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게시물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


1.
우리가 단순화시켜 생각한다면 “8•15로부터 한국전쟁이 완료되는 1953년까지의 시기는 ‘갑작스런’ 해방에 의해 식민지시대의 어떤 계급도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두 가지 길, 즉 ‘혁명적 민주주의적 길’과 ‘신식민지적 자본주의적 길’ 간의 첨예한 투쟁이 전개되었던 시기”註1)라고 할 수 있다. 왜 이것이 ‘단순화’된 생각인가 하면 처음부터 이러한 두 가지 경향만이 역사적으로 선택될 가능성을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이 상존해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이 내외부적으로 조건 지워진 서로 다른 정치적 집단들의 투쟁이라는 역동적 과정 속에서 위의 두 경향이 서로 형성•강화되고, 서로 대립되면서 내전이라는 파국적 상황까지 달려나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당시의 한국사회가 서 있던 내외부적인 요소들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하여, 그것에 조건 지워져 서로 투쟁하는 상이한 계급•계층적 이해를 담지한 정치세력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 투쟁과정 속에서 두 가지 경향이 생성•대립하면서 특수하게 나타나는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형성과정을 살피겠다.

2.
해방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의 폭발적인 계급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하에서 형성된 혁명과 반혁명의 물질적 기반을 살펴야 한다. 여기서는 반혁명의 기반을 이후 논의를 위해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하겠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한 부르주아국가와 거기에 수반되는 법적, 제도적 틀의 확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민지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메트로폴리탄 부르주아에 의한 식민지 통치의 부과와 함께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식민지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메트로폴리탄 부르주아의 과제는 단순히 메트로폴리탄 국가 자체에서 확립했었던 국가의 상부구조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부가적으로 그것은 식민지 고유의 사회적 계급들 모두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기구를 창립해야만 한다. 따라서 신민지의 ‘상부구조’는 식민지의 ‘구조’와 관련하여, ‘과대성장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註2) 이것은 신민지 조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서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는 다른 식민지 국가와 비교해 볼 때 ‘과잉결정되어진’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메트로폴리탄 국가(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일본의 상부구조의 형성은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는 사뭇 다르게, 즉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은 고도의 중앙집권적인 상부구조(메이지 정부)를 가졌고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과대성장된 상부구조에 ‘더 부가된’ 상부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헨더슨은 일본의 식민주의가 유럽의 식민주의보다 더 혹독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전체적’이라고 표현한다.註3)

3.
해방 이후의 정치적 계급투쟁 속에서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는 세력은 식민지 조선에서 경찰, 관료체제에 종사한 계층들과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재래의 토지관계를 인정받은 지주계급이었다. 이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일본의 지배에 협력한 관계가 있어 해방된 한국에서는 정치적 정통성이 결여註4)되어 있었지만, 1945년에는 지주제도의 유지, 공업의 개인소유, 부일협력자에 대한 무처벌 혹은 가벼운 처벌, 일본치하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의 권력유지 등을 주장하면서 시민사회에서 자신들을 제외한 아무런 동조자들이 없이 있다가註5) 미군정의 실시와 함께 무섭게 조직화되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적으로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미군정의 정책에 원인이 있었지만, 빠른 시간 동안에 관계의 역전이 가능했던 것은 시민사회를 압도하는 식민지적 국가기구의 부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에서의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승주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대표적인 억압적 국가기구인 경찰의 확대 원인과 과정을 보여준다. “1945년, 한국이 일본의 36년 간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될 당시까지 일본 총독은 동경에 있는 일본 본국 정부에만 책임을 지면서 한국 민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다. 총독의 주요 통치수단은 각종 제국법령과 계엄법, 선언, 행정명령이었다. 이러한 각종 법령은 그것이 한국 민족에게 어떻게 수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발표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효과적이고 엄격히 조직된 경찰력을 필요로 하였다. 한국의 경찰관수는 한•일 합방 4년 전인 1906년에 3,359명에서 1919년 전국적인 항일시위가 있은지 4년 후인 1923년에는 20,758명으로 증가하였다. 경찰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이 수준을 유지하였다. 1939년의 경우, 경찰력의 약 40%(23,268명 중 8,644명)가 한국인이었고, 한국인들은 대개 최하급 경찰관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 일본경찰은 한국의 정치•경제•문화활동•교육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면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註6)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의 관료체제는 “한국사회의 상부에서 권위적이며 위압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상층계급과 식민지의 벼락출세자들-양반, 지주, 관료 등-하고만 연결도었으며, 그러한 연결조차 빈약한 것이었고, 국가의 업무에 실질적 참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해소 내지 물리치기 위한 방편에 그쳤다. 일반적으로 보아, 일본은 힘의 균형을 전환시키고자 자원을 미증유의 규모로 동원하고 수탈하는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한국에서의 중앙관료세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주변과 희미하게 연결된 허약한 관료체계가 아닌, 위에서 밑바닥까지 침투하는 명령계통이 발전되었다.

