고, 그 누구도 상대를 겁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p.291) 하지만 핵문제에서 이런 결과는 북한과 미국 모두 남한에게 평화를 볼모로한 더 큰 경제적 희생(양보)을 강요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 결과가 전쟁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다소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여기, '협동의 결과'에서 남한 정부의 역할(또는 전략)을 유추해 낼 수 있는데, 남한이 어느정도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두 이해당사자들이 명분을 가지고 '고속도로에서 벗어나게 하기'가 아닐까? 두 게임 주체가 약간씩의 양보가 전제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독도문제, 또 다른 게임

이젠 어느 정도 게임이론(특히, 겁쟁이 게임)에 대해서 알았다면 한국과 일본 간의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도 이속에서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의 경험, 기억과 영토의 문제로 좀처럼 양보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 자명해보이며, 운전자(노무현대통령)가 고속도로에서 상대를 향해 가속페달을 밟은 상태이고, 상대도 현재 물러설 태세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양국 모두 가속 페달을 밟고나면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물러나기 어려워 보인다.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독도를 지배하고하고 있는 한국이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실속이 없어보이는데, 이것이 며칠전까지 유지된 '조용한 외교'의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게임이론 관련 책을 한번 읽고 한국의 외교전략을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떤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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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in Hopkins의 예방전쟁을 지지하는 '호전적인' 노래가사 (p.124)

오! 우리는 그 일을 해낼 폭탄을 갖고 있다네.
왜 폭군을 그냥 두나?
미래의 왕국을 위해
그들을 날려버려.
야만인, 폭력배를 살려둬선 안 돼!

버틀란트 러셀의 쿠바 위기에 관한 진술 (평화운동 시기, pp.302~303)

당신은 죽을 것이다. 자연의 노정에 따라서가 아니라 몇 주 내에 그리고 당신 혼자서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 당신의 친구, 그리고 영국의 모든 거주자, 그리고 다른 곳의 수억의 죄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왜? 부유한 미국인들이 쿠바인들이 선호하는 정부를 싫어하고, 이 부의 일부를 사용하여 그것에 관한 거짓말을 유포하기 때문에.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거리나 시장으로 나가 "잔인하고 미친 살인자들에게 굴복하지 마라. 당신들의 수상과 미국의 대통령이 죽으라고 할 때 죽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상상하지 마라. 오히려 당신 가족, 당신 친구,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당신이 선택할 경우 영광되고 행복하고 자유로울 미래의 세계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기억하라"고 외칠 수 있다.
그리고 기억하라! 묵종은 죽음을 의미한다, 저항만이 삶의 희망을 준다.

1962년 10월 23일 버틀란트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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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06년 2월 2일 쓰기 시작하여 오늘(4.26)에야 끝냈다. 왜 이리 일이 많은지! 그리고, 책을 산지 1년이 넘어서는 현재도 우리를 둘러싼 불안한 평화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서글프다. 그리고, 러셀이 쿠바위기에 대한 진술을 한지 몇십년이 지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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