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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가 우려스러운 점 - 1:1로 진행될 대화의 정황, 그리고 답이 있는 사실이 아닌, 답이 없는 행위의 문제에 (사적형식의) 대화로 개입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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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쿤교수 기사를 읽고, 공식을 찾아보다가 아래 긴 글을 facebook 에 쓰고, 오늘 블로그로 옮겨놓는다. 블로그에서는 관련 글을 찾아 링크를 붙여놓았다. --- Hume의 연합설 기준으로 보면 인과론조차 믿음의 체제에 기반한 ‘환상’일 수 있는데 …. 인간이 AI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최근의 ‘정황’(Deleuze의 흄 해석 참조)이 자못 흥미롭다. 베르그송은 ‘왜 이렇게 연결은 안되고 저렇게 연결은 되는지’를 가지고 흄의 연합이론을 비판했고, 이에대한 들뢰즈의 변론 중에 나온 개념이 ‘정황’이다. 2007년 이후 십여 년 넘게 내 관심사이다. 어떤 정황 속에서 제도화된 믿음의 체계가 세워지고, 또 붕괴 되는가! 벤야민의 ‘기술복제-사진‘에 의해 생성된 변화(아우라의 붕괴, 제의효과에서 전시효과로)와 더불어 … 이와 유사한 인터넷-기술의 인접성과 유사성을 비교해 어떤 인과성, 정황을 설명하는 것 … 내 삶은 이런 '정세' 속에 서 있다. 내게 챗GPT에서 우려스러운 것은 거의(대부분) 1:1로 진행될 대화의 정황 때문이다. 플랫폼/기술의 비공개성보다 그 대화 자체의 비공개성! 앞 맥락을 살려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챗’은 그 정황 속에서 다음 이야기할 말을 찾고, 그게 환상이나 확증적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거짓이 어떤 이, 그 챗팅에 참여한 사람에겐 진실(믿음)이었기에 끌려나온 말일 수도 있다. 기계지만 사람처럼 교양있게 대화를 이어가야 하니 … (이에 대한 논의가 튜링 테스트 - '중국어 방'에 대한 실험모델 이다.) 챗GPT가 튜링 검사를 통과했다고? (2023.4.2, 김재인, facebook) 그 유도된 환상 속에 하나 하나의 개인들이 들어섰을 때, 세상은 천국이거나 지옥일게다.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천국, 그 사람을 품고 있는 사회/공동체는 지옥. 유튜브 추천이 만드는 파편적 세상이 원자차원에서 열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 활용할지 먼저 집단적으로 생각하고 규칙을 만드는게 좋겠다. 왜냐하면...

뉴욕타임즈, Peacock 사이에 선 CNN과 우리가 찾은 한국적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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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2022.4.25 posting) -  CNN+ 철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 고객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상품 단순성과 올인서비스로 힘을 집중 을 볼 것 update(2022..4.18) -  CNN+ Is Said to Surpass 100,000 Subscribers in Its First Week (www.bloomberg.com, 2022.4.13) 첫주 가입자는 10만명을 넘음 (공식수치가 아닌 비공식적으로 관계자에게 확인한 수치) 출발에 대한 긍정적 평가: "The number for CNN+ is small relative to mass-market entertainment services like Netflix and Disney+, which have been around far longer, but suggests a favorable start for a news service in a business where only a handful of players top 1 million customers. "  <-- 아래 4.13일 '흥행실패라며 비교한 the wrap.com의 기사'와 달리 entertainment가 아닌 News라고 이야기하면서 NYT와 비교하고 있다. 10만명의 성과에 대해 비교점: CNN의 케이블 네트워크는 작년에 하루 평균 773,000명의 총 시청자 를 기록인듯 하다. update(2022.4.13) - CNN+ Launches On Roku in the U.S.  (the wrap.com, April 11, 2022) 4.11일, 월요일  Roku 내 서비스 런칭    <-- 관련 내용 3.30일 CNN+ 런칭을 볼 것 안드로이드TV에서는 제공되지않음 (로쿠에서만 가능) 3.29일 런칭 후 2주정도 지난 현재, 낮은 가입자수 독립형 모바일 앱 출시당일 약 18,000개 설치 3.22일까지 7일간 하루평균 9,000개 설치 출시...