한국의 정세를 식민지하의 베트남과 비교한다면, 프랑스는 1937년에 1천7백만 베트남인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행정인원 2,920명에 정규군 10,776명을 배치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은 2천1백만 한국인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그라쟌체프가 식민체제에 속했다고 분류한 분야에 일본인이 약 246,000명이 공공 및 전문직에 종사하였으며, 유사하지만 종속적인 지위에 한국인을 약 63,000명이나 채용하였다. 1937년에는 한국에 거주한 일본인의 42% 정도가 총독부에 종사하였다. 이에 비한다면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아주 얇은 계층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지명 같은 혁명지도자는 영국의 인도 통치에 비하여 많은 프랑스인들의 존재를 자주 지적했었다.”註7)

즉,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의 형성도 있기 전에 전사회를 지배하는 근대적인 관료체계와 경찰력을 가진 ‘과대성장된’ 국가기관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시민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그것은 조선에서는 외래적인 것이어서 자신의 통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국가기구의 비대화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4.
식민지 조선에서의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는 1945년 해방 이후 관찰되는 시민사회의 급속한 팽창 속에서 해체되어 간다. 이와 같은 시민사회의 팽창 현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제의 식민지통치 체제를 지지하는 어용적 정치사회 단체를 제외하고는 밑으로부터 일체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의 자발적 표출을 금압하였던 억압적 통제기제가 갑작스레 제거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註8) 물론 이러한 시민사회의 폭발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조직경험이 있었다. …… [조선]노동총동맹은 특히1929년 3개월에 걸친 원산총파업을 일으키는데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농민조합들은 ……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걸쳐 소작분쟁을 주도했을 때 거둔 성공 [경험이 있었다.] …… 당시의 적색농조들은 한국 전역의 군(郡)들에 1945년에 부활할 수 있는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註9) 식민지 조선 후반기에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자, 농민들의 조합이 한편에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측이 주도한 애국 및 반공단체들이 한국사회의 모든 계층에 존재註10)하였고, 이들 중 전자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면서 탄압이 극심해비면서 10여년간 지하에 잠복해 있다가 해방되면서 수백만의 노동자, 농민을 현대적인 정치투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해방 후 시민사회의 소생과 급팽창 과정을 살펴보면, 해방 후 두달도 지나지 않아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단수는 54개였고, 그 후 1년 이내에 그 수는 300여개에 이른다. 이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의 대중적 기반이 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조직은 중앙기구가 8월 15일 창립된지 불과 수일 사이에 전국에 퍼져 8월 말에는 마을 단위까지 존재한 ‘인민위원회’가 농민조직과 대응하면서 가득 차 있었다. 전국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총평의회 산하 노동조합의 조직화는 3개월 이내에 가맹조합 수 1,194개와 조합원 20만을 기록하는 세계 노동운동사상 전무후무한 조직화의 속도와 조직을 보여준다. 그리고 청년단체, 학생단체, 부녀단체, 문화단체, 종교단체와 정치적, 사회적 이해를 달리하는 무수한 단체가 조직된다.註11) 이렇게 급속히 팽창된 시민사회의 조직들은 곧 바로 식민시대의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해체해나간다. 그러면 해방과 함께 식민사회의 유물로서 제거 대상이 되어버린 경찰•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의 해체 및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8월 16일 몇몇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들이 건국청년치안대-9월 2일 공식적으로 건국치안부로 명명-를 조직하고 전국에 걸쳐 162개의 중앙의 추인을 받은 지부가 구성된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이 “남한에서도 치안대는 식민경찰의 한인분자들을 철저하게 추방시켰다. 관련 소식통에 따르면 8월 15일과 9월 8일 사이에 일본인 경찰관의 90%가 그들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같은 시기에 한일 경찰관의 80%가 일을 멈추었던지, 쫓겨났든지, 혹은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한인들이 식민경찰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경찰력의 뚜렷한 약화를 초래한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직위에 머물러 있던 경찰의 대다수도 치안유지보다는 자기보호에 급급해 있었다. 따라서 치안대는 8•15 이후 치안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註12)

