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 임석재 지음/인물과사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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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건축물과 그림 - 장치들 및 '물신'이라는 말이 등장한 배경, 그리고 소외, 진정한 경험 등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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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c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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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만국박람회는 교회가 하던 역할까지 도맡게 되었다. 석재로 짓던 전통적 종교 공간인 교회의 역할을 철로 지은 공산품 전시공간이 맡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산업 개발을 찬양하고 자본가의 성공을 빌어주는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도 이때였다. 성직자들은 돈만 주면 각종 기도회를 열어 산업자본주의의 성공과 번성을 기원하고 찬양했다. 신께 드리던 찬양이 물질로 향한 것으로, '물신'이라는 말이 등장한 배경이었다. 부르주아들이 가장 간절하게 기도하는 공간은 교회가 아니라 만국박람회장의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기도 대상도 신에서 물신으로 바뀌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철물 무주 구조가 만들어내는 텅 빈 거대 공간이었다.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 임석재, p.365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쓴 Benjamin을 이해해 보려고 읽은 책이다. 왜냐하면 예술품인 그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어디에인가 걸려있는 것이다. '어디'가 처음에 성당이었고, 전시장과 박물관으로 바뀌어간다. 그림이 걸려있던 몸체, 건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아우라'도 그저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일체감)이 아닌 '세심하게 만들어진 장치 - 가톨릭적 제의장치'가 만든 효과일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1876년 파리 만국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의 건축물을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다. 그 시대는 마르크스의 시대이기도 하고, 벤야민이 ⟪파사주 프로젝트⟫를 통해 자본주의의 환등상과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뭔가를 발견하려던 시기이기도 한다. 내가 책 더미 속에서 찾고 있는 '어떤 미디어 장치들'이 만들어지거나 부서져나가던 시기이다. 왜 그림과 건축을 함께 봐야하는지를 말하는 글을 하나 더 인용한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1876년 파리 만국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의 건축물을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다. 그 시대는 마르크스의 시대이기도 하고, 벤야민이 ⟪파사주 프로젝트⟫를 통해 자본주의의 환등상과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뭔가를 발견하려던 시기이기도 한다. 내가 책 더미 속에서 찾고 있는 '어떤 미디어 장치들'이 만들어지거나 부서져나가던 시기이다. 왜 그림과 건축을 함께 봐야하는지를 말하는 글을 하나 더 인용한다.
카메라의 발명은 그것이 발명되기 훨씬 이전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본래 그림들은 그 그림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건물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초기 르네상스 교회나 예배당 벽의 이미지들이 그 건물 내부에서 전개되었던 삶의 기록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리고 그런 기록들이 현대에 와서 그 건물의 기억을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그림들은 건물의 특수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p.24
벤야민은 사진/카메라에 의해 예술작품/그림이 가지고 있던 제의적 효과가 사라지고(약화되고) 전시효과가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오랫동안 이해를 위해 노력했는데, 아주 단순한 사실을 가르키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것이 걸려있는 곳,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겪은(겪고있는) 삶, 즉 맥락(context)가 바뀌면서 만들어져 있던 실들이 풀려 천 위의 문양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양이 짜여진다는 것.
기술적으로 복제된 어떤 그림의 사진이 여기 저기 걸려있게 되면서, (어떤 건물, 특히 성당 등에 걸기 위해 그려진) 그 그림의 가지고 있던 의미/효과가 바뀐다는 것. Deleuze처럼 말하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바뀌고 새롭게 교차(직조)되면서 어떤 추상기계가 나타난 것이다.
가톨릭성당-성화에 대한 '언표적 배치'를 살피기 위해서는 토렌트 공의회의 결정과 가톨릭 개혁가들의 저작과 실천들, 이에 대한 화가들의 대응(수용) 등을 볼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의 성상파괴운동과 함께. 가톨릭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최근 <엘 그레코(1541-1614) 종교화의 반종교개혁적 도상연구>(최경화,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2003)와 신준형의 책들(특히 [[루터와 미켈란젤로 -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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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진정한 경험(Kracauer, Benjamin 등), 물신 등의 개념은 전통(자본주의 이전) 사회와 근대(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이행기에 만들어진 개념들처럼 보인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 공동체와 개인, 생산물과 생산자의 관계의 변화가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바꾸면서 두 사회(삶)를 비교하면서 발견된 차이들을 표현하는 개념들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은 어떤 형태로든 '실체(substance, 또는 본질)'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실체나 본질은 아주 오래된 관습이나 습관, 물질적인 형태나 제도, 제의(의례)로 붙잡혀있는/붙잡혀있던 '어떤 관계(또는 힘, force)'-쓸모/용도도 이런 관계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이다.
疏外, alienation
소외, 진정한 경험, 물신 같은 개념은 과거의 특정한 상황/상태/관계 등을 현재보다 좀 더 나은 상황/상태/관계인 것으로 본다. 이럴 때, 이런 개념들은 과거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로 볼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재의 상태를 수구적인 방식으로 인식한다고 할까!
