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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volution in Platform Age❯ 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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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미래성장동력으로 융복합 문화산업 육성 방안> 토론회에 제출한 토론문이다. 임성희 SK플래닛 신사업개발실 부장이 <콘텐츠와 플랫폼 융합>이란 제목으로 발제를 했고, 토론문은 발제문의 순서에 맞춰 작성했다.


발제문은 1.Contents Evolution in Platform Age, 2.Digital Video Platform Rush, 3.Change of Viewers, 4.Technological Background, 5.Evolution of Contents, 6.what is to be done?으로 구성되어있고, 1, 2, 6번에서 토론문의 소제목을 가져왔다. 어떤 토론회나 그렇듯이 시간에 쫓겼고, 사전 발제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내 몫의 시간은 토론문으로 대체했다. 대신 토론회에서 떠오른 생각 몇가지를 두서없이 짧게 이야기를 했다. 같은 섹션에 이인화교수(이화여자대학교)가 <콘텐츠와 타분야의 융합>이란 제목으로 발표하며 블로흐의<희망의 원리>를 인용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우발적 사건이었고, 사건적 융합(관계맺기, 연상작용)이었다. 발언의 요지는 이렇다.

웹툰은 한국에서 발견한 새로운 포맷이다. 많은 스토리가 그려지고 다른 쟝르(영화, 드라마, 연극 등)에서 활용된다. 그런데 웹툰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1년에 13만명(?) 정도가 경연에 참여해 30여명 정도가 살아남는 혹독한 경연시스템을 통과해야 한다. 그 안에서 훈련된 몇 명의 우수한 작가가 선발된다. 

웹드라마, MCN 등의 사업을 보면서 일자리를 못찾는 젊은 친구들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고문이고, 구조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 한 개인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이 시장에 뛰어든 젊은이들 대부분은 부불노동으로 플랫폼(IT업계)에 착취당한다. 열정 페이만큼의 월급도 없이 일을 시키는 뉴미디어 플랫폼에서 수익률은 높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만드는 세상과 이를 부추기는 국가가 무섭다. 산업/돈은 있어도 제 정신인 사람은 없다.)
토론문 대체에 따라 토론회는 생각보다 일찍 끝난듯 하다. 사회자가 발제자들에게 토론자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했다. 이인화교수는 정말로 진화는 더디다고, 또 수익모델을 찾는 것은 어렵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리고 무모하게도 작가가 되겠다는 제자들 걱정을 했다. 사회자는 임성희부장과 나 사이에 있는 견해 차이를 이야기하는듯 하면서 차이가 없다는 것 같다며 정리를 했다. 

큰 차이가 있으면서도 없다. '차이가 없는 것'은 아직 결정되지않은, 시간이란 물결의 세례를 받으며 구조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미래가 열려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모두가 초심자이다.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보고 가려는 방향과 현실 판단이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차이들의 길항관계 속에서 누구도 보지못한 물결 무늬가 세겨진다. 그리고 <성장동력>이 아닌 아주 다른 길도 있을게다. 산업화, 자본주의적 시장에 들어오기 전, 재미로 하던 .... 복고풍의 이런 넋두리는 그만 두자! 

회사 일에 묻혀 생각하는 일에는 점점 게을러지는 나를 토론자로 불러내 준 임성희부장(서울대 언론정보학 박사)께 감사드린다.
<Contents Evolution in Platform Age> 토론문

1. 진화, 어디까지 새로운가?

네이버에서 독점 서비스된 <신서유기>에 대한 두 방향의 평가가 있다. 하나는 TV가 아닌 포털(뉴미디어 플랫폼)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일반적인 평가이다. 다른 하나는 ‘잘 만들어진 콘텐츠(well made contents)’를 가지고도 TV를 떠나서는 여전히 충분한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신서유기>를 보면서 방송사 내에서, 또 포털 등에서도 ‘방송사 프리미어 콘텐츠가 온라인에서도 먹히고,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서유기> 이전에는 <72초>와 같은 재기 발랄한 스낵 컬쳐형 콘텐츠 이야기가 많았지만, 방송사가 웹을 염두에 둔 콘텐츠를 만들고 진행한다면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커졌다. 방송업에 종사하지만 TV를 넘어선 온라인서비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방송사의 미래를 암담하게 생각했던 분들도 이런 생각을 같이한다.


