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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특이성"과 서로 다른 AI 모듈 간의 이행, 그리고 포스트 휴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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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17년 말 [ 인공지능과 데이터에 대해 - AI 정의(defining)와 존재론적 접근 ]을 포스팅했다. 그때 " artificial intelligence(AI)라고 하는 것보다 지금은 artificial function(s) 정도가 맞는 것 같다. 현재는 기능/서비스 단위로 알고리듬이 만들어지고 이런 것들의 (무한한) 다발이 AI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2019년, 2020년 일부 내용을 추가했다(아래 내용).  ▸ 우리는 철학적 유비( Allegory?)를 해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식을 감각지-오성지-이성지로 나누어 분석한다. 감각은 sence-data이고, 오성은 그 데이터에 대한 분석(인과적 인식)이라면, 이성은 그런 오성의 분석 결과들 간의 연관 관계에 대한 '총체적' 앎이다. 그러면 감각/IoT 등을 이용한 data의 집적, 오성/AI - 위에서 말한 artificial function(s), 마지막 이성/function에서 function으로의 넘어감(이어짐)과 그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총체적 앎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AI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function이 아닌, 이런 총체성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이런 이성지가 가능한가? function들의 집적만으로 '인간적인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등등 (2019.7.17일 추가) 2020.5.20일 update  그래서 AI의 정의는 좀 더 축소되어야 한다. 라이프니츠의 최적화 문제(미분방정식) 아래에는 (존재론적인) 무한소 개념이 들어가 있다. 인지될 수 없는, 하지만 인지의 기반이 되는 무한소-미세지각의 영역이 있다면 그곳까지 도달해야 '인간과 같은 무엇=기계인간"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의 기능(함수=function)에서 다른 기능으로 어떻게 넘기느냐, 그 기능 변환 함수를 만들어야 한다.  '디지털 미학'에서 나온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를...

"개인은 인쇄에 의하여 전통적 집단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라는 구절에 대한 (들뢰즈식)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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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보관 2020.5.29, 오전 10:42 "Print released great psychic and social energies in the Renaissance, as today in Japan or Russia, by breaking the individual out of the traditional group while providing a model of how to add individual to individual in massive agglomeration of power."  "인쇄는 개인을 전통적 집단으로부터 떼어냄과 동시에 개인들의 힘을 모아 대량의 힘을 만들어내는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마치 오늘날의 일본이나 러시아에서처럼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엄청난 정신적-사회적 에너지를 발산시켰다." - 마셜 맥루언, 「인쇄된 말」, 『미디어의 이해』, 247쪽  "인쇄는 르네상스 시대에 커다란 심리적 사회적 에너지를 방출하였다. 이것은 현재 일본, 또는 소련에 있어서도 마찬 가지다. 이들 나라에 있어서 개인은 인쇄에 의하여 전통적인 집단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이 현상은 어떻게 개개인을 모아서 집단의 힘을 만들어내느냐하는 과정모델을 제공한다." - 마샬 맥루한, 「인쇄된 문자」, 『미디어의 이해』, 198쪽 같은 책인데 번역이 너무나 틀려 원문을 찾아보게 만들고 급기야 같으면서 다른 책을 사게 만드네! https://www.facebook.com/jongjinstar/posts/10203429391432103 update 2021.11.23(화) "개인은 인쇄에 의하여 전통적인 집단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언표적 배치에 의해 기계적 배치가 변화됨을, 세계가 기계와 언표의 구성(합성?)물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아래 그림은 들뢰즈 ⟪푸코⟫의 주름과 그것을 해석한 것이다. 상단의 "discursive expression"은 '담론적...

❮Difference and Repetition, 차이와 반복❯ 중역 (영어 to 한글): 한역본 2. 대자적 반복, 4절. 반복과 무의식: "쾌락원칙을 넘어서" 부분

Biopsychical life implies a field of individuation in which differences in intensity are distributed here and there in the form of excitations. The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process of the resolution of such differences is what we call pleasure. A totality of this kind -- a mobile distribution of differences and local resolutions within an intensive field -- corresponds to what Freud called the Id, or at least the primary layer of the Id. The word 'id'[Ça] in this sense is not only a pronoun referring to some formidable unknown, but also an adverb referring to a mobile place, a 'here and there'[Ça et lá] of excitations and resolutions. It is here that Freud's problem begins: it is a question of knowing how pleasure ceases to be a process in order to become a principle, how it ceases to be a local process in order to assume the value of an empirical principle which tends to organise biopsychical life in the Id. Obviously pleasure is pleasing, but this is not a rea...

