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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파토스) - 아리스토텔레스, 들뢰즈 ...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정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영혼의 경험', '영혼의 상태' 이다. 근본적으로 감정은 '영혼의 사건'이다. 감정이 하나의 대상, 예를 들어 분노의 감정을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믿는"데서 시작했다면, '나를 향한 상대방의 업신여김'이라는 대상을 갖는다.  지향성 - 업신여김이란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갖는다. 그리고 '믿음'이란 측면에서 인지적이다. 따라서 감정은 지향적이고(대상이 있고), 인지적이다. 여기기에 신체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분노는 심장을 뛰게하고, 온 몸에 열을 발생시킨다. 신체적인, 질료적인 변화가 없이 분노할 수 없다. 화가 날 때, 내 몸의 변화를 살펴보면된다. 신체적 변화 - 열의 발생 없이 화를 낼 수 있나 생각해보자! 그리고 (화가 나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는 말을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는 감정(파토스)의 특징 은 먼저 ①수동적 이다. 꿀이 단 것은 꿀이 우리 미각을 자극해 우리가 그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②금세 나타났다 사라지는, 휘발성 을 갖는다. 어떤 담지자(형상을 갖춘 질료, 신체)에 지속적으로 달라붙어있는 것이 아닌, 즉 성질이 아니다.  홀연히 나타났다 휙 사라진다.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라지는 것과 같다. ③감정은 영혼의 입장에서 볼때, 우연적 이다. ②휘발성은 신체의 측면에서 볼 때라면, ③우연성은 영혼의 측면에서 볼 때이다(인 것 같다).  ②와 ③의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합성설에 근거해 이해가 가능하다. 영혼이 따로 존재하거나, 신체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존재란 이것들이 함께 하는 것이다. 영혼은 신체에 깃들어 있음으로써 신체를 살아 있게 하는 그 무엇이다. 영혼이 없는 신체는, 생명체가 아닌 따라서 우리의 신체의 조성과 같은 화학물질을 모아놓았다고 해서 생명이 안되는 것처럼, '신체'라고 ...

Geoff Hinton - Will Digital Intelligence Replace Biologic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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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 Hinton의 ⟪Will Digital Intelligence Replace Biological Intelligence?⟫ 강의를 ChatGPT를 이용해 원문을 정리하고, 한글로 번역했다.  강의 내용(자막)을  https://downsub.com/ko/site/youtube/ 를 통해 다운 받은 후, ChatGPT에 업로드한 후 prompt를 했다.   그리고 아래 주요개념 설명 부분에서 힌튼의 입장과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의 인지(지식) 이론을 연결한 질문과 응답을 추가했다. Prompt : 위에 있는 유튜브 영상에 크게, 주로 두 사람이 나온다. 한사람은 사회자로 제프리 헌튼을 소개하고, 그 다음 제프리 헌튼이 강의를 한다. 마지막에 여러 사람의 Q&A가 있다. 위 영상의 speech를 text로 바꿔주고, 가능하면 각 텍스트의 화자를 구별해서 text로 바꿔줬으면 좋겠다. (영상에서 바로 text를 추출하지 못해, 텍스트를 추출하는 방식을 알려줌: 따로 검색해서 텍스트 출력지원 사이트를 찾아 텍스트 출력 업로드 후 아래 질문을 함) Prompt: 위 영상의 txet 파일을 만들어 업데이트 할께. 위에서 요청한 대로 처리하는데, 화자 구분을 하기 어려우면, 전체 파일을 읽고 맥락상 1.소개, 2.강연, 3.질의 응답 순으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래해서 보여줘. 1. 소개발표자: 멜라니 우딘(Melanie Woodin), 토론토 대학교 예술 및 과학 학장. 이벤트 공동 주최자: 슈워츠 리즈먼 연구소(Schwartz Reisman Institute), 컴퓨터 과학과(Department of Computer Science), 벡터 연구소(Vector Institute), 코스믹 퓨처 이니셔티브(Cosmic Future Initiative).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의 "신경망(neural networks)" 및 "딥러닝(deep learning)"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공지능(AI) 분야의...