하지만 웹만을 위한 콘텐츠로 <72초>가 아닌 <신서유기>와 같은 작품이 지속적으로 나올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신서유기>를 통해 현재 방송산업이 만들어놓은 수익모델을 OTT(Over The Top) 서비스에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방송, TV에서 나가고 그 다음 온라인에서 유통했을 때도 <신서유기>가 온라인에서 거둔 매출 수준을 달성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독점 웹캐스팅과 많은 플레이수에 따른 놀라움과는 달리 ‘현실로 돌아와 주판을 팅겨보니 기회손실이 컸다’는 것다. 註1 
최근 여러 방송사에서 제작한 몇 편의 미니드라마(웹드라마)에 대한 수지를 검토했었다. 제작 협찬 (PPL)이 20%, 콘텐츠판매(유통)이 80% 정도의 매출을 차지하고, 포털에서의 동영상 광고 매출은 2%가 체 안된다. 그 중 해외유통 매출 비중이 70%를 차지하는 것도 있다.

미디어와 기술이 융합되며 만들어지는 이 시장은 다양한 참여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웹드라마는 다양한 종 중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항존한다. 방송사의 접근(제작방식)과 <72초>와 같은 MCN(Multi-Channel Network, 또는 한국적 변종인 웹스튜디오)의 접근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특히 국내 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매니아성 이용자와 열린 미래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대규모 종(우점종)’으로의 생존은 어려워보인다. 왜냐하면 (미디어산업을 놓고 보면) 종(또는 아종, 변종)적 차별성보다 ‘동일한’ 환경적(구조적) 결정성이 좀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2005년 창립했고, MCN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근래의 일이다. 또 산업에서는 자연선택 대신 시장선택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사업적’ 포맷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길은 멀고, 진화는 오랜 기간의 생존과 그 과정에서의 선택을 전제로한다. 시장은 기다릴줄 모르며 자연보다 더 냉혹하다. 진화 과정에서 생성 중인 종을 구별(distinct)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2. 뉴비디오플랫폼(New Video Platform), 어떤 문제에 직면할까?

‘디지털 비디오 플랫폼 러쉬(digital video platform, 또는 OTT 서비스)’가 있다. 지상파, pay-TV, 미디어 스트리머(media streamer, 또는 paid-OTT)와 ‘사용자 충성도와 광고 성장 잠재력’에 주목한 웹/모바일 비디오 플랫폼 등이 혼재되어 경쟁을 한다. 플랫폼 파편화(Platform Fragmentation)로 매스미디어 기반의 사업모델이 흔들린다.

미디어산업을 ‘이중상품시장(dual product market)’으로 분석하는 시각있다. “미디어 산업은 이중상품시장(dual product market)이다. 첫째 시장은 정보, 음악, 영화, 게임, 모바일 등 미디어 콘텐츠를 이용자에게 판매하는 시장이다. 둘째 시장은 광고시장으로서 미디어 산업이 광고주에게 이용자(혹은 이용자 접근권)를 판매하는 시장이다. 이렇게 미디어 산업은 이용자를 위한 상품과 광고주를 위한 상품을 생산한다. 그러나 사실상 한 가지 상품을 생산하면서 별도의 서비스 시장에 참여하는 것으로, 어느 한쪽 시장에서 올리는 성과가 다른 시장의 성과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두 시장 모두 이용자 규모와 관련된 것으로, 특정 미디어 콘텐츠에 대해 이용자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이용자를 판매하는 미디어 산업의 광고 수입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라는 분석을 제시한다.註2

플랫폼의 파편화로 ‘이용자 규모’의 분산이 초래되고, 유료와 광고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사업모델이 무너지고 있다. 신문산업에 몰아친 태풍에 이어 영상산업 위에도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런데 “종이신문의 이용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방식의 신문 이용 감소가 신문사가 제공하는 콘텐츠 이용의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신문기사를 이용하는 결합 열독률이 이번 조사에서 76.4% 로 2012년(77.6%)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고한다.