그런데 이 개념들을 좀 더 진보적인 방식으로 사용/사유해볼 수도 있다. 소외라는 철학적 개념이 헤겔에서 연유한다면, 그가 사용한 지양(aufheben)이란 개념틀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굳이 지양을 생각하고 싶지않다. 변증법이나 매개라는 것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어보인다.
지양 止揚
소외를 '다른 사람이나 장소에 속해 있거나 소속되어있음'이란 뜻으로 생각을 해보자. 원래는 A라는 사람이나 a라는 장소에 있던 것(Thing - T)이 B라는 사람이나 b라는 장소에 속하게 된 것, 이에 따라서 A가 느끼게 되는 T에 대한 감정(소외감), 거리(실제 물리적인 거리와 법, 제도에 의한 거리, 권리적인 거리, 그 T에 대해 발휘할 수 있는 힘/통제력 등에 대한 거리)를 개념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을 소외라고 할 수 있다. 또는 a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던 T에 대한 장소성, Benjamin식의 '아우라' - 진품성, 권위 등이 사라지거나 약화됨에 따라 나오는 정서(feeling) 등등.
이때 a(성당)-T(성화)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다. a-T 사이(관계)에 들어선 사람이 전제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이 그렇지만) 사람이 없이 소외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상태/상황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기계적 배치-관계'가 바뀐 것이다(Deleuze). 그 관계의 바뀜을 표현한 것을 소외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삶의 형식(form of life)가 바뀌었고, 이것 때문에 언어게임의 규칙이, 단어의 의미나 쓰임이 바뀌었다고 말할 것 같다.
소외, 진정한 경험, 물신 등을 진보적으로 생각한다고 할 때, 진보라는 단어가 가진 뉘앙스를 (접을 수 없지만 억지로) 접고서, 사람과 사물,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가 맺는 관계의 다수성/다양성 측면에서 보고 싶다. 숨겨져있던 관계가 어떤 특정 맥락/상황/상태에서 드러나는 것 말이다.
우리가 새로운 사용법이나 잠재해있던 힘을 알게 되었다, 또는 그것을 접했다고 할 때, 우린 그것이 (삶/겪음에 있어서는) 쓰라리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를 더 만난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진보(더 나아감, 더 많이 알게됨, 더 나은 실천/삶을 살 수 있음)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삶의 쓰라림은 쓰라림인 것!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넘어서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전통사회에서 A-T, a-T관계와 근대사회에서의 그것 중 우리(공동체든 개인이)가 선택할 수 있는 역량/힘이 있다할 때, 그것을 계발한다고 할 때 우린 이 개념들 안에서 실체나 본질 이상의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이때 '이상의 것'이란 뜻은 '우월한/더 나은 것'이란 의미보다는 '(본질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벗어난 것, 미끄러진 것'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는 좀 더 복잡하다. "A(복수인 A들)-a(복수인 a들)-T(복수인 T들)-T에 대한 담론들', 또는 이것들의 순서가 바뀌거나 선형(linea)이 아닌 입체적인(분자구조처럼) 배열들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실체나 본질은 어떤 위계를 상정하지만, 그 위계를 버리고 우리가 그 관계들의 평등성(존재의 일의성) 속에서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린 선택이나 어떤 최적화(라이프니츠적인 Optimization)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최적화의 함수는 스피노자가 말했던 기쁨과 슬픔, 우리 역량의 증대나 감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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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형식(form of life) : 이 시기, 19세기 철학자들은 '삶의 형식'이란 개념을 자주 사용한다. 삶의 근거지우는 형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니체, 비트겐슈타인 등등
※ 라이프니츠적인 Optimization: 신은 완벽한 세계를 만든 것은 아니다. 가능한 세계 중 최적화된 세계를 만든 것이다. 기후변화로 쓰나미가 일고 코로나19가 들끊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바로 그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지만 신의 자리에 우리 자신, '이성적 판단력'을 지닌 인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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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당-성화에 대한 '언표적 배치'를 살피기 위해서는 토렌트 공의회의 결정과 가톨릭 개혁가들의 저작과 실천들, 이에 대한 화가들의 대응(수용) 등을 볼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의 성상파괴운동과 함께. 가톨릭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최근 <엘 그레코(1541-1614) 종교화의 반종교개혁적 도상연구>(최경화,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2003)와 신준형의 책들(특히 [[루터와 미켈란젤로 -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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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진정한 경험(Kracauer, Benjamin 등), 물신 등의 개념은 전통(자본주의 이전) 사회와 근대(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이행기에 만들어진 개념들처럼 보인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 공동체와 개인, 생산물과 생산자의 관계의 변화가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바꾸면서 두 사회(삶)를 비교하면서 발견된 차이들을 표현하는 개념들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은 어떤 형태로든 '실체(substance, 또는 본질)'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실체나 본질은 아주 오래된 관습이나 습관, 물질적인 형태나 제도, 제의(의례)로 붙잡혀있는/붙잡혀있던 '어떤 관계(또는 힘, force)'-쓸모/용도도 이런 관계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이다.