8•15 직후 수일 내지 수주 사이에 일본군 출신의 장병들이 주도한 상당수의 군사적•준군사적 단체들이 나타났고 8월 중에는 이들의 대부분이 건준의 산하에 있으면서 조선국군준비대를 조직한다. 지방에서는 건준과 국군준비대의 지도층이 서로 얽혀 있기도 했다. 국군준비대는 남한 전역에 지대를 설치했으며, 대원 6만 명을 모집하여 그 중 1만5천 명에게 약간의 훈련까지 시켜 비공식 군사기구 중 최강의 조직을 갖추고 치안 유지를 치안대와 함께 수행한다. 그러나 미군이 9월에 진주한 후 이 조직들은 무수한 사병들과 청년단체들로 분열되었다.註13)

식민지 관료기구들을 대신하여 새롭게 조직된 인민위원회가 한국의 군 중 약 반수를 지배하며 정부 역할을 담당한다. 대부분의 인민위원회들은 조직, 선전, 치안(혹은 보안), 식량관리 및 재정의 부서를 갖추었고, 해당 지역의 절대적 필요에 따라서 구호, 난민, 일용품, 노동관계 및 가장 흔한 것으로 소작료 등을 다루는 부서를 갖추기도 했다. 지방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학생들과 귀향한 정치범들이 주된 역할을 맡았으며, 이들 중에 많은 공산당원들이 있어서 지방의 당 세포조직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지방 인민위원회 조직에는 학생, 제대군인, 지방의 엘리트, 지방의 지주, 심지어 일본치하의 전직 관리까지 참여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해방 후 한국에서 일어난 조직 팽창의 일부이다. 해방의 흥분된 분위기와 가슴 속에 누적된 농민들의 불만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인민위원회의 급속한 전파(조직의 팽창, 시민사회의 팽창)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전적 혁명을 농민들이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처럼 유리한 기회를 보았을 때 지방 관리들, 경찰들 및 지주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군, 읍 및 마을에서 고전적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해방 후 시민사회의 급속한 팽창 속에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경찰력이 구성되었으며, 인민위원회들이 행정을 인수하였다. 하지만 몇몇 지방에서는 구질서와 새질서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나란히 서있기도 했으며, 몇 안 되는 지방에서는 새질서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것 역시 고려하여야 한다.註14)

5.
“해방 직후의 미소냉전의 급속한 전개가 상이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동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일제 유제의 청산과 민족독립국가의 형성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념적 바탕이 될 민족주의라는 정의적(情義的)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상황 조성을 일찍이 분쇄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그에 적대하는 이데올로기를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모든 정치사회적 대식을 양극 분해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전치시켰다.”註15)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해방 직후 다수의 정치세력들이 ‘상이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동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일제 유제의 청산과 민족독립국가의 형성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념적 바탕이 될 민족주의라는 정의적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상황’이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간엔 공산주의자인 좌파, 비공산주의자적 사회주의자들인 중도파, 그리고 민족주의 좌파가 연합하여 건준을 조직했고, 앞에서 살폈던 바와 같이 정치적 정통성에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 우파들은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 하며 조직구성 노력을 주저하면서 건준에도 참여를 거부했다.註16) 