(국내로 한정하고, 거시적인 흐름에서 본다면) 고정된 이용자 규모에 ‘동일 콘텐츠’의 전달자(매체, media) 증가가 문제의 핵심이 아닌가 유추할 수 있다.註3 이런 맥락에서 글로벌 사업에 대한관심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근본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피할 수 없는 이런 산업적 변화보다 우리는 더 커다란 문제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유튜브 이야기로 100만 뷰면 100만 원 번답니다. 100만 뷰 할 시간에 기존 미디어를 이용한다면 그 광고매출은 100만 원 이상일 것입니다. 광고주가 주도하는 다매체 환경은 콘텐츠 가치를 훼손하는 광고소재 제공을 요구할 것입니다.” 오늘(2015.11.18일) 받은 메일 내용의 일부이다.

‘다매체 환경에서 광고주가 요구하는 광고’는 어떤 것일까? 현재 시장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광고를 보며 유추할 때, 네이티브광고(native advertising)가 아닐까! 플랫폼 파편화 속에서, 플랫폼의 영향력(사업결정력)을 피해 나가면서 여러 플랫폼을 드나들 수 있는 포맷(또는 스타일)이 버즈피드(BuzzFeed.com)형 광고인듯 하다. 기사 내에 삽입된 광고, 스토리에 녹아들어간 광고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콘텐츠의 시장가치(교환가치)를 올리기 위해 사용자 가치를 서서히(또는 급격하게) 버려야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먼저 뉴스에서, 그리고 전통적인 스토리 기반의 드라마에서도! <신서유기>에서 PPL(Product Placement, 제품 간접광고) 소동이 있었고, 네이버의 웹드라마 전략(수익모델)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볼 수 있다.註4

좀 더 논리적 비약을 해보자. 새로운 산업의 생성에 따른 종의 정체성(identity)의 위기는 사실(fact)과 이야기(story)의 위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근대세계의 기반이 되었던 데카르트(Descartes)적인 명석 · 판명(clear and distinct)한 기준이 무너지고 ‘애매 · 모호’한 세계, 혼잡한 세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근대적 미디어가 만들어낸 국민국가라는 ‘가상의 공동체’도 함께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세계를 만들고 있다.


3. 무엇을 할 것인가?

플랫폼 간의 경쟁 환경에서 검색, 소셜피드(social feed), 포털력(portal power), 그리고 큐레이션(curation) 등의 기능적 접근은 필요조건이다. 사업자에 따라 그 요소들 중 자신이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요소를 중심으로 어떻게 배치하느냐의 판단들이 뒤따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공동체적인 가치 이전에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 생존, 진화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가치모델(monetizing model) 위에 서있어야 한다는 충분조건도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미디어시장구조(dual product market)와 콘텐츠의 본연적 가치로 되돌아가 다시 생각(rethinking)해봐야 한다. “커다란 충격이 엄습해 오고 있습니다. 디지털의 두 번째 물결은 이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어서 전통 미디어의 기반을 완전히 허물어 버린 채, 우리를 방송 영역 너머의 세상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BBC는 이와 같이 놀랍고 혼란스러우면서도 흥미롭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새로운 기술과 기대의 변화에 창조적인 대응을 해야 합니다. 온디멘드서비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콘텐츠를 기획하고, 의뢰하고, 제작하고, 포장하고, 유통시키는 방법을 이전과는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새로운 서비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해 오던 것을 어떻게 달리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註5 

