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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위에 과학의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 바슐라르, 알뛰세르




요즘 ❮프랑스 비평사 - 현대편 (1983)❯을 읽고 있다. 대학을 다닐 때 '오해도 하나의 이해'라는 말을 듣고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며 지금도 가끔씩 이 말을 되뇌이곤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시작을 이 책에서 찾은 듯하다.


프랑스 비평사 (근대/현대편)
김현 지음/문학과지성사

이 책의 서문에서 김현은 이렇게 말한다. "바슐라르의 스승이었던 아벨 레이는 사람은 오류를 통해 성장한다고 말했다. 그 오류를 완전히 고칠 수는 없겠지만, 그 오류를 객관적으로 정신분석해 나가면, 그 오류를 가능케 한 내 욕망의 뿌리를 얼핏 엿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욕망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내가 성숙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않는다. 관심 갖는 부분만을 읽고, 또 다른 책에서 관련된 부분을 책아 읽고 그러다보면 네다섯권의 책이 며칠간 옆에서 뒹군다. 이런 버릇대로 제3장 <바슐라르의 문학비평>만 읽었다.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자로 시작해서 문학이론가로 사고를 전개해 나갔다. 과학철학자로서의 바슐라르의 이야기는 알뛰세르로 이어진다. 막연하게 그렇겠지 생각하긴 했다. 오래된 책을 꺼내들고 그때 몰랐던 사실을 확인한다. 예전 이 책을 읽을 땐 알뛰세르도 푸코도 보기 전일게다. 아마 그 땐 책의 내용도 이해를 못하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오해'라는 방식으로 이해했을 게다. 

그렇다고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바슐라르를 바슐라르 그 자체로 다시 읽으며 이해했을까? 이번엔 알뛰세르식으로 아니면 푸코식으로. 아니다. 실제는 현재의 내 수준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해의 강도를 말 그대로 '털 끝만큼도 틀리지않고 똑같이'라는 기준, 즉 '사고의 동일성'이라는 기준으로 적용한다면 아마도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완벽한 이해란 스스로가 이해할 대상 자체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면 자각만이 이해했다고 말할 권리를 갖게된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인식의 근거를 찾았다. 또 칸트는 이런 맥락에서 선험적 인식주체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따분한 이야기 전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부딪히는 것이 '왜 저 사람은 저래!', '이해를 못하겠네!' 등의 생각과 함께 의사가 통하지않는 사실에 좌절하곤 한다. 대화의 어려움이 여기서 생긴다.

초기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으로서의 과학적 인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과학적 인식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여 갖게 되는 감각적 인식 혹은 공통적 인식 사이에는 커다란 단절,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한다. 알뛰세르에게서도 중요한 개념인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은 가능한가, 만일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객관적 인식이라고 알려져 온 수많은 잘못된 인식들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라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답하려 한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의 책과 생각에 나온 ❮시선은 권력이다❯에 대한 소개 기사를 읽었다. "나와 타자 사이의 동시적 상호인정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사르트르의 생각이 더 옳아 보인다. 남이 자기를 보듯이 나를 보고, 또 나도 나를 보듯이 남을 본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게 그 이유다." 박정자 교수의 말이다. 어제 밤에 썼던 완벽한 이해란 불가능하다는 대목과 이어졌다. 이렇듯 생각은 사나운 가시덩쿨처럼 여기 저기로 가서 붙어 얽혀버린다.

그런데 이런 상호 이해 불가능성, 오해로 점철된 인간 인식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그 기반을 세우려는 노력이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이다. 바슐라르의 몇개의 명제를 살펴보자.
  1.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즉 사실에 있어서는 과학적 지식이 객관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객관성은 그때 하나의 한계로 제시된다. 객관적인 것은 경험의 합리적 한계이다.(p.88)
     
  2. 사실-하나의 대상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은 과학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실/경험은 계속적인 합리화에 의해서 객관적인 것을 가능케 한다. 즉, 끊임없는 합리화에 의해 원초적인 경험은 과학적인 경험이 되어 간다.
     
  3. 따라서 과학적 인식은 끊임없는 합리화 움직임 속에 있는 인식이며, 계속 검증되는 인식이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합리화/객관화 방법은 대상을 관계 밑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대상이란, 지각할 수 있는 사실의 그룹이다. 그것은 정돈할 수 있는 일련의 지각이며, 더 나아가서는 정돈 그 자체이다.> 정돈은 하나의 관계 개념이다. 왜냐하면 관계를 짓지 않는 것은 정돈될 수 없기 때문이다.
      
  4. 그런데 현대과학을 돌아볼 때 객관화의 방법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여러개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방법이 대상보다 선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법이 대상 기술/과학적 인식을 결정한다. 방법 자체가 대상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앞의 명제들에 따라 이런 추론을 끌어낼 수 있다.