하지만 “항일투쟁에서 단련되어 온 공산주의자들과 좌파인사들에게 있어서 민족주의가 국제주의보다 앞섰[고 따라서] …… 인공의 영도자 명단은 좌파의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양파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했다. …… 9월 8일에 인공은 내각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좌와 우의 진정한 연립정부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註17) 그리고 해방정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살펴보면, ‘민족주의 우파(극우)’라는 명칭을 부여 받은 한민당 등도 당시 정파간의 상대적 비교를 위한 ‘비교서술’적 개념으로는 적합한 것일지는 몰라도 이들 경제강령의 내용을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분류기준에 맞추어 보면 오히려 이들에 대한 분류는 ‘좌익’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정도로 좌경화되어 좌측의 반쪽 지형에서 싸움이 이루어질 정도로 ‘좌경 반쪽 지형화’되어 있었다.註18)

이러한 전체적 이데올로기 지향의 전반적 좌경화 속에서 우리는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지적한 바 있는 ‘혁명적 민주주의적 길’이 선택될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즉 ‘비(非)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의 지향성을 가지면서 경제에서 국가부문이 지배적이고 산업활동이 국가주도로 이루어지는 ‘국가자본주의’적 토대형성의 가능성과 이에 조응하는 상부구조인 ‘민족민주국가’ 수립의 가능성이다.註19)
<표> 해방정국과 제정파의 경제강령 비교
극우
(임협,한민당)
중도우
(입헌의회)
중도파
(시협)
극좌
(민전,남로당)
극좌
(북로당)
생산수단
소유형태
공유 내지 
국가경영
국방산업 
외 사유
사유
좌동
국가경영
관민합영
사유
국유화
국유·공유
대체로
사유공유
공공기관과 지하자원 국유기타 국공사 혼합
경제
운영방식
통제경제
계획경제
계획경제
계획경제

※ 주:여기서 ‘극우’, ‘극좌’는 제정파간의 상대적 관계를 구별하기 위한 ‘서술적’ 명칭일 뿐 제정파의 구체적 내용을 평가한 ‘평가적’ 개념은 아님. 그리고 ‘북로당’에서 공공기관은 은행, 철도, 전기 등이고, 기타에는 소매업, 회사, 수공업이 속한다.



<그림> 해방정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좌경 반쪽 지형)

하지만 시민사회에서의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의한 억압적 국가기구의 파괴와 좌경화된 이데올로기 지형의 구축은 미군정의 시작과 함께 억압적 국가기구의 부활•강화와 이데올로기 지형의 우익화 과정으로 진행되었고 한국전쟁은 이것을 ‘가속화’시키고, 한국은 민중부문을 배제시킨 ‘종속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걷게 된다.

6.
8월 28일부터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다는 말이 퍼졌으며 우파들도 그날부터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파는 연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한민당의 핵심세력은 지주, 지주출신의 생산업자 및 출판업자들의 집단이었고, 한민당은 식민총독부에서 고관을 지낸 많은 사람들-이들의 대부분 또한 지주들이었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註20) 그러나 시민사회에서의 ‘정치적 정통성의 결여’와 지지 기반의 미약 속에서 그들의 최대강령-봉건적인 토지관계의 지속-이나, 최소강령-지주 및 기타 한국의 엘리트들에게 토지든 혹은 다른 형태의 자본이든 간에 그것에 보다 특이하고 우월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기존의 사회적 지배구조를 유지시키라는 것-의 실현은 모두 미군에게 달려있었다.註21)




1945년 9월 7일 미 24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 미국은 미군정이 남한에 있어서의 유일한 정부라고 하고, 행정•입법•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직접통치」를 시작했다. 미군정은 우선 조선총독부의 기구 및 많은 인원을 그대로 유임시켜 이용했다. 그리고 점령목적에 필요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이용하면서 남한에 있어서 좌파세력의 앙양을 저지하고 ‘친미적 정권’을 육성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정했다. 요컨데 남한 공산화의 저지라고 하는 기본방침은 명백했으나 구체적 준비 없이 진주했기 때문에 미군은 우선 앞에 말한 미군정에 의한 직접통치를 통하여 현지 남한의 실정을 익히는 한편 미국인의 감각에 맞는 우파세력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이다.註22) 그 구체적인 정책의 전개과정에 대한 분석은 본론의 범위를 넘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미군정기의 지배연합의 형성과 억압적 국가기구의 부활을 중점적으로 살피겠다.