뉴욕타임즈를 이끌고 있는 마크 톰슨(Mark Thompson)이 BBC 사장 시절(2004~2012년) 한 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라는 질문에 “This isn't about new services it's about doing what we already do differently.”라는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공동체를 지키면서도 ‘창조적 진화’를 하기 위하여! (2015.11.18)


註釋 ---------------------

1. 지면 관계 상 이 글에서 다루지못하지만 넷플릭스와 훌루모델이 왜 다른가를 평가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2. 정회경, ⟪미디어 경영· 경제⟫, 커뮤니케이션북스
미디어 경영.경제 - 10점
정회경 지음/커뮤니케이션북스

3. <2013 언론수단용자 의식조사>, 한국언론진흥재단(2013.12), http://goo.gl/b5x0kh
4. www.google.com에서 ‘신서유기 PPL’, 네이버 웹드라마 PPL’ 키워드로 뉴스 검색 결과를 볼 것, https://goo.gl/dwfWKc, https://goo.gl/tIS8L0, 네이버 전략 관련 내용은 http://www.slideshare.net/Borashow/naver-businessconference201411searchads를
참고할 것
5. BBC Press Release, “Creative Future - BBC addresses creative challenges of ondemand”(2006.4.25). http://www.bbc.co.uk/pressoffice/pressreleases/stories/2006/04_april/25/
creative.shtml을 볼 것.

희망의 원리 - 전5권 - 10점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열린책들





http://www.dckorea.co.kr/tc/archive/201511#entry_275

민주적 전제정 : 토크빌 -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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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20 update 

과거에 한번도 국가가 대다수의 국민(시민/서민)들에게 '보호자/후견자'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기에, 또 K-방역이라는 선제적 행동과 국민들을 비행기에 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감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19와 함께 국가/정권은 "물질적 향유를 만족시켜주고 그들의 운명을 지켜주는 거대하고 보호자적인 권력"의 성격을 더욱 띄게 되는 것 같다. 이제야 명시적으로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생체권력(biopower) - 미시권력'의 작동을 보는 것은 아닐까.

그 이전에 '세월호 이후 - 촛불혁명'으로 출발한 정부라 '안전, 생명, 시민/국민'에 대한 각별한 태도 밑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동의 효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민주적 전제정❯ 말이다. 만들어진 법/제도는 사용하는 자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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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사람들이 어떤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예절을 갖춤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 생활상태의 차이를 드러내는 은혜는 받는 사람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소박한 예절은 못 견딜 정도로 매혹적이 된다. 상냥함은 인간을 도취시키며 설사 세련이 덜 된 점도 반드시 불쾌하지만은 않다. 토크빌은 19세기 미국의 부유한 시민들은 예절을 알고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예의를 지킨다고 이야기 한다.(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II, 674) 

이것은 19세기 이야기이고 지금의 미국은 그렇지않다. 박홍규 교수는 토크빌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이점을 계속 지적한다. (박홍규,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242-256)

하지만 프랑스의 (구)귀족들은 19세기 미국의 부유한 사람들과 같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들(귀족들)과 평등해진 모든 사람을 억압자로 간주하게 되며, 그 억압자들의 운명은 아무런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들과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은 갖지 않는다.' (토크빌, 670)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귀족사회에서는 조상 숭배와 자녀 사랑을 낳는 가족적 결합, 동향적 결합, 계급적 결합, 은혜-종속의 봉건적 결합으로 인해 '거의 언제나 자기 밖의 어떤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민주사회에서 이런 귀족제적 성격이 무너져내리고, 개인주의적으로 변하고, 평등의 추구는 '민주적 전제정'이 될 수 있다. (박홍규, 224)