  1.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보편성/일반성이 반드시 객관성은 아니다. 보편적/일반적인 것은 경험의 동질성(同質性)을 전제로 하고 있지, 어떤 경험의 검증과정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객관화의 방법이 없는 한 객관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관계에 의거한 객관성은 그것에 따라 관계를 결정하는 유동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상 대상이 관계의 복합체로 제시될 때부터, 그것을 여러 방법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객관성은 입증의 사회적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객관성에는 변증론적이며 자세한 방법으로 객관화의 방법을 제시하여야만 다다를 수 있다. 명증의 표적은 대상이 아니라 방법이다.
      
  3. 하나의 사고의 객관성은 그것이 오류의 교정과 관련을 맺고 있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어떤 생각의 객관성은 그것이 오류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그만큼 더 명백하고 분명하게 될 것이다. 도달하려면 방황해야 한다.'

상호 이해 불가능성, 오해/오류의 기반을 이런 테제를 받아들인다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객관적이지 않은 보편성/일반성이 실재한다는 것, 보는 각도/방법에 따라 대상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경험/사실 자체가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클라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의 천동설, 자본주의에 대한 애덤 스미스 이후의 주류경제학자과 마르크스의 대립, 경험주의에서 나타나는 귀납적 비약 따위가 이런 예들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방법에 따라 대상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자연과학의 영역이 아닌 사회과학에 대입한다고 할 때 문제는 더욱 커진다. 사회는 보는 사람들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즉 당파성에 따라 보는 방법/각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고 그것의 진위를 가릴 기준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바슐라르의 논의와 실재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또는 오류로 점철된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 여기에서 알뛰세르가 나온다. 객관적이지 않은 보편성/일반성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가 알뛰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한축을 이끌고, 마르크스주의가 왜 과학인가/맞는가가 다른 한축을 이룬다. 전자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이론 등이 전개된다면 후자에서 사회운동/검증 속에서 오류의 정정을 통한 '전화' 등의 이론을 전개한다. '위기를 산출케한 모체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 생겨난 위기를 극복'/돌파할려고 한다.

김현이 말하듯이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오류 위에 과학의 도시를 건설하려 한 것에 있다. 그가 오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금세기초의 과학적 위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p.91) 바슐라르가 처했던 상황과 동일한 상황에 알뛰세르가 있었다. 

철학,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상, 역사적 사실의 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위치를 확인하고 이것(시대의 위기)을 돌파하기 위해서이다.

오류 위에 과학의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방법을 바꾸면서이다. 그런데 방법을 바꾼다는 것은 과거의 방법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학은 과거의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감싸면서 더욱 방법적으로 되어간다. 과거의 방법을 버리지 않고 감싼다는 것은 낡고 쓸모 없게 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밝힌 과학적 지식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오류가 밝혀지고, 오류는 부정적인 성격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가능케 한 긍정적인 성격으로 '전화'한다.

하지만 전화된 방법은 과거의 방법이 아닌, 과거의 것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인식론적 국경이 있다. 알뛰세르가 말하는 '인식론적 단절'과 같은!

캉기옘은 바슐라르가 죽은 후 파리대학 추도 논문집에서 그의 인식론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첫번째 공리는 오류의 이론적 우위에 관련되어 있다. '진실은 논쟁의 끝에서만 그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최초의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최초의 오류들만이 있다.' ... 최초의 진리는 단수이며, 최초의 오류는 복수이다. 보다 간결하게 같은 공식은 다음처럼 진술된다. 오류에 기초한 진실이야 말로 과학적 사고의 형태이다.

대학에 다닐 때 함께 공부하던 선배가 진리를 알려주겠다며 귀에 속닥였던 말이 생각난다. "맑스주의는 위대하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 땐 몰랐지만 이 말은 아마도 레닌의 말일 것다. 지금 생각하면 진리성은 이런 경구/신조로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으로부터 시작한 이런 경구들,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전위조직, 이 조직의 일괴암(一塊巖 monolith)성 등이 이데올로기(검증되지 않은 보편적 진리)로 굳어질 때 '마침내 위기'가 온다.

이런 정치조직뿐만 아니라 기업도, 개인도 살아가며 어디서도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며 오류 위에 진실의 돌을 쌓을 때 전진이 가능하다. 요즘 자기 전에 몇 페이지씩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 위대한 기업으로, GOOD TO GREAT❯를 읽는다. 여기에서도 위대해지려면 바슐라르가 과학의 위기에 대응하던 것과 비슷한 태도를 갖을 것을 권유한다.

좋은 회사를 위대한 회사로 이끄는 핵심 심리는 스톡데일 패러독스이다. 결국에는 성공할 수 있고 성공할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p.140) - 짐 콜린스

과학자로서 여러분들은 과학은 파괴되지 않으며, 어떤 내적 위기도 그것의 비약을 멈추게 할 수 없으며, 그 통합력이 거기에 반대하는 것까지를 이용하는 걸 그것이 허용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과학의 기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정상으로의 성장을 이끌어냅니다. 과학을 파들어 가면 갈수록 과학은 솟아오릅니다. - 바슐라르, <과학적 방법의 철학적 문제>

바슐라르가 말하는 '과학의 기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20세기초의 과학적 위기를 말한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에서 포로가 미군 장군의 이야기다. 알뛰세르에 의하면 위기의 시대에는 그 위기를 산출케한 모체 자체를 부인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위기 자체에서도 벗어나려 한다. 기업들도 그렇고 그런 기업들은 '위대해'질 수 없다.

