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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 사월에서 오월로

<나무에 핀 연꽃>을 쓰면서 이전에 목련에 대하여 썼던 글들을 모았다. 봄이 되고 하얀 꽃이 피면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update. 2020.5.6일
엘리엇은 4월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4월하면 '잔인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4월의 대기와 산과 들이 얼마나 좋은지, 그 사이 사이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다시 삶을 시작하고 꽃을 피워내는지, 이런 것과 상관없이 먼저 '잔인함'을 떠올리게 한다. 


더딘 봄 1

- 장탄리에서
겨울은 벌써 가고 
성큼 성큼 오는 봄,
남녘 땅엔 푸른 잎새 사이로
동백꽃 붉게 피었다 지고
바람 속 살랑이던 유채꽃 따라
지리산 산자락엔 진달래 붉고
미아리 고갯길 벽돌담 너머엔
밤새 향이 짙은 백목련이 피어도 
마음만은 뒤쳐져 아직 긴 겨울 밤
세월이 흘러도 흘러서 가도 
가슴 속엔 휭하니 찬바람 가득
더딘 봄 더듬 더듬 오는 봄
1995. 4. 13 


백목련

- 원철, 형주에게
보고 싶다
백목련
눈부시게 숨막히는 향기
보고 싶다
검게 주름진 꽃잎
바람에 떠도는 익숙한 목소리
향기 섞인 얼굴들
보고 싶다
여기,
예전 그 자리에서
1996. 4. 11


산목련


고향집 앞뜰 
꽃보다 더 꽃다운
푸른 잎이 꽃보다 더 아름답던 산목련,
푸르게 빛나던 잎들의 찰랑거림도
유월의 햇살에 넘쳐 흐르던 광기(光氣;狂氣)도
모두 지고 가시처럼 앙상한 가지만 남아
바람이 스쳐지날 때마다 옷자락 찢기는 소리가난다
겨울 바람에 그 거칠기만 했던 헐벗은 나목의 휘어짐
꽃보다 향기가 더 좋던,
은밀한 내면의 속삭임으로
지나는 바람이란 바람은 모두 꼬드겨 
푸른 치마자락 같던 잎 아래로 불러들여
깊은 입맞춤에 출렁거리며 푸르르 떨며
비 온 뒤 상큼한 육향으로 다가서던, 하지만
쉽게도 상처를 입던 하얀 꽃잎의 산목련
깊숙히 잎들 사이 숨어 지내던 나날의 세월이 그립다고
산처럼 목을 빼고 둘러보면
휘 지나는 바람에 옷자락 날리는 소리만 들려
그 거친 한숨 섞인 그리움, 박힌 숨소리
고향 떠나던 여름날 밑둥지까지 자르지 못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자르지 못해, 죽이질 못해
그리움에 내내 떨리는 가슴은 안타깝기만 하고
다시 보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기약한 것은 산목련,
유월의 뜨거운 햇살이 반사되며 만들던
푸르게 빛나던 잎들의 광기(光氣;狂氣), 사이로 흐르던 육향
살 비벼대며 살던
고향집 빈터를 지키며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을 산목련
헐벗은 가지에도 달빛이 걸렸을까?
출렁거리는 달빛에 말은 못해도 
느끼는 깊은 것은 그리움
1996. 11. 29 ~ 1997. 7. 26


우울한 하루

텅빈 검은 하늘을
새는 난다.
여기- 저기-
기웃대보기도 하지만
내려앉을 곳은 하나도 없다.
아는 것은
갑작스레 바람에 밀려
빛 한 점 없는 세상을
날고 있다는 것.
어둠은
여기에 몸을 던져라!
안락과 나태
하품과 낮잠이 즐비하게 널려있는 곳.
유혹한다.
진달래는
잎도 없이 앙상한 가지 위에
붉은 꽃만 피우고
바람 속에 흔들린다.
그 바로 앞
하얀 목련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다.
오늘은 4월 3일!
나보다도 더 오래된
먼 과거 어느날 일들은
머리 위를, 귓가를 맴돌며
나를 괴롭힌다.
"흔들리지말고 나가라!
여기는 여전히 그들의 소굴(巢窟)
붉게 물 든 옷자락을 깃대에 꽂고."
1993.4.3