민주적 전제정에서는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권자가 전체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들에게 민주주의적 전제군주는 "물질적 향유를 만족시켜주고 그들의 운명을 지켜주는 거대하고 보호자적인 권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민주주의적 전제정의 출현은 민주주의 시대에 개인들이 교육과 자유라는 습속에 적응하지 못한 상황에서 물질적 쾌락의 욕구가 먼저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물질적 쾌락에 대한 강한 욕구는 각자의 사적인 재산과 공공의 번영과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홍태영, 몽테스키외 & 토크빌 -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살아가기, 138)

(계급, 계층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귀족, 지도자, 부자에 대한 존경은 매혹, 매력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의 부자들에겐 이런 매력(예절)도 없고 짐승같은 힘의 논리, 갑을 관계로 가득 차있다. 세월호 보상에 대한 정권과 고위층의 행태는 동정심도 예절도 없어보이고, 땅콩회항 사건 등도 그렇다. 

노동개혁을 이야기하면서 '가족(부모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상호분열성을 확대하며, 생계(경제)와 (북한으로부터의) 안전에만 집중하게 하는 정권을 볼 때, 토크빌이 우려했던 민주주의적 전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한다.
우리사회가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적 제도가 작동하고 있다면, 내용적으로는 '귀족정'이거나 '전제정'인 듯 하다. 그들에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고, '어떤 사람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며 또 아무 것도 기대하는 바도 없다'(토크빌, 669)는 '한국적/자수성가형' 개인주의가 만연한 것은 아닌지! 역설적이게도 이런 것을 '천민적'이라고 하나보다! 

'노동개혁'을 하면 법인세율을 낮추고, 기업/국민 돈으로 정부가 '실업급여'를 올려주겠다는 이상한 주장도, 아버지의 급여를 깍아 자식에게 주겠다는 조삼모사도, 2년 계약직을 4년으로 늘리면 노동시장이 안정화된다는 이야기까지. 노사정위원회를 보면 정부는 선량한 균형자를 넘어 국민들을 (경제적) 공포에 몰아넣고 시장 침탈적이다. 이들이 부자에게 기울어져 있도록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시장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자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왜 우리는 이들에게만은 굴종적일까? 시장을 이야기하며 왜 국가의 개입에 너그러울까? 왜 자유를 주장하는 광범위한 결사를 만들어 이들을 견제하지 못할까? 왜 우파적 자유주의를 무기로 민주적 전제정에 대항하지 못하는가? 좌파적 국가 개입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우린 자유주의 내에 담겨있는 '진보성'을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모두를 넘어서려면 '물질적 쾌락의 욕구'(경제 발전)를 앞세워 국민을 닦달(das Gestell)
하는 전제군주(국가, 관료,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제한하고 자유의 습속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2
A. 토크빌 지음, 박지동.임효선 옮김/한길사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박홍규 지음/글항아리

박홍규 교수의 주장이 강해 다른 글들과 비교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장이 강한만큼 힘이 있고, 논지 파악을 명확하게 해주는 잇점이 있다.

몽테스키외-토크빌 :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살기
홍태영 지음/김영사

100년의 격차가 있지만 몽테스키외(1689년 1월 18일 ~ 1755년 2월 10일)는 홉스(1588년 4월 5일 - 1679년 12월 4일)보다 경험적이다. 이 말은 홉스가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정치이론에서 몽테스키외, 토크빌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전통은 홉스, 로크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계약론/자연권에 기반한 전통과 다른 길을 가는 듯 하다.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이란 공식이 적용되지않는다.



황용엽 _ 인간의 길 : The Path of The Human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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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08.23 옛 블로그(태터툴즈)에 게시했던 글을 웹 아카이브에서 복원한 것입니다.

황용엽은 193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강서보고 2학년 때인 1948년 9월 소비에트 학제에 따라 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해, 평양국립미술대학까지 진학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50년 12월 6.25전쟁에 따른 강제 징병을 피하려고 대동강을 건너 월남했다. 황용엽의 짓이겨지고, 꺽이고, 묶이고, 비틀려진 인간의 모습은 제국주의적 일본 치하, 사회주의 북한에서 보았던 기독교인에 대한 참혹한 학살과 그후 남한으로까지 이어지는 보복의 행로, 전장의 아수라장과 전쟁에 참여해 상이 군인으로 제대한, (갈 곳 없는 월남한 실향민인) 자신의 삶을 담고있다.