하지만 왕왕 위기를 인식하지만 모체 자체를 부인하면서 성공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지난번 살펴본 박형준씨의 경우가 그렇다. 이때 그것을 성공이라할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인 문제, 가치의 문제가 제기된다. 위기의 장에 있는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아니면 그는 모체를 벗어났기 때문에 동일한 장, 또는 회사에 있지 않으므로 위기를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에서 위기는 청산/해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위기를 바라보는 데도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세계적, 사회적, 역사적, 국가적, 조직적, 개인적 등의 수식이 붙게 된다. 박형준씨의 경우 당시 제기되었던 문제를 청산하고 다른 '세속적인' 차원에서 성공한 것이다.

왜 오류에 빠질까? 바슐라르는 주체의 정신적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틀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틀림은 그의 경험을 보다 더 풍부하게 해 준다. 자기는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틀린다.

바슐라르의 주체의 정신적 활동의 가장 기본인 오류라는 개념은 인식론적 방해물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 인식론적 방해물은 과학적 인식의 방해물, 교정되어야할 오류와 동일어이다.

인식론적 방해물이 생기는 것은 과학적 인식에서는 자명한 것,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자명한 것, 주어진 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과학에 있어서 객관적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에서 주어진 것은 위에서 말했던 사실, 원초적인 경험들이다.

그런데 '그 주어진 것이 결국 사고에 방해물이 될 때, 다시 말해 사고가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거나 오히려 경험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그것을 만나는 곳에 그것을 위치시켜야 한다.'

객관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방해물의 제거라는 뜻에서 정신 분석이라는 용어를 들여온다. 본능의 개입을 과학적 지식에서 제거하는 것이 객관적 인식의 정신 분석의 목적이다. 그리고 바슐라르의 정신 분석이라는 용어는 교정되어야 할 일반적 인식의 '세척', 토론과 규제를 벗어나려는 심리상태의 교정, '모든 무의식적 가치 부여-문화'로부터 과학적을로 객관화된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이 글의 첫부분에서 이야기했던 오해도 하나의 이해라고 이야기했던, 그 뒤 "창조적 오해"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던 부분은 정신분석에 대한 바슐라르의 이해 대한 평가이다. 바슐라르는 정신 분석에서 하나의 방법론을 찾았지, 위에서 본 그 자신의 사고의 방향을 그것 때문에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다. 또 바슐라르는 정신 분석에서도 인간은 치유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런 바슐라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그(바슐라르)는 정신 분석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 오해 자체가 그에게 그의 멋진 책, 내가 찬탄한 책을 만들게 한 것이다. - 마리즈 쉬와지 (프지케, 1963년 2)
사람들 간의 오해는 불화를 만들지만 이론/사상에 대한 오해는 새로운 방법/접근법을 만들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도 한다. 그때는 더 이상 이것을 누구의 이론을 오해했다라고 부르지 못하게 된다. 오해를 통해서 그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바슐라르의 문학이론으로 알려진 4원소론에 의한 상상력 연구이다. 상상력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한다. 이 상상력이 앞에서 본 장애물이면서 문학적 세계, 미적 세계의 기반이다.

지난 목요일 회사의 전직원 모임에서 이런 '덕담'을 들었다. 5-3=2인 이유는 오해를 3번만 더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2+2=4인 이유는 이해하고 이해하면 사랑이 되니.. 노스님이이 동자승에게 문제를 내고 해석을 해준 거란다. 우리의 오해도 세번 더 생각하여 창조적 오해가 되거나, 아니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해 위에 위대한 기업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불화만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오류를 자각하고, 그것을 가능케 한 내 욕망의 뿌리를 얼핏 엿볼 수 있다면. 언제 내 욕망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내가 성숙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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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문학비평❯과 이 책, 저 책, 또 이 페이지, 저페이지 왔다 갔다 하면서 중구난방으로 함께 읽고 있는 책들이다. ❮좋은 기업을 넘어 ... 위대한 기업으로❯가 제일 편하고 재미도 있고, 그 다음이 김현의 책이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쓴 책을 많이 읽은 편이지만 여전히 문체가 마음에 들지않는다. ❮미디어2.0❯을 쓰면서 어려워진 문체도 다분히 그들 덕이다.



맑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백의

부정의 철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김용선 옮김/인간사랑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짐 콜린스 지음, 이무열 옮김/김영사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바슐라르 상상력의 위치
어제에 이어 바슐라르에 관련된 다른 책들을 집어들어 읽다가 상상력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살펴 볼 필요성이 있구나 생각되었다. 단순 문학비평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슐라르 다음 세대의 철학자들에 문학비평이 아닌, 다른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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