 


봄이 왔다는 거다. 
남녘 바닷가엔 어느 새 
나와는 상관없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를 한다는 거다. 
또 다시 4월의 바람이 불어 먼지가 날리고 
노란 개나리가 피고 
추운 겨울을 보낸 진달래들이 
산허리를 잡고 피를 토할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또 검붉은 땅 위에 
시들어가는 처녀 같은 몸을 던질 것이다. 
다시 꽃잎들은 짓이겨 질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꽃들이 몇 년째 
지루하게 피었다 진 것처럼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고 
꽃 같던 가슴엔 콘크리트가 깔리고 
철판이 깔려 이젠 새 한 마리 날아와 
놀 수 없는 거다. 
또 골목길 담장 안엔 백목련 봉오리가 맺히고. 
가슴엔 회한이 맺히는 봄이 왔다는 거다. 
1998. 3. 2 

백목련 

- 출근길 
나무에서 
하얀 새들이 
돋아난다. 
나뭇가지 끝에서 
하얀 날개들이 
피어난다. 
겨우내 앙상했던 
검은 가지 끝에 
물이 돌고 
생명들이 저절로 
살아난다 
난다. 
난다. 
새들이 
아침 햇살 속으로 
바람을 타고 
푸릇한 향기로 
날아간다. 
1998. 3. 26 


 

아내는 봄과 함께 임신을 하고 
이젠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보낸 서른 한해 
이제야 한 우주를 끌어안고 뒹굴어본다. 
초음파검사를 하며 기차소리보다 
더 큰 아이의 심장 고동소리에 
아내와 나는 놀라고 신기해하고 
생명을 품에 안은 아내가 갑자기 빛나 보인다. 
내 평생이 가도 그만큼 빛나보질 못할 것 같아 
우울한 서른 한해 째 
아무런 꽃도 피우지 못할 봄 
나도 아내의 입덧을 따라 해본다. 
창가 앞뜰에 또 백목련 꽃망울이 맺혀 
뽀얀 솜털가지 끝이 불러오고 
아내는 봄과 함께 긴 낮잠을 즐기고 있다. 
1999. 3. 14. 


백목련 

- 퇴근하는 아내를 마중하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골목길을 지나 
큰 찻길을 건너 
열시가 넘어 
퇴근하는 
아내의 지친 몸을 
마중 나가는 길 
담장 넘어 
앙상한 가지에 
하얀 새들이 
모여 앉아 
비에 젖은 몸을 떨며 
고개를 빼고 내려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아침 출근길 
나무에 돋아난 
하얀 새 아니냐! 
눈짓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 사이 
멀리 아내의 지친 모습이 보이고 
이슬비에 젖은 그녀도 
어느새 담장 넘어 
검은 가지 위에 올라앉아 
하얀 새가 되어 
봄비 같은 눈빛으로 
안부를 묻고 
향기가 가신 젖은 깃으로 
힘겨운 날갯짓을 하며 
날아온다. 
여린 생명들에겐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힘든 것이다. 
1998. 3. 26 

나의 사월 2 


하얀 목련 
골목 빼곡히 들어찬 사월 
유산한 임부의 공허한 눈빛은 
어딜 바라보고 있을까? 
비 그친 대기엔 
숨 막히는 송장 썩은 내 
훌쩍대다 구역질을 한다 
1999. 4. 11. 