황용엽이 화가로서 이정표가 되는 그림은 1959년의 <여인, 위 그림>이다. 차가운 시선의 두 눈, 기형적이고 비틀어진 팔, 오랜 세월 버려져 두터운 먼지가 쌓은 집처럼 위태롭고 칼자욱 같이 날카롭게 뻗친 선들로 표현된 몸은 언제 흩터져 저 배경 속 물질세계로 딸려들어 갈지도 모르겠다. <마른 소년, 바로 아래 그림>에서 쇠처럼 녹이 슬어버린 듯한 소년과 세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어 보인다.(아래 '부분 확대' 그림을 볼 것) 밀려들어오는 쇠붙이로 된 세계의 흐름 속에 주체가 지워져버리는 듯 하다. 물질성 속에서 주체의 형상은 사라져버린다. 그가 마주한 세상은 그림처럼 두텁고 검붉다. 나이프로 짓이겨 쌓아올린 두터운 물감이 물질감을 강화시키고, 단순하고 두터운 색조는 (잭슨 폴락처럼 동적인 물질성과는) 다른 형태의 물질적 추상성을 끌어낸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운동이 아닌 침잠이거나 죽음이 아닐까!




<여인, 1959, 가장 위 그림>이나 <변질한 여인, 1960, 바로 아래 그림>에서 칙칙한 물감 더미 사이로 삐져나왔던 선명한 색채를 <마른 소년>에서는 찾을 수 없다. 생명 - 육체와 정신은 쇠붙이처럼 녹이 슬고, 고목처럼 말라버린 것일까! <변질한 여자,degenerated woman>에서 청동빛의 두터운 물감(물질) 위로 여인은 희미한 윤곽선과 함께 우중충한 삶을 뚫고 나올 듯한 원색의 빛을 내뿜고 있다. 하지만 녹슨 철/청동(금속)을 깨지못하고 <마른 소년>의 소년은 쇠처럼 굳어져 산화되어버린 걸까!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황용엽의 세상은 바뀐 듯하다. <인간, 1977, 바로 아래 그림>을 보면, 쇠붙이들 위로 나무들이, 잘 다듬어진 목재들이 자리를 잡는다. 짓이겨진 물감대신 선적인 붓터치가 모여 잘 정돈된 면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인간이 있다. 사람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 중이고, 그 사람을 여러 가닥의 줄들이 동여매고 있다. 종교적 아우라(aura)를 형상화한 둥그런 원, 삼각형으로 단순화된 인간(의 얼굴)은 기하학적이고, 따라서 정신성을 부각한다. 하지만 이제 구도의 시작인 뿐 인간은 여전히 닫힌 공간 속에 갇혀 있다. 황용엽은 인간은 본성상 악마적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하반신을 성스럽게 가렸지만 악마적인 눈빛을 내뿜고 있다. <인간, 1985, 아래 아래 그림>을 보라.