미군정은 가장 먼저 친일 관료세력들을 대부분 재등용시켰다.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주인만 바뀐 채 관료세력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자본가계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은 일정 기간 동안은 남한 내의 지배계급으로서 지주계급을 민중들의 요구를 배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동맹세력으로 삼았다. 국내에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 미군정에게 지주계급의 급속한 몰락은 권력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에 의한 지배는 이후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가 남한에서 관철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미군정은 민중들의 요구를 배제하기 위해서 억압적 국가기구로서 경찰력과 함께 준국가기구로서의 우익청년단체들을 이용했다. 이와 같이 미군정기에는 미군정을 중심으로 식민지 관료세력 및 식민지 경찰세력, 우익청년, 그리고 민족주의 우파세력의 핵심인 지주계급들을 주축으로 하고, 국내 자본 및 미국 독점자본을 보조축으로 하는 지배연합이 형성되었다.註23)

미군정은 남한에서 가장 잘 조직되어 있는 식민지 관료체제를 시민사회에서의 대중의 정치적 동원 속에서 해체되어 가던 것을 저지시키고 다시 부활시켰다. 더욱이 관료체제는 북한에서의 철저한 숙청작업을 통해 쫓겨난 부일 관료들이 남하하여 ‘개편된 총독부, 혹은 미군정에 봉사할 수 있는 관료수는 아마 배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식민관리들은 미군 사령부와 한민당 내에서 적극적인 동맹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한민당의 지도층은 관료체제의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였다.註24)

미군정 하에서 식민지 시대의 군사법령, 정치집회금지법, 선동문서통제령, 치안유지법 제2호 등이 계속 발효되었고, 식민법률들이 자주 판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시민사회에서의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서 출판물의 검열권, 모든 정당의 등록규정 및 점령에 ‘유해하다’고 인정되는 모든 것을 방지하는 점령군의 고유한 일반적 권력에도 많이 의존하였다. 또한 일본의 사법부에 종사했던 조선인은 전원 유임되었고, 가장 중요한 직책은 또 한민당으로 돌아갔다.註25)