벤야민과 루카치, 그리고 인터넷과 이데올로기 - 산 경험/체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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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7일 이런 글을 읽으며 기사 주변에 Deleuze와 Benjamin의 연계점을 메모해놨다. 그 내용과 최근 읽고 읽던 책 내용을 함께 생각해봤다. '아우라의 세계에서 대중은 예술작품 속으로 침잠하지만, 아우라가 붕괴한 현대의 대중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대중은 예술작품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뜯어내 각자의 작품으로 몽타주한다. 전통의 아우라가 무너진 자리에 천 개의 새 아우라가 꽃피는 것이다.  (영화와 사진은)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하는 감각을 훈련한다. 그것은 상상과 신체를 바꾸고, 마침내 나와 공동체를 다르게 몽타주한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벤야민에게 현대의 대중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자기 속'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속'으로로 (치환해) 이해한다면 이 말 속에서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를 만날 수 있다. 존재론적 지위에서 나오는 사회/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 존재와 인식(이해), 그리고 실천(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변화/변혁. 역사의 담지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그런데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속'으로의 침잠은 생생한 살아있는 체험 속에서 만들어진, 파편화된 이해에 기반한 다른 세계의 창조까지도 포함한다. 대중 개개인 속에서 창조된, 아니 실제 존재하고 체험된 세계 를 기반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대체하는 것과 같은 다른 장치와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일베의 세계'와 같은 것. 이것이 개인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접속(접근) 가능한 기술적 체계(매체)와 만났을 때, '천 개의 세계'는 벤야민의 바람(기대)처럼 향기나는 꽃이 아니라 지옥도 가 된다. 아니면 아주 '부르조아적인/자본주의적인 이용/사용법을 상상할 수도 있다. 루카치가 전제한 계급적 실체성...

