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게시물

벤야민과 루카치, 그리고 인터넷과 이데올로기 - 산 경험/체험에 관하여

작년, 7월 7일 이런 글을 읽으며 기사 주변에 Deleuze와 Benjamin의 연계점을 메모해놨다. 그 내용과 최근 읽고 읽던 책 내용을 함께 생각해봤다.

'아우라의 세계에서 대중은 예술작품 속으로 침잠하지만, 아우라가 붕괴한 현대의 대중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대중은 예술작품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뜯어내 각자의 작품으로 몽타주한다. 전통의 아우라가 무너진 자리에 천 개의 새 아우라가 꽃피는 것이다. 

(영화와 사진은)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하는 감각을 훈련한다. 그것은 상상과 신체를 바꾸고, 마침내 나와 공동체를 다르게 몽타주한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벤야민에게 현대의 대중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자기 속'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속'으로로 (치환해) 이해한다면 이 말 속에서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를 만날 수 있다. 존재론적 지위에서 나오는 사회/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 존재와 인식(이해), 그리고 실천(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변화/변혁. 역사의 담지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그런데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속'으로의 침잠은 생생한 살아있는 체험 속에서 만들어진, 파편화된 이해에 기반한 다른 세계의 창조까지도 포함한다. 대중 개개인 속에서 창조된, 아니 실제 존재하고 체험된 세계를 기반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대체하는 것과 같은 다른 장치와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일베의 세계'와 같은 것. 이것이 개인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접속(접근) 가능한 기술적 체계(매체)와 만났을 때, '천 개의 세계'는 벤야민의 바람(기대)처럼 향기나는 꽃이 아니라 지옥도가 된다. 아니면 아주 '부르조아적인/자본주의적인 이용/사용법을 상상할 수도 있다.

루카치가 전제한 계급적 실체성에 대한 회의(문제제기)와 함께, 우린 존재와 의식,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조응이 아닌, 상대적 자율성이나 괴리, 어긋남(우연성, 창발/발산?) 등을 생각하고, 실제 그 내용과 결과들을 관찰할 수 있다.

대중은 자기가 원하는 것, 즉 욕망하는 것을 '죽은 경험(기억)'과 '산 경험(현재, 지각 - 습관)'을 통해 구성한다. '죽은' 경험도 불변이 아닌, 각자의 전망(perspective) 위에서 변화불쌍하다. ❮반일 종족주의❯와 같은 관점의 등장과 재배치 참고. 그리고 '죽은'이란 말은 좀 그렇다.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산 노동과 죽은 노동에서 '죽은'의 의미와 실제적 힘/효과 속에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마르크스에게 '죽은'은 '자본'으로 생산적인 것이지 생물학적 죽음이나 무생물(딱딱한 물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술을 매개한 감각훈련, 이것의 진보적 효과 등에 대한 '낙관'. 이것은  (베르그송적인/들뢰즈적인?) 감각의 지속형태(기억)과 수종적 종합(습관) 등에 대한, 감각의 '반혁명적/수동적?' 측면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대중 개개인이 체험한 다른 세계는 비트겐슈타인의 '마음 속의 딱정벌레'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인터넷을 만나 어느 순간부터 '공적'인 체험과 '사람들간의 연계성'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제 마음 속의 딱정벌레들을 누구나 꺼내놓고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현상학적인 접근법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미/효과는 인간에게, 우리 사회/공동체에 미치는 것이기에. (아래쪽 그림 참고)


관용에 대한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전제

나는 '천 개의 아우라'에 긍정적이다. 문화의 다양성과 세계의 무한성의 표현/발현이란 생각으로. 하지만 관용과 그 기반이 약한 곳에서의 '천 개의 아우라'는 지옥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관용에 대한 인간학적, 문화적 접근/이해가 필요한 이유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자유론 - On Liberty》에서 “만약 의견이란 것이 그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개인적 소유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 의견의 향유를 방해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손해이며, 그 손해가 소수자에 미치는가, 다수자에 미치는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데 대한 폐해는 그것이 인간의 권리를 탈취하며 그 의견의 당사자들보다도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권리마저 박탈한다는 데 있다. 만약 그 의견이 정당한 경우 반대자들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만약 그 의견이 그릇된 경우, 그들은 과오와의 충돌에서 야기된 진리의 보다 명료한 지각과 선명한 인상 - 이것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에 따르는 이익과 거의 동일한 규모의 이익 - 을 잃어버린다.”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권리'는 '다른 의견이 정당한 경우 과오를 버리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기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용은 '세계의 무한성'에 대한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전제가 필요하다. 다양성은 (신학처럼)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의심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안다면 왜 '등에'가 필요하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자유론❯이전에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를 먼저 읽어야한다. 자유주의는 영국 내전과 종교전쟁의 피비린 내 속에서 자라난 것 아닌가! 그 안에서 우리가 찾아낸 것은 (신적) 진리와 그것의 무한성, 인간에 대한 믿음과 그의 유한성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 의미의 '종족우상'과 다른 인간적 기반이 필요하다. 공감이라는. 발생적이고,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스피노자가 정의한 종(種).

테리 이글튼의 ❮이데올로기 개론❯을 읽으며 '현대의 대중 = 프롤레타리아', '조금씩 뜯어내는 것 = 산 경험/체험', '다른 몽타주 = 이데올로기' 등을 연결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고민이었던, 인터넷에서 '일베적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을 어떻게 개념화 할 것이란 고민에도 약간의 답을 얻은 듯하다. 

'일베적 현상', 또는 그 반대에 서있는 '진보적 - 어떤 것의 현상/메갈리안?'을 기술할 수는 있어도 개념화하기 어려웠다. 그 개념화를 '허위의식'만이 아닌 '어떤 사실'을 가진 긍정적 의미를 지닌, '이데올로기'에 대해 개념 위에서 새울 수 있을 것 같다.

 뒤르케임의 '사회적 사실'과 혼합해서.


아우라와 장소성

'아우라의 세계에서 대중은 예술작품 속으로 침잠'에 대해서도 조금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와 사진이 '아우라의 세계' 파열을 직접적으로 알게 만든 계기일 수는 있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아우라의 세계의 구성요소 중 중요한 하나일 뿐이란 생각이다. 아우라의 세계는 장소성과 연결해 사유해야 하고, 예술작품은 그 안에, 특정 장소에 있을 때, 그 의미/효과가 증폭된다. 영화와 사진은 그 장소성에서 예술작품의 이탈을 추동한/현실화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TV에서 벗어난 TV프로그램/VOD 등에 대한 사고를 진척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이때 문제의 지점은 변화된(다르게 체험된, 차이가 발생한) 시간성이 좀 더 우위에 있고, 장소성(매체와 매체가 위치한 장소)의 변화 또한 함께 따라온다.
출처: 새롭게 꽃 핀 천 개의 아우라, 한겨레신문, 2019.7.5

2012년 8월 ❮콘텐츠의 미래, 플랫폼과 스토리텔링❯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나는 공감의 기반이 기본적으로 드라마(drama, 그리스어로 사건이란 의미)에, 비극적인 드라마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뉴스가 전하는 사건도 일차적으로는 '현재의 세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의 '산/전달된 체험'이다. 그 현재의 체험을 과거의 것과 합쳐지고(종합되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향한다. 아래는 2012년 작성한 장표이다.

2015년 스마트TV글로벌 서밋에서 ❮한국에서의 방송 콘텐츠 OTT사업❯이란 발표를 하면서 신문과 비교하면서 TV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관련 장표 중 일부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데이터나 통계, 분석이 아니라, 질적 접근이다. 인간을 삶의 형식에 대한 접근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