이런 부조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신/눈빛(얼굴 또는 안면)의 악마성과 육체의 신성성은 왜 대립하고 있을까? 그 부조화와 대립을 생산해내는 것은 기억인 듯 하다. 물감이 만들어내는 붓터치와 질감, 색깔은 안정화되어가는 육체/물질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그 위에 있는, 또는 그런 물질과 함께하는 정신은 과거를, 기억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감은 자연(나무)를 향하고 정신은 추상을 향해 나아간다. 물질세계가 계속 새로운 물질로 바뀌어가는 것처럼,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던 어린 육체도 바뀌었을 터이다. 하지만 지속되는 기억 속의 인간(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명료해진다. 명료성은 기학학으로 분명한 선들로 드러난다. 선들은 어린시절 그가 평양, 양부모 집안의 큰형이 경영하던 서점에서 보았던 로트렉이거나 후앙 미로일 수 있다. 성화된 육체는 60년대 비틀어지고 왜곡된 탈성화된 육체의 극복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 1978, 위 그림>을 보면 정신도 육체를 따라 평화에 접어든 듯 하지만, 그 보다 후에 그린 <인간, 1985, 위 위 그림>에서의 인간은 여전히 악마적/갈등적이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황용엽의 1978년(1970년대)의 그림에서 마주보고 대화하는 인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내 이웃을 용서하라"는 말씀에 따라 다른 사람(타자)에 대한 용서이거나 소통을 시작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들여다보고 있는 자기의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악마성(전쟁과 살육의 기억들과 같은)에 대해서는 용서/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1985년의 <인간>은 작가의 자화상이 된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표현은 철(금속)에서 나무로, 또 몸을 둘려싼 신화적(성스러운)인 천으로 감싸 안은 몸/육체로 변화한다. 자연은 바뀌어도 인간은 잘 바뀌지않는다. 아니 인간은 바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연/물질은 모든 것을 잊지만(기억 자체가 없고 물질적/물리학적 운동뿐이겠지만), 인간은 물질 세계가 만들어낸 사건들을 만나 그것을 기억을 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 기억 속에서 변화하는 세계를 넘어서는 주체/자아/정체성(identity), 또는 개체성을 획득한다. 기억을 가진 인간은 누층적이고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함께 의미를 가지고 존재한다. 기억을 못할지라도 우리의 현재 속에는 과거가 꿈틀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기운을 느끼는 감수성이 남다른 사람들, 또 충격적 사건에 휩말려 감당못할 의미(회의)의 폭풍 속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그 기억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



위에 있는 <인간, 1984>에서 작가의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다. 짓이기기(60년대)에서 섬세한 붓터치(70년대)로, 이번에는 붓을 뿌려 세계의 운동성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 운동은 구멍이 숭숭난 바위(현무암?)와 같다. 날까롭거나 모나지않고 둥글둥글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시멘트 같은 질감이다. 또 이 운동성은 바위 속에 새긴 정지된 운동성일 수도 있다. (부동의 동자인) 정신에 새겨진 영원한 운동말이다.
아래 1983년 그림에서 우린 나무도 갖게 된다. 갖는다기 보다 이 세계에 우리와 함께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떠난 곳을 언제나 가득 채우는 녹색의 생명(나무)조차도 쇠붙이에 눌려 인간처럼 일그러진 듯하다. 녹색의 산과 들, 대지와 바위 위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듯한 사람도 출현한다. 흰옷에 머리를 질끈 묶은 것으로 봐서 어린시절 보았던 고향의 농부일 수도 있다. 생명은 약동하고 세계와 인간이 함께 변한다. 그래도 앙상한 육체, 웃음이 얼굴에 깃들었어도, 마음이 즐거워도 과거는 우리 육체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체와 정신 사이 어디에서!



그때 황용엽은 평화를 되찾으려는 그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만났음에 틀림없다. (아래 그림을 보면) 그 만남은 엘 그레코의 그림처럼 보인다. 뻗어올라가 기둥과 높이 치켜든 두손, 회색빛 하늘에서! 아니면 프란시스 베이컨을 뒤틀린 육체, 척추가 없는 살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과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세계(다른 인간을 포함한)와의 불화를 넘어설 수는 없는 걸까! 억압된 것들의 회귀일까! 다시 한번 기억은 누층적이고, 기억은 물질로, 그림으로 물화된다. (힘든) 기억은 (억누르는, 또는 평화를 바라는) 정신을 뚫고 나와 이 세계 속에서 '즐거워하는' 황용엽의 육체를 통해 표현되고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기억은 과거 함께 현재, 그리고 미래와 맞닿아 있기에 항상 다른 얼굴일 수도 있다. 기억은 지속되면서도 항상 새로운 것이 된다.






