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게시물

사업/서비스를 위한 메모들 - 배치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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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16년 어느날 ~ 들뢰즈의 기계적 배치, 언표적 배치, 사건 개념을 연결 기계적 배치 - machine / 제작. 내적 맥락 언표적 배치 - 해석. 계열화 / Social. 서비스-소비적 맥락 사건 - contents. story적 맥락 사건이 이렇게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기계-언표-콘텐츠가 함께 교직되면서 어떤 사건/의미가 생겨난다. 기계-언표도 과도할 수 있다. 어떤 것(사업/전략)을 구조화할 때, 사용해보는 도구/개념 정도로 생각해보자. (2019.7.18) 콘텐츠나 사건을 어떻게 놓을까! 콘텐츠를 사건에 놓는 것은 category mistake이다. 콘텐츠는 기계적 배치 내에 내용이나 성질로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것이 놓여있는 미디어기계와 사람이 접속할 때, 어떤 의미와 사건이 일어난다. 그 내용(콘텐츠)에서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나 그 콘텐츠의 제작자(감독,작가, 편성/투자자 등)의 의도에 따라 가는 사람들 .. 의미가 갈리는 방식) - 성상을 파괴하는 신교도와 그것을 만들고 신성시 하는 가톨릭교도 어떤 특정 의미나 사건을 지속하도록 만든 게, 가톨릭 종교개혁의 '아우라(벤야민)' 장치라고 한다면 우리 옆에는 그 보다 유연한 '페북/facebook 기계'가 있고, 그 안에서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아우라' 장치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페북을 어떻게 쓰는지, 그 안에 어떤 peer들, 어떤 contents, context ... 기(氣)들이 우글대다 어떤 정향(개체화, 몰적 형태)이 발생하고/되고 고착될 것이다. (2019.7.19) 아래 글은 2019.7.23일 업데이트 -------------------- 2014.5.22일, 2015.3.12일 메모 - 메타데이터, TMI meta-data에서 meta는 변하지않는, 근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형이상학, meta-physica의 meta. meta를 뺀   data는 현상적인 것, 경험적인, 변하...

기술지대, 테크놀로지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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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후 '기술지대' 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술지대'에 관한 이해없이 '플랫폼(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 고 생각한다. '기술지대'에 대한 논의가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란 점을 고려하면 플랫폼사업과 연결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Marx의 <자본> 전체가 그렇지만 지대이론도 고전경제학자인 D. Ricardo에서 왔다고 생각하면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지대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사는 < 방송과 통신정책, IPTV 융합정책의 지대추구론적 분석 : 지대추구의 효율성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nvergence Policy of Broadcasting and Telecommunication in IPTV Convergence Service with Reference to Rent Seeking Theory> 때문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이상호 교수/박사 이다. 2007년, 나는 KT IPTV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박사는 KT에 근무하는 counter partner(차장)였다. 그가 지대이론에 근거해 플랫폼 사업자의 wining을 이야기했고, 우리가 추구했던(?) 'Digital Contents Platform'이란 허무맹랑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있는 친구에게 예전에 서점에서 서서 읽었던 만델의 <후기자본주의> 를 제본해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도 관심을 갖고 관련된 책과 논문들을 읽고 있고, 또 그 사이 기술지대와 플랫폼의 관계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정리해 <문화경제학> 시간에 짧게 강의를 했다. 기술지대는 기술(기술과 기술적 장치들, 그리고 지적 재산권 등의 법률적 제도 등도 포함된 기술)을 기반으로 부(가치)의 전유를 위한 회로 중 하나이고, 부불노동 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이 구체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읽기 - 상상력과 스토리, 그리고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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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도 2012~13년 사이에 썼을 것이다. '짐승같다'는 말이 있다. 잔악함이나 못된 정도가 '사람'의 도(선)를 넘어섰을 때 사용한다. 나쁜 쪽으로 '되기(becoming, 들뢰즈)가 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방향이라면 '~되기'가 아니라 '~이기'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가 던졌던 질문.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왜 같은 물건을 보고 서로 다른 정서(정동/감응)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지속될 때, 해부학이나 분류학의 기준으로 같은 종이라 할 수 있을까? 종을 구별하는 다른 차원, 강도적 차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맹자도 했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종교전쟁(네덜란드의 내전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면, 맹자는 전국시대의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 다만 스피노자는 차이에, 역량/능력과 감응의 차이를 말했다면, 맹자는 그 와중에 감응/정서의 동일성(?)을 말했다. 그런데 맹자의 단( 端, 실마리) 을 동일성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사물이나 사람의 규정성인 정체성, 동일성을 의미할 정도로 본질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의 길과 짐승의 길이 나뉠 수 있다. 현대의 진화생물학적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에 새겨진 사회성을 실마리라 할 수 있을까! 6월 19일 올린  ⟪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 에서 <강한 정서적 연대감>부분은 아래 글을 써보려고 하면서 읽은 책/논문들에서 흄과 관련된 부분을 좀 정리한 것이다. 스미스와 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이 기억이 맞을 것이다).  이 글은 <상상력, 우리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 같다. 스토리(이야기, 드라마, 특히 TV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에 빠져 있었고, 그 아래 있는 것으로 상상력을 살펴보았었다. 근대 초기 철학자들, 스피노자 등에게 상상력(imagnation)은 창의성(creation)과 관련성보다는 감각작용(이미지...

그리스 연극에 대한 관심 - 어떻게 공동체를 묶어낼 것인가? (또는 어떻게 사회를 보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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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년 사이에 쓴 글인 듯하다. 6월 19일 올린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고대 그리스의 연극, 공적 공간⟫ 부분 은 아래 글의 일부만을 떼다 놓은 것이다. ⟪뉴미디어 탐구⟫란 큰 제목으로 이리 저리을 끌쩍대면서 시간을 보내고, 이것 저것을 찾아보던 때이다. 따로 제목도 없다. 이 글을 쓰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첫 세 단락에 있다. 세번째 단락은 '박홍규,⟪플라톤다시보기❯, 필맥, 2009년, pp.129~130'을 보면서 갖게된 의문을 써놓은 것이다. 플라톤 다시보기 박홍규/필맥 시간이 되면 참고/인용된 책과 논문들에 대한 주석을 업데이트해 놓겠다. -------------------------- 연극관람 수당 30년 가까이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년 B.C.)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8개월이 지난 다음 해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부활한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결성해 50년 간 지속된 페르시아전쟁(499 ~ 449년 B.C.)에서 승리했을 때와 비교하면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이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됨으로써 참여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주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 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생각엔  ‘ 패전   후   해결할   다른   문제들도   많았을텐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아테네   민주정은   왜   연극관람   수당을   지급했을까 ?  그것이   그렇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