chatGPT가 우려스러운 점 - 1:1로 진행될 대화의 정황, 그리고 답이 있는 사실이 아닌, 답이 없는 행위의 문제에 (사적형식의) 대화로 개입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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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쿤교수 기사를 읽고, 공식을 찾아보다가 아래 긴 글을 facebook 에 쓰고, 오늘 블로그로 옮겨놓는다. 블로그에서는 관련 글을 찾아 링크를 붙여놓았다. --- Hume의 연합설 기준으로 보면 인과론조차 믿음의 체제에 기반한 ‘환상’일 수 있는데 …. 인간이 AI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최근의 ‘정황’(Deleuze의 흄 해석 참조)이 자못 흥미롭다. 베르그송은 ‘왜 이렇게 연결은 안되고 저렇게 연결은 되는지’를 가지고 흄의 연합이론을 비판했고, 이에대한 들뢰즈의 변론 중에 나온 개념이 ‘정황’이다. 2007년 이후 십여 년 넘게 내 관심사이다. 어떤 정황 속에서 제도화된 믿음의 체계가 세워지고, 또 붕괴 되는가! 벤야민의 ‘기술복제-사진‘에 의해 생성된 변화(아우라의 붕괴, 제의효과에서 전시효과로)와 더불어 … 이와 유사한 인터넷-기술의 인접성과 유사성을 비교해 어떤 인과성, 정황을 설명하는 것 … 내 삶은 이런 '정세' 속에 서 있다. 내게 챗GPT에서 우려스러운 것은 거의(대부분) 1:1로 진행될 대화의 정황 때문이다. 플랫폼/기술의 비공개성보다 그 대화 자체의 비공개성! 앞 맥락을 살려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챗’은 그 정황 속에서 다음 이야기할 말을 찾고, 그게 환상이나 확증적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거짓이 어떤 이, 그 챗팅에 참여한 사람에겐 진실(믿음)이었기에 끌려나온 말일 수도 있다. 기계지만 사람처럼 교양있게 대화를 이어가야 하니 … (이에 대한 논의가 튜링 테스트 - '중국어 방'에 대한 실험모델 이다.) 챗GPT가 튜링 검사를 통과했다고? (2023.4.2, 김재인, facebook) 그 유도된 환상 속에 하나 하나의 개인들이 들어섰을 때, 세상은 천국이거나 지옥일게다.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천국, 그 사람을 품고 있는 사회/공동체는 지옥. 유튜브 추천이 만드는 파편적 세상이 원자차원에서 열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 활용할지 먼저 집단적으로 생각하고 규칙을 만드는게 좋겠다. 왜냐하면...

"지역 특이성"과 서로 다른 AI 모듈 간의 이행, 그리고 포스트 휴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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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17년 말 [ 인공지능과 데이터에 대해 - AI 정의(defining)와 존재론적 접근 ]을 포스팅했다. 그때 " artificial intelligence(AI)라고 하는 것보다 지금은 artificial function(s) 정도가 맞는 것 같다. 현재는 기능/서비스 단위로 알고리듬이 만들어지고 이런 것들의 (무한한) 다발이 AI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2019년, 2020년 일부 내용을 추가했다(아래 내용).  ▸ 우리는 철학적 유비( Allegory?)를 해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식을 감각지-오성지-이성지로 나누어 분석한다. 감각은 sence-data이고, 오성은 그 데이터에 대한 분석(인과적 인식)이라면, 이성은 그런 오성의 분석 결과들 간의 연관 관계에 대한 '총체적' 앎이다. 그러면 감각/IoT 등을 이용한 data의 집적, 오성/AI - 위에서 말한 artificial function(s), 마지막 이성/function에서 function으로의 넘어감(이어짐)과 그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총체적 앎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AI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function이 아닌, 이런 총체성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이런 이성지가 가능한가? function들의 집적만으로 '인간적인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등등 (2019.7.17일 추가) 2020.5.20일 update  그래서 AI의 정의는 좀 더 축소되어야 한다. 라이프니츠의 최적화 문제(미분방정식) 아래에는 (존재론적인) 무한소 개념이 들어가 있다. 인지될 수 없는, 하지만 인지의 기반이 되는 무한소-미세지각의 영역이 있다면 그곳까지 도달해야 '인간과 같은 무엇=기계인간"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의 기능(함수=function)에서 다른 기능으로 어떻게 넘기느냐, 그 기능 변환 함수를 만들어야 한다.  '디지털 미학'에서 나온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를...