疏外, alienation
- late 14c., "transfer of ownership, action of estranging" : 소유권 양도, 떼어놓는 행위/소송
- "a transfer, surrender, separation" : 이전, 이양, 인도, 분리
- "to make another's, part with; estrange, set at variance" : set at variance 차이설정, 소장과 진술의 상위
- "of or belonging to another person or place" : 다른 사람이나 장소에 속해 있거나 소속되어있음
- early 15c., "deprivation of mental faculties, insanity" : 정신 능력의 박탈, 정신 이상 --> "deprive of reason, drive mad" : 이차적인 의미로 이성의 박탈, 미치게 함
- 명사 정치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의 하나. 인간, 집단, 제도 혹은 사회가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나 혹은 산물이나 생존하는 자연, 다른 인간, 또한 그 자체에 대해서 소원하게 하는 행위 혹은 소원하게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소외, 진정한 경험, 물신 같은 개념은 과거의 특정한 상황/상태/관계 등을 현재보다 좀 더 나은 상황/상태/관계인 것으로 본다. 이럴 때, 이런 개념들은 과거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로 볼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재의 상태를 수구적인 방식으로 인식한다고 할까!
그런데 이 개념들을 좀 더 진보적인 방식으로 사용/사유해볼 수도 있다. 소외라는 철학적 개념이 헤겔에서 연유한다면, 그가 사용한 지양(aufheben)이란 개념틀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굳이 지양을 생각하고 싶지않다. 변증법이나 매개라는 것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어보인다.
지양 止揚
- 철학 변증법의 중요한 개념으로, 어떤 것을 그 자체로는 부정하면서 오히려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이것을 긍정하는 일. 모순 대립 하는 것을 고차적으로 통일하여 해결하면서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진보하는 것이다. ‘벗어남’, ‘삼감’으로 순화.
소외를 '다른 사람이나 장소에 속해 있거나 소속되어있음'이란 뜻으로 생각을 해보자. 원래는 A라는 사람이나 a라는 장소에 있던 것(Thing - T)이 B라는 사람이나 b라는 장소에 속하게 된 것, 이에 따라서 A가 느끼게 되는 T에 대한 감정(소외감), 거리(실제 물리적인 거리와 법, 제도에 의한 거리, 권리적인 거리, 그 T에 대해 발휘할 수 있는 힘/통제력 등에 대한 거리)를 개념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을 소외라고 할 수 있다. 또는 a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던 T에 대한 장소성, Benjamin식의 '아우라' - 진품성, 권위 등이 사라지거나 약화됨에 따라 나오는 정서(feeling) 등등.
이때 a(성당)-T(성화)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다. a-T 사이(관계)에 들어선 사람이 전제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이 그렇지만) 사람이 없이 소외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상태/상황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기계적 배치-관계'가 바뀐 것이다(Deleuze). 그 관계의 바뀜을 표현한 것을 소외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삶의 형식(form of life)가 바뀌었고, 이것 때문에 언어게임의 규칙이, 단어의 의미나 쓰임이 바뀌었다고 말할 것 같다.
소외, 진정한 경험, 물신 등을 진보적으로 생각한다고 할 때, 진보라는 단어가 가진 뉘앙스를 (접을 수 없지만 억지로) 접고서, 사람과 사물,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가 맺는 관계의 다수성/다양성 측면에서 보고 싶다. 숨겨져있던 관계가 어떤 특정 맥락/상황/상태에서 드러나는 것 말이다.
우리가 새로운 사용법이나 잠재해있던 힘을 알게 되었다, 또는 그것을 접했다고 할 때, 우린 그것이 (삶/겪음에 있어서는) 쓰라리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를 더 만난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진보(더 나아감, 더 많이 알게됨, 더 나은 실천/삶을 살 수 있음)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삶의 쓰라림은 쓰라림인 것!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넘어서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전통사회에서 A-T, a-T관계와 근대사회에서의 그것 중 우리(공동체든 개인이)가 선택할 수 있는 역량/힘이 있다할 때, 그것을 계발한다고 할 때 우린 이 개념들 안에서 실체나 본질 이상의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이때 '이상의 것'이란 뜻은 '우월한/더 나은 것'이란 의미보다는 '(본질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벗어난 것, 미끄러진 것'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는 좀 더 복잡하다. "A(복수인 A들)-a(복수인 a들)-T(복수인 T들)-T에 대한 담론들', 또는 이것들의 순서가 바뀌거나 선형(linea)이 아닌 입체적인(분자구조처럼) 배열들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실체나 본질은 어떤 위계를 상정하지만, 그 위계를 버리고 우리가 그 관계들의 평등성(존재의 일의성) 속에서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린 선택이나 어떤 최적화(라이프니츠적인 Optimization)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최적화의 함수는 스피노자가 말했던 기쁨과 슬픔, 우리 역량의 증대나 감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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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형식(form of life) : 이 시기, 19세기 철학자들은 '삶의 형식'이란 개념을 자주 사용한다. 삶의 근거지우는 형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니체, 비트겐슈타인 등등
※ 라이프니츠적인 Optimization: 신은 완벽한 세계를 만든 것은 아니다. 가능한 세계 중 최적화된 세계를 만든 것이다. 기후변화로 쓰나미가 일고 코로나19가 들끊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바로 그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지만 신의 자리에 우리 자신, '이성적 판단력'을 지닌 인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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