오월의 노래 

계절이 바뀐 줄을 기차가 서울을 떠나 
한참 내려온 뒤에 물댄 논을 보며 알았다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지고 
벚꽃에 철쭉이 피고 지고 
회사 앞 정원 구석에서 보라색 제비꽃도 보았지만 
또 집 앞 라일락이 피고 졌지만 

오늘 


오늘, 식민지 모국으로 
유학간 선배를 잠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길 하고 
나의 길들여진 영혼 
또 다시 요동을 친다 
그날은 구십삼년 사월 삼일 
하얀 목련꽃이 피어 
눈부시던 봄날이었다 
졸업 하고 군입대를 두어달 앞두고 
그와 만났던 그날을 기억한다 
입대전 몇달 동안 
대전 서울을 오가며 영어학원엘 다니고 
종로에선 시위가 있었고 
나는 탑골공원 앞 
쇼윈도우 안에서 햄버걸 먹고 있었다 
오늘이 그날 같다 
왠지 벌써 몇 년이 지난 
오늘이 그날 같다 
또 요동치는 가슴 
선택을 강요하는 날 
용기 없는 날 비웃는 소리 
울려오고 
인생의 십자로에 서서 
그때처럼 시를 쓰고 
오늘 
과거를 마주하고 
미래를 생각할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 영혼의 울음소리 
1999. 6. 27 

백목련이 피다 


그대 담벼락을 넘어 
새처럼 하얗게 봉오리 진 
목련을 보셨나요 
남들 모두 파랗게 몸단장할 때 
하얀 소복 옷 입고 떼로 모여 앉아 
소리 없이 흐느끼는 정적의 봄날 
가슴 속 솜털 같던 희망은 퍼득대고 
뼈만 앙상한 가지에 하얗게 피어나는 
꽃송이들을 그대는 보셨나요 
바람에 깃털 날리는 학처럼 가볍게 걸터앉은 
오후의 눈부신 하얀 햇살을 보셨나요 
그대 담벼락을 넘어 오는 
벼락같은 향기를 맡아나 보셨나요 
가는 겨울의 영전 앞에 피어진 
숨통이 막히는 그 향기를 맡아나 보셨나요 
2000. 4. 19 ~ 2000. 5. 11 


백목련이 날다 

봄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하얀 날개 활짝 펴고 
너울대는 꽃잎 사이로 
두근대는 내 심장소리 
하얀 꽃잎 하나 둘 
누런 하늘로 날아오르다 
빙글 빙글 돌며 
땅바닥에 떨어져버리고 
하루도 안돼 검게 
시든 꽃잎을 보며 
이젠 바람이 분다고 
날개 퍼덕이며 
쉽게 날아오르지 않으리 
시들어 가는 내 삼류 좌파 희망이여 
하지만 백목련 
꽃만 매달려 앙상했던 가지엔 
파릇한 잎이 순식간에 돋고 
함성도 없는 정적의 봄날에 
꾸역꾸역 생겨나는 삶의 욕망 
2000. 4. 19 ~ 2000. 5. 11 

사월이 가고 


사월이 가고 
또 오월이 가고 
올해도 담벼락에 
하얀 목련꽃들이 피었다가
말도 없이 뚝 뚝 떨어져버리고 
새파란 잎들을 힘겹게 밀어내어 
아기 손바닥만하게 피면서 
사오월이 가고 
난 글을 쓰고 싶어 
입술이 부르텄다 
2001. 6. 20 


내 마음의 풍경 

비가 오는데 길을 걷다 
봄비가 오는데 길을 걷다 
검은 공장들 사이를 지나 
담벼락 넘어 목련은 검게 지고 
떨어지고 
바닥에 꽃잎들이 하얗게 달라붙어 
바닥에 벚꽃 잎들이 하얗게 달라붙어 
바람이 불고 옷자락이 날리다 
지난 겨울 아무도 찾지 않은 
공장 담벼락 넘어 사과나무엔 
철 지난 메마른 열매와 함께 
다시 꽃이 피고 잎이 돋고 
분홍색 꽃이 피고 파란 잎이 돋고 
검은 열매가 아직도 매달려 
꽃보다 많은 열매가 아직도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200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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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들의 잔치 - 5월 1일 홍대 앞에서 

나무에 핀 연꽃



원문: http://dckorea.co.kr/tc/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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