벤야민과 루카치, 그리고 인터넷과 이데올로기 - 산 경험/체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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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7일 이런 글을 읽으며 기사 주변에 Deleuze와 Benjamin의 연계점을 메모해놨다. 그 내용과 최근 읽고 읽던 책 내용을 함께 생각해봤다. '아우라의 세계에서 대중은 예술작품 속으로 침잠하지만, 아우라가 붕괴한 현대의 대중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대중은 예술작품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뜯어내 각자의 작품으로 몽타주한다. 전통의 아우라가 무너진 자리에 천 개의 새 아우라가 꽃피는 것이다.  (영화와 사진은)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하는 감각을 훈련한다. 그것은 상상과 신체를 바꾸고, 마침내 나와 공동체를 다르게 몽타주한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벤야민에게 현대의 대중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자기 속'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속'으로로 (치환해) 이해한다면 이 말 속에서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를 만날 수 있다. 존재론적 지위에서 나오는 사회/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 존재와 인식(이해), 그리고 실천(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변화/변혁. 역사의 담지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그런데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속'으로의 침잠은 생생한 살아있는 체험 속에서 만들어진, 파편화된 이해에 기반한 다른 세계의 창조까지도 포함한다. 대중 개개인 속에서 창조된, 아니 실제 존재하고 체험된 세계 를 기반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대체하는 것과 같은 다른 장치와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일베의 세계'와 같은 것. 이것이 개인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접속(접근) 가능한 기술적 체계(매체)와 만났을 때, '천 개의 세계'는 벤야민의 바람(기대)처럼 향기나는 꽃이 아니라 지옥도 가 된다. 아니면 아주 '부르조아적인/자본주의적인 이용/사용법을 상상할 수도 있다. 루카치가 전제한 계급적 실체성...

유튜브와 매스미디어 -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공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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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튜브와 방송사가 다른 길을 가기를 원한다. 콘텐츠 내용에 있어서, 그리고 도달하려는 시청자(이용자)의 범위에 있어서 그렇다. 분산된 컴퓨터의 네트워크 환경에서 태어난 인터넷은 그 자체로 (파편화된) '조각보들'의 모임이다. 울긋불긋하고 자유롭다. 그 안에서 새로운 감성이 자란다.  새로운 감성, 자유, 다양성, 민주적 의견 등등. 이것은 다른 어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 완전하지 않기에 나타나는 편향들 이다. 쪼개진, 그러면서 강하게 연결된 확신에 찬 'SNS의 Peer Group'들, 카톡의 단톡방을 보라.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인간적인 한계에 대한 이야기들, 드라마(원래 사건이란 뜻이다)가 필요 하다. 그 인간적 한계에 대한 공감 위에서 다원성이, 다른 의견들이, 다른 감정/정동들의 집단들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그것이 안될 때, 이곳을 지옥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자. 나는 무한을 믿지만, 그것이 유한한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믿는다. 안셀무스(11세기 후반 캔터베리 대주교, Anselmus, 1033-1109)는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   그 자체로 유한한 '인간의 산물'이 무한성을 주장할 때, 우린 어떻게 될까! 2012년 2월 월간 web에 나온 ❮유튜브 - 매스미디어 '공감'론 vs 유튜브 콘텐츠의 무한 가치❯이다.  (아랫쪽에 pdf 파일 있음) 인터넷으로 먹고 사는 내가 공감을 이야기하고, 방송을 하는 뮤지션인 남궁연씨가 '유튜브'를 이야기한다. TV도 웹도 함께 있기에 서로 외면하지 못하고  '공진화(co-evolution)' 한다. ------- 유튜브 - 매스미디어 '공감'론 대중과 공감 방송사는 매스미디어다. ...

그리스 연극에 대한 관심 - 어떻게 공동체를 묶어낼 것인가? (또는 어떻게 사회를 보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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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년 사이에 쓴 글인 듯하다. 6월 19일 올린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고대 그리스의 연극, 공적 공간⟫ 부분 은 아래 글의 일부만을 떼다 놓은 것이다. ⟪뉴미디어 탐구⟫란 큰 제목으로 이리 저리을 끌쩍대면서 시간을 보내고, 이것 저것을 찾아보던 때이다. 따로 제목도 없다. 이 글을 쓰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첫 세 단락에 있다. 세번째 단락은 '박홍규,⟪플라톤다시보기❯, 필맥, 2009년, pp.129~130'을 보면서 갖게된 의문을 써놓은 것이다. 플라톤 다시보기 박홍규/필맥 시간이 되면 참고/인용된 책과 논문들에 대한 주석을 업데이트해 놓겠다. -------------------------- 연극관람 수당 30년 가까이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년 B.C.)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8개월이 지난 다음 해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부활한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결성해 50년 간 지속된 페르시아전쟁(499 ~ 449년 B.C.)에서 승리했을 때와 비교하면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이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됨으로써 참여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주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 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생각엔  ‘ 패전   후   해결할   다른   문제들도   많았을텐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아테네   민주정은   왜   연극관람   수당을   지급했을까 ?  그것이   그렇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