"개인은 인쇄에 의하여 전통적 집단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라는 구절에 대한 (들뢰즈식)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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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보관 2020.5.29, 오전 10:42 "Print released great psychic and social energies in the Renaissance, as today in Japan or Russia, by breaking the individual out of the traditional group while providing a model of how to add individual to individual in massive agglomeration of power."  "인쇄는 개인을 전통적 집단으로부터 떼어냄과 동시에 개인들의 힘을 모아 대량의 힘을 만들어내는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마치 오늘날의 일본이나 러시아에서처럼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엄청난 정신적-사회적 에너지를 발산시켰다." - 마셜 맥루언, 「인쇄된 말」, 『미디어의 이해』, 247쪽  "인쇄는 르네상스 시대에 커다란 심리적 사회적 에너지를 방출하였다. 이것은 현재 일본, 또는 소련에 있어서도 마찬 가지다. 이들 나라에 있어서 개인은 인쇄에 의하여 전통적인 집단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이 현상은 어떻게 개개인을 모아서 집단의 힘을 만들어내느냐하는 과정모델을 제공한다." - 마샬 맥루한, 「인쇄된 문자」, 『미디어의 이해』, 198쪽 같은 책인데 번역이 너무나 틀려 원문을 찾아보게 만들고 급기야 같으면서 다른 책을 사게 만드네! https://www.facebook.com/jongjinstar/posts/10203429391432103 update 2021.11.23(화) "개인은 인쇄에 의하여 전통적인 집단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언표적 배치에 의해 기계적 배치가 변화됨을, 세계가 기계와 언표의 구성(합성?)물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아래 그림은 들뢰즈 ⟪푸코⟫의 주름과 그것을 해석한 것이다. 상단의 "discursive expression"은 '담론적...

방송사 TV포털 모델 - n스크린 서비스의 시작과 실패, 그리고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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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선(lines of articulation)과 탈주선(lines of flight) 는 쌍으로 드러난다. 통신사의 입장에서 플랫폼 인 플랫폼 형태는 '이물질'이다. 누군가는 내게 '알박기'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방송사의 TV포털 모델"은 통신사가 만든 플랫폼에 빠져나가는 선을 만들고, 콘텐츠의 공급선/파이프라인을 위태롭게 만든다. 방송사에 CMS에서 서비스 중지를 체크하면 더 이상 콘텐츠가 제공되지않는다. 따라서 TV포털 모델은 통신사(또는 포털 등)에서 달아나는, 달아날 수 있는, 탈주선이 될 수 있다. 반면 그 탈주선은 방송사의 플랫폼을 만드는, 자신의 뉴미디어 영역을 안정화시키는 분할선이다. 디지털로 인해 탈주 가능한 콘텐츠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재영토화 작업이다.  두 개의 전략, 방송사와 통신사의 관계는 '알고리즘 덩어리로 변화한, 수학적 함수가 된 콘텐츠'를 전제로 한다. 디지털 콘텐츠는 더 이상 어디에 속할 (존재론적인, 또는 기술적인) 이유가 없다. 이유가 있다면 단지 제도적인(법적인) 제약 때문이다. 그 법적, 제도적인 형태를 변화시키기 위한 싸움이 '디지털 전략' 또는 '서비스', '트렌드', '이용자 편의성' 등으로 구체화되는 담론적 쟁투이다. 그런데 인프라(인터넷 망과 단말기 등)와 담론은 이질적이다.  (어떤 회사의) 전략적 담론은 인프라(기계적 배치)로부터 자율성을 갖는다. 기술, 인프라에 대한 그 시대의 지배적 담론이 있다해도 그 우위는 '진리'이기 때문에 따라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위'는 사회적인 장 내에서의 힘의 관계를 표현할 뿐이고, 그 표현은 어떤 '사회적 사실'을 드러내줄 뿐이다. 뜨는 통신/포털과 지는 방송과 같은 식상한 표현들 ...  하지만 힘의 우위는 그것을 모두에게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행동하도록 한다. 반대자들 마져도 말...