미군정의 시작과 함께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고도로 중앙집권화 되었고, 자족하는 전국적 부대’로서 식민지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경제•문화활동•교육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면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제적’인 식민지 경찰체제의 부활이다. 최상룡의 글 속에서 보았듯이 미군정은 좌파세력의 앙양 저지와 친미적 정권수립이라는 정책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모두 실현시킬만한 우파세력이 사회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을 수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이 부일 협력자들을 축출•처벌하고자 하는 좌익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해체하는데-좌익의 집권을 막아야 하는데-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응집되어 있는 국립경찰이었다. 미군정 하에서 남한 내의 경찰은 식민지 시대의 억압적인 ‘사상통제•비밀경찰업무’ 등과 같은 업무를 계속 하면서 좌파를 탄압하였다. 또한 ‘반대파에 대항할 조직과 대중적 기반이 없는 우파들’에게 경찰체계는 정치투쟁에서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註26)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을 점령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친소세력이라고 판단되는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서 ‘특정한 지도자나 단체 혹은 연합체’를 제외하고는 많은 단체들을 미군정청은 좌익으로 분류하여 정치권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제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지나치리만큼 부호와 보수적인 인사들’을 끌어들여 남한 지배를 수행했다.註27) 미군정기의 지배연합의 형성은 “유약한 경제적 지배계층의 형성보다 미국의 전략적 목표에 부응하여 군정체제를 뒷받침할 지원세력으로서의 정치적 핵심집단의 형성”註28)이었고, 이것은 식민시대의 ‘과대성장된’ 억압적 국가기구를 매개로 이루어 졌다. 이러한 정치연합은 곧 바로 시민사회에서의 노동자, 농민, 중산층, 지식인 등의 폭발적인 정치 조직화의 탄압과 분쇄, 민중의 탈동원화를 의미하였고, 이것은 1946년 후반기에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세력간의 무력투쟁이라는 상황으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지방에서의 봉기가 지나간 후의 결과는 남한 정치의 거의 모든 무대에서 ‘우익 독재세력의 강화와 신장’이었다.註29) 결국 사회에서 좌파의 패배의 결과는 사회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어떤 나라보다 많이 확보한 국가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7.
민중들의 체제변혁의 도전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변화가 지배연합 내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농민들의 혁명적 열기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신한공사 소유의 토지분배, 농지개혁을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지배연합의 한 분파였던 지주계급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장기적으로 자본주의화에 장애가 되는 존재”註30)였기 때문이라는 추상적인 것에서 찾기보다는 추상성이 낮은 구체적 수준에서 국가를 ‘후기’ 풀란차스와 같이 “사회제세력의 힘의 역관계의 응집”으로 이해하면서 국가정책의 성격도 궁극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이 관철되는 구조적 한계 내에서 계급의 역관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농민에게 유리한 이러한 정책이 수립되었다는 것에서 찾아야 옳을듯하다. 지배계급 전체의 입장에서 국가는 당시의 혁명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을 찾는다면 지배연합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관료•경찰세력에게는 시민사회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정당(한민당)이라는 것은 권력의 분배만을 요구하는 불필요한 존재로 비춰졌다는 것이다.註31) 따라서 제1공화국의 지배연합은 관료•경찰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국내자본과 결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註32) 이러한 것은 당시의 ‘과대성장된’ 국가기구에 의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이 확보된 ‘상대적 자율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 억압적 국가기구의 양적, 질적 팽창에 또 한번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것이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 중 군은 최고 70만 명, 경찰은 6만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종전 후에도 경찰은 3만3천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군은 60만명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註33) 그리고 이러한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역할, 즉 내전을 통해 형성된 반공이념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한국전쟁이 만료될 때까지의 격렬한 계급투쟁 속에서 식민시대의 산물인 ‘과대성장된’ 억압적 국가기구를 장악한 우파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전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면서 지배계급은 그람시적 의미의 정치적 헤게모니-‘능동적 동의’에 의한 지배-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부분적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은 그 전까지 이승만, 한민당 등 ‘극우세력’과 지배연합에 국한되어 있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절대 다수의 국민들의 ‘수동적 동의’ 내지 ‘능동적 동의’로까지 유도해낼 정도로 확산되었다.註34) 이러한 ‘반공•반북 의식의 내재화’와 우파세력의 권력장악 속에 ‘우경 반쪽화된’ 이데올로기 지형이 형성되면서 해방 당시 형성되었던 좌익 헤게모니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적 국가요소와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들의 모순적 혼재 현상은 급속히 사라지고 ‘종속적 자본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註35)

8.
지금까지 계급투쟁을 매개로한 남한에서의 국가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작업은 50년대의 이승만정권의 ‘독재’와 60년대의 ‘군부독재’ 출현의 가능성을 밝히는 기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70년대의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상부구조로써 ‘신식파시즘’ 체제의 용이한 구축이 가능했던 원인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 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시민사회의 재부활’과 억압적 국가기구의 해체와 사회의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과대성장국가론의 문제점은 알라비는 상부구조가 토대에 ‘비조응’하여 과대성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상부구조의 토대에 대한 ‘비조응’이라는 것에 반대하여 상부구조는, 일시적인 일탈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짧은 시간일 뿐이며 장기적으로는 토대에 ‘조응’한다는 것에 기초하여 쓰여졌다. 따라서 제3세계에 있어서 국가의 과대성장이라는 개념은 토대-상부구조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차원에서 상대적인 국가기구의 과대성장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알라비처럼 국가와 시민사회를 대립개념으로 놓고, 국가가 과대성장했다고 할 때, 헤겔류의 ‘사회로부터 군정의 절대적 자율성 확보’라는 이론의 국가주의적 신화로의 퇴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국가는 다만 사회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현재 남한 사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정치현상들-재벌의 정치적인 진출은 ‘일탈’에서 ‘조응’으로 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과거의 지배블럭이 파괴되고 새로운 지배블럭의 형성-지배블럭의 재편 과정-을 의미한다. 그 사이에 기존의 기득권 세력간의 정치적인 헤게모니 장악을 목표로 한 투쟁이 발생하고, 그것이 지배계급 내의 이전투구이다. 그 원인에 한국경제-자본주의적인 토대-의 발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미주
1) 서울사회과학연구소『한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 pp.107~118.2) Hamza Alavi, 「과대성장국가론: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국가란 무엇인가』(임영일이성형 편역까치), pp.346~347. 
국가란 무엇인가:자본주의와 그 국가이론 - 10점
임영일/까치글방