위에 있는 <옛이야기, 1995>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화면 제일 위로 산과 같은 곡선이 어어진다. 십장생에 나오는 산 모양, 위 아래로 3개씩 있는 모로 서있는 사각형과 그 안의 무늬들, 그 사각형을 있고 있는 밤색의 선들은 좀 더 안정적이고, 한국적이다. 또 기형적이지만 나무들도 좀 더 자랐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뛰어간다. 누적된 기억 안에는 항상 고달프고 피하고 싶은 것들만 있는 것는 아니다. 그 기억의 더 아래쪽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쌓인(체험한) 즐거운 것도 있었을 것이다. 누적된 기억과 변화된 세계/현재가 만나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고, 기억은 새롭게 배치된다. 황용엽의 인생 여정을 볼 때, 인간에게 구원의 힌트는 과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날>에서는 좀 더 민화적이고 한국적인 산, 개나리꽃이 가득 핀듯한 들과 나무가 등장한다. <옛이야기, Old Story, 1995>에는 붉은 꽃이 피고 그 나무 위에서 새가 울고 있다. 옷감에 놓인 수처럼 꽃과 나무, 새는 좀 더 장식적이다. 대지는 푸르르고 원색의 생명들이 넘실댄다. 황용엽은 나이가 들면서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 자리한 '옛 이야기' 속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고향은 기억 속에만 있으며 지금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아래 <고향 가는 길, On the way to hometown, 1995>은 기억 속에서 신화화된 물질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불로초와 닭 등으로 표현되는 영험성 또는 문화적 기억으로서의 역사성, 작은 흰색 천조각을 걸친 신화화된 육체, 슬픔게 쳐다보는 커다란 외눈(왼쪽)의 사람은 지친듯 엉덩이를 대지 위에 두고 쉬고 있고, 다른 두 사람은 나무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한다. 휴식과 갈망, 두 그림이 하나의 액자 안에 그려져 있다.

항상 흘러가버리는, 변화하는 물질 세계 속에서 변화지않는 것, 무엇인 인간을 담으려고 하면서 황용엽의 그림은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흐르고, 인간을 포함한 사물들은 부자연스럽고 기형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동적인 세계를 정적인 그림 안으로 끌고들어오려는 시도는 언제나 기형적인 것은 아닌까! 현재의 재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형화되기 마련 아닐까! 기억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또 그 기억이 만든 정체성들이 그렇다면 ...... 우린 기억과 물질세계 사이 어디쯤에 서있어야 할까!



황용엽 인터뷰 - TV미술관, 1992.4.10 (KBS)
"사실은 이런 것이 하나의 괴로운 기록이죠. 그리고 일기라고 해서 그날그날의 사건을 말하는 일기가 아니고, 전체적인 묶음 말하자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주기적으로 변화해오는 크게 봤을 때의 일기지. 그저 남과 같이 일상생활에 대해서 평범한 이런 것만 가지고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건 아닌가?"

황용엽 인터뷰 - EBS미술관, 1993.9.19
"너무 어둡고 너무 처절하고 이런 것들이 지속하여 왔는데 최근에는 그런 것을 좀 멈추고 좀 더 새로운 좀 더 긍정적인 무언가 이제까지 살아온 것보다는 앞으로 사는 것이 짧지마는 어떤 환희 또는 내가 고향에 갈 수 있는 또는 고향에 가서 가족 혈족을 만날수 있는 이러한 것들을 ... 여러번 죽음 앞에 부딪히는 일이 있었고 또 상대를 제가 죽이지 않으면 제가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죽음의 고비랄까 극한상황 이런 것을 여러번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적 기억은 지속의 한 형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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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3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_황용엽, 인간의 길을 본 후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느낀, 그런 풍으로 스케치를 시도했다. 23일 시작해 30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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