들뢰즈, ❮니체와 철학❯, 1962년 刊,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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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플라톤, 칸트, 헤겔과 대결했다. 칸트의 비판철학을 가치의 문제까지 철저하게 적용하면서, 사람들의 존재방식/삶의 방식에서 어떻게 가치가 생성(창조)되는지 계보학적으로 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뒤엎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뒤엎으면서 생성존재론을 전개한다. 선악과 같은 가치는 어떤 실체(substance)가 아닌, 사람들이 존재의 징후/기호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존재방식 내의 힘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가치가 결정된다. 삶의 방식문제는 이후 벤야민,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반복된다. 일정한 '삶의 방식/생활양식'의 가치들은 모든 사물들 속으로 스며들어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니체의 주장에 그들은 몸을 뒤척댄다. 니체에게 선악에는 아무런 내재적 의미가 없다. 보편적 진리이거나 어떤 대상적 존재가 아닌, '권력/힘에의 의지'가 들어간 인간적 규범/도덕일 뿐이다. 말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징후일 뿐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다 이 의미를 누가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주인의 선악과 노예의 선악은 발음과 기호(문자)만 같을 뿐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의 기능(효과)이다.  이런 가치들을 창조하는 삶의 방식을 규명하는 것이 가치 평가의 시작이 된다. 이 평가는 필연적으로 어떤 해석이 포함된다. 이 말을 구분하는 해석만이 동일해보이는 '선악'이라는 말에 있는 이질적인 의미 를 드러낸다. 하나의 현상은 실존하는 어떤 힘 안에서 그 의미를 찾는 하나의 기호, 징후가 된다. 철학은 일종의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스피노자 서간집, 아카넷, 이근세 옮김, 2018❯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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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린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간다!❯ 에 대한 update.  왜,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가느냐! 배치와 순서를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는 울덴부르크에게 이렇게 쓴다. "청컨대 실체와 우유적 속성에 대해 제가 내린 정의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정의로부터 저의 모든 증명이 도출됩니다. 실제로 저는 실체를 자신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 안에서 생각되는 것으로서, 즉 그것의 개념이 다른 어떤 것의 개념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변용(modificationem) 또는 우유적 속성(accidentia, 偶有的 屬性)은 다른 것 안에 존재하고 그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되는 것으로 이해 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점은 명백합니다. 첫째, 실체는 본성상 자신의 우유적 속성에 앞섭니다. 우유적 속성들은 실체 없이는 현존할 수도 없고 생각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실체 안에, 즉 지성 밖에는 실체들의 우유적 속성들과 우유적 속성들 외에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습니다. 주어진 모든 것은 자신에 의해서 생각되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의 개념은 다른 것의 개념을 포함하거나 아니면 포함하지 않습니다. 셋째, 다른 속성들을 가진 사물들(실체들)은 서로 간에 아무 공통점도 없습니다. 실제로 저는 속성을 그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끝으로 넷째, 서로 간에 아무 공통점도 없는 두 사물 중 하나는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결과는 원인과 공통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무(無)에서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도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친애하는 선생님, 인간들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생된다(generari)는 것, 그리고 그들의 육체는 비록 전에는 다른 형태였을지라도 이미 현존했었다는 점을 부디 고찰하시기 바랍니...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읽기 - 상상력과 스토리, 그리고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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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도 2012~13년 사이에 썼을 것이다. '짐승같다'는 말이 있다. 잔악함이나 못된 정도가 '사람'의 도(선)를 넘어섰을 때 사용한다. 나쁜 쪽으로 '되기(becoming, 들뢰즈)가 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방향이라면 '~되기'가 아니라 '~이기'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가 던졌던 질문.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왜 같은 물건을 보고 서로 다른 정서(정동/감응)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지속될 때, 해부학이나 분류학의 기준으로 같은 종이라 할 수 있을까? 종을 구별하는 다른 차원, 강도적 차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맹자도 했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종교전쟁(네덜란드의 내전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면, 맹자는 전국시대의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 다만 스피노자는 차이에, 역량/능력과 감응의 차이를 말했다면, 맹자는 그 와중에 감응/정서의 동일성(?)을 말했다. 그런데 맹자의 단( 端, 실마리) 을 동일성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사물이나 사람의 규정성인 정체성, 동일성을 의미할 정도로 본질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의 길과 짐승의 길이 나뉠 수 있다. 현대의 진화생물학적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에 새겨진 사회성을 실마리라 할 수 있을까! 6월 19일 올린  ⟪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 에서 <강한 정서적 연대감>부분은 아래 글을 써보려고 하면서 읽은 책/논문들에서 흄과 관련된 부분을 좀 정리한 것이다. 스미스와 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이 기억이 맞을 것이다).  이 글은 <상상력, 우리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 같다. 스토리(이야기, 드라마, 특히 TV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에 빠져 있었고, 그 아래 있는 것으로 상상력을 살펴보았었다. 근대 초기 철학자들, 스피노자 등에게 상상력(imagnation)은 창의성(creation)과 관련성보다는 감각작용(이미지...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빌렘 플루서, 그리고 기술적 복제 시대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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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쓰던 글이다. 2007년 『미디어2.0』 서문에서 벤야민의 아우라의 부활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었다. 벤야민, 맥루한(매클루언), 플루서, 뒤르케임 등에 관련된 책을 읽었나보다. 지금도 벤야민 읽는 것을 계속하고 있고,   '아우라의 부활'에 대해 심혜련교수가 쓴 책 도 나왔다. 좀 되었지만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를 읽고, 벤야민-푸코-들뢰즈를 이어붙여 볼 수 있는, 어딘가 연결되는 것 같은데 하는 지점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아우라를 '장치-배치'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반종교개혁, 또는 카톨릭혁명을 통해 바티칸이 만들어내려고 했던 '성스러운 장소성'-제의적 효과, 정말 그것을 만들어낸 '종교적' 장치의 작동 결과/효과로 아우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조르조 아감벤.양창렬 지음/난장 어떤 하나의 배치가 우리의 몸을 변양(옷 매무새를 바로하게 하는 등의 mode의 변화)시키고, 어떤 감응(성스러운 느낌, 신과 합일된 듯한 느낌 등)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다. 르네상스의 예술과 건축술은 이렇게 종교와 결합된다/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전 글들에서 언표적 배치에 의한 '비물체적 변환 (또는 비물질적 변환)'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우린 당연하게도 기계적 배치에 의한 '비언표적 변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사물(물질, 관계, 구조 등)의 배치/질서(특히 장소적 위치)가 바뀌면서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이론(의미) 없이 먼저 의미가 만들어져버렸다고 해야하나! 비물체적 변환에 대한 유비적인 표현이다. 물질운동의 표면효과/사건으로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면 이론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기에. (하지만 인간 자체가 의식(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론/전략은 여전히 중요하다.) 교회-성화(성서화)-예술 등으로 연결된 카톨릭적 배치가 기술적 복제물인 사진이 나오면서, 그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