3) 브루스 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일월서각, 1986), p.40. 
한국전쟁의 기원 -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일월서각

4) 커밍스같은 책, p.121.5) 커밍스같은 책, p.141.6) 한승주「제1공화국의 유산」1950년대 인식』, pp.29~30.7) 커밍스같은 책, p.41.8) 최장집「과대성장국가의 형성과 정치균열의 전개」『한국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까치), pp.82~83.9) 커밍스같은 책, p.118.10) 커밍스같은 책, p.114.11) 최장집같은 책, pp.82~83. 커밍스같은 책, pp.346~355.12) 커밍스같은 책, pp.114~115.13) 커밍스같은 책, pp.116~117.14) 커밍스같은 책, pp.346~355.15) 최장집같은 책, p.83.16) 커밍스같은 책, pp.134~135. 『한국민중사』(풀빛), pp.229~230을 참고할 것
한국민중사 1:전근대편 - 10점
한국민중사연구회/풀빛

17) 커밍스같은 책, p.123, p.129.18) 손호철「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지형」(역사비평, 1991 여름), 『한국정치의 새구상』(풀빛, 1991), pp.158~160.19) 서울사회과학연구소같은 책, pp.107~127을 참고할 것손호철같은 책, pp.165~166.20) 커밍스같은 책, p.124를 참고할 것.21) 커밍스같은 책, pp.134~142.22) 최상룡「分割占領과 信託統治」『現代韓國政治論』(법문사, 1986, 한국정치학회편), pp.110~121. 
현대한국정치론 
한국정치학회/법문사

23) 『한국정치론』(백산서당), pp.228~229.24) 커밍스같은 책, pp.206~213.25) 커밍스같은 책, pp.213~216.26) 커밍스같은 책, pp.216~222.27) 『경제와 사회』, pp.201~202.28) 최장집같은 책, p.86.29) 커밍스같은 책, pp.531~532.30) 『한국정치론』(백산서당), p.228.31) 한승주「제1공화국의 유산」1950년대의 인식』(한길사, 1981), pp.29~30.32) 『한국정치론』(백산서당), p.229.33) 손호철「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연구 비판」(실천문학, 1989 가을), p.121.
34)
 손호철「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지형」같은 책, p.160.35) 손호철같은 책, pp.165~169.

---

이 글은 1991년,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썼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져 구조화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자취방과 텅빈 강의실을 오가면서 공부하던 때가 그립다.

올해 1월 초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면서 누렇게 바랜 출력물을 찾았다. 그때는 PC가 흔하지 않던 관계로 워드프로세서(대우전자에서 나온 '르모'였던 것 같은데)로 작업하여 출력했다. 그때는 손으로 쓰고 입력하고 했다.

이 글을 읽다보니 사실에 대한 인식이 경험이 아닌, 이론 의존적이라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무수히 많은 경험적 사실(데이터)들이 이론에 걸러져 재배치/구조화되면서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 만들어진다. 이때 과대성장국가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에 의지하여 한국사회를 이해했고 여전히 이런 이해의 연장선에서 90년대와 2000년대를, 오늘을 이해하고 있다. 과거/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현재에 대한 이해를 공고히 하여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