❮Difference and Repetition, 차이와 반복❯ 중역 (영어 to 한글): 한역본 2. 대자적 반복, 4절. 반복과 무의식: "쾌락원칙을 넘어서" 부분

Biopsychical life implies a field of individuation in which differences in intensity are distributed here and there in the form of excitations. The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process of the resolution of such differences is what we call pleasure. A totality of this kind -- a mobile distribution of differences and local resolutions within an intensive field -- corresponds to what Freud called the Id, or at least the primary layer of the Id. The word 'id'[Ça] in this sense is not only a pronoun referring to some formidable unknown, but also an adverb referring to a mobile place, a 'here and there'[Ça et lá] of excitations and resolutions. It is here that Freud's problem begins: it is a question of knowing how pleasure ceases to be a process in order to become a principle, how it ceases to be a local process in order to assume the value of an empirical principle which tends to organise biopsychical life in the Id. Obviously pleasure is pleasing, but this is not a rea...

벤야민과 루카치, 그리고 인터넷과 이데올로기 - 산 경험/체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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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7일 이런 글을 읽으며 기사 주변에 Deleuze와 Benjamin의 연계점을 메모해놨다. 그 내용과 최근 읽고 읽던 책 내용을 함께 생각해봤다. '아우라의 세계에서 대중은 예술작품 속으로 침잠하지만, 아우라가 붕괴한 현대의 대중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대중은 예술작품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뜯어내 각자의 작품으로 몽타주한다. 전통의 아우라가 무너진 자리에 천 개의 새 아우라가 꽃피는 것이다.  (영화와 사진은)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하는 감각을 훈련한다. 그것은 상상과 신체를 바꾸고, 마침내 나와 공동체를 다르게 몽타주한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벤야민에게 현대의 대중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은 예술작품을 '자기 속으로' 침잠시킨다. '자기 속'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속'으로로 (치환해) 이해한다면 이 말 속에서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를 만날 수 있다. 존재론적 지위에서 나오는 사회/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 존재와 인식(이해), 그리고 실천(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변화/변혁. 역사의 담지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그런데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속'으로의 침잠은 생생한 살아있는 체험 속에서 만들어진, 파편화된 이해에 기반한 다른 세계의 창조까지도 포함한다. 대중 개개인 속에서 창조된, 아니 실제 존재하고 체험된 세계 를 기반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대체하는 것과 같은 다른 장치와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일베의 세계'와 같은 것. 이것이 개인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접속(접근) 가능한 기술적 체계(매체)와 만났을 때, '천 개의 세계'는 벤야민의 바람(기대)처럼 향기나는 꽃이 아니라 지옥도 가 된다. 아니면 아주 '부르조아적인/자본주의적인 이용/사용법을 상상할 수도 있다. 루카치가 전제한 계급적 실체성...

① Reed Hastings, Netflix CEO가 안하겠다는 3가지 - 첫 번째, All Rights 없인 투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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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 여년 간 넷플릭스 관련해 썼던 글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 중 Reed Hastings, Netflix CEO가 '안하겠다'고 한 것 세가지를 정리해 올린다.  넷플릭스의 많은 정책들이 시장과 넷플릭스간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결정화(crystallization)된 것 같다. 상호과정에서 넷플릭스는 '쓴 맛'을 보고(experience), 자기역량을 체크했을 것이다. 그 안에서 강점을 찾아 활동(activity)을 조율하고, 자원/힘들을 재배치했을 것이다. 우린 어떤 주어진 것, substance(實體) 또는 개체(個體)가 되기 전의, 과정 상에 있는 넷플릭스를 봐야한다. 이런 과정을 ❮천 개의 고원❯ 의 세 번째 고원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을 읽으며,  individuation(개체화), crystallization(결정화), transduction(변환), modulation(변조), information(정보화) 등 들뢰즈-가타리적 개념들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다. 시몽동의 말 처럼 '개체(≒넷플릭스) 밖에서 형상들((≒streaming service, OTT)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또는 준안정적(metastable) 물질이 개체를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운동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역동적인 운동 속으로 육박(肉薄)해야 − 말 그대로 '몸으로 돌진해' 겪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린 넷플릭스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그 장 안에 있는 힘들의 관계를 피부로 느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인 미디어, 또는 작게 OTT 서비스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것, 개체들(streaming service)이 모두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들뢰즈적 분자들, 실체들, 형식들 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훨씬 더 미세한 분자적 재료들, 실질적 요소들, 형식적 관계들 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