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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엽 _ 인간의 길 : The Path of The Human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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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08.23 옛 블로그(태터툴즈)에 게시했던 글을 웹 아카이브에서 복원한 것입니다.

황용엽은 193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강서보고 2학년 때인 1948년 9월 소비에트 학제에 따라 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해, 평양국립미술대학까지 진학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50년 12월 6.25전쟁에 따른 강제 징병을 피하려고 대동강을 건너 월남했다. 황용엽의 짓이겨지고, 꺽이고, 묶이고, 비틀려진 인간의 모습은 제국주의적 일본 치하, 사회주의 북한에서 보았던 기독교인에 대한 참혹한 학살과 그후 남한으로까지 이어지는 보복의 행로, 전장의 아수라장과 전쟁에 참여해 상이 군인으로 제대한, (갈 곳 없는 월남한 실향민인) 자신의 삶을 담고있다.



황용엽이 화가로서 이정표가 되는 그림은 1959년의 <여인, 위 그림>이다. 차가운 시선의 두 눈, 기형적이고 비틀어진 팔, 오랜 세월 버려져 두터운 먼지가 쌓은 집처럼 위태롭고 칼자욱 같이 날카롭게 뻗친 선들로 표현된 몸은 언제 흩터져 저 배경 속 물질세계로 딸려들어 갈지도 모르겠다. <마른 소년, 바로 아래 그림>에서 쇠처럼 녹이 슬어버린 듯한 소년과 세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어 보인다.(아래 '부분 확대' 그림을 볼 것) 밀려들어오는 쇠붙이로 된 세계의 흐름 속에 주체가 지워져버리는 듯 하다. 물질성 속에서 주체의 형상은 사라져버린다. 그가 마주한 세상은 그림처럼 두텁고 검붉다. 나이프로 짓이겨 쌓아올린 두터운 물감이 물질감을 강화시키고, 단순하고 두터운 색조는 (잭슨 폴락처럼 동적인 물질성과는) 다른 형태의 물질적 추상성을 끌어낸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운동이 아닌 침잠이거나 죽음이 아닐까!




<여인, 1959, 가장 위 그림>이나 <변질한 여인, 1960, 바로 아래 그림>에서 칙칙한 물감 더미 사이로 삐져나왔던 선명한 색채를 <마른 소년>에서는 찾을 수 없다. 생명 - 육체와 정신은 쇠붙이처럼 녹이 슬고, 고목처럼 말라버린 것일까! <변질한 여자,degenerated woman>에서 청동빛의 두터운 물감(물질) 위로 여인은 희미한 윤곽선과 함께 우중충한 삶을 뚫고 나올 듯한 원색의 빛을 내뿜고 있다. 하지만 녹슨 철/청동(금속)을 깨지못하고 <마른 소년>의 소년은 쇠처럼 굳어져 산화되어버린 걸까!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황용엽의 세상은 바뀐 듯하다. <인간, 1977, 바로 아래 그림>을 보면, 쇠붙이들 위로 나무들이, 잘 다듬어진 목재들이 자리를 잡는다. 짓이겨진 물감대신 선적인 붓터치가 모여 잘 정돈된 면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인간이 있다. 사람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 중이고, 그 사람을 여러 가닥의 줄들이 동여매고 있다. 종교적 아우라(aura)를 형상화한 둥그런 원, 삼각형으로 단순화된 인간(의 얼굴)은 기하학적이고, 따라서 정신성을 부각한다. 하지만 이제 구도의 시작인 뿐 인간은 여전히 닫힌 공간 속에 갇혀 있다. 황용엽은 인간은 본성상 악마적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하반신을 성스럽게 가렸지만 악마적인 눈빛을 내뿜고 있다. <인간, 1985, 아래 아래 그림>을 보라.




이런 부조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신/눈빛(얼굴 또는 안면)의 악마성과 육체의 신성성은 왜 대립하고 있을까? 그 부조화와 대립을 생산해내는 것은 기억인 듯 하다. 물감이 만들어내는 붓터치와 질감, 색깔은 안정화되어가는 육체/물질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그 위에 있는, 또는 그런 물질과 함께하는 정신은 과거를, 기억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감은 자연(나무)를 향하고 정신은 추상을 향해 나아간다. 물질세계가 계속 새로운 물질로 바뀌어가는 것처럼,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던 어린 육체도 바뀌었을 터이다. 하지만 지속되는 기억 속의 인간(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명료해진다. 명료성은 기학학으로 분명한 선들로 드러난다. 선들은 어린시절 그가 평양, 양부모 집안의 큰형이 경영하던 서점에서 보았던 로트렉이거나 후앙 미로일 수 있다. 성화된 육체는 60년대 비틀어지고 왜곡된 탈성화된 육체의 극복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 1978, 위 그림>을 보면 정신도 육체를 따라 평화에 접어든 듯 하지만, 그 보다 후에 그린 <인간, 1985, 위 위 그림>에서의 인간은 여전히 악마적/갈등적이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황용엽의 1978년(1970년대)의 그림에서 마주보고 대화하는 인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내 이웃을 용서하라"는 말씀에 따라 다른 사람(타자)에 대한 용서이거나 소통을 시작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들여다보고 있는 자기의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악마성(전쟁과 살육의 기억들과 같은)에 대해서는 용서/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1985년의 <인간>은 작가의 자화상이 된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표현은 철(금속)에서 나무로, 또 몸을 둘려싼 신화적(성스러운)인 천으로 감싸 안은 몸/육체로 변화한다. 자연은 바뀌어도 인간은 잘 바뀌지않는다. 아니 인간은 바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연/물질은 모든 것을 잊지만(기억 자체가 없고 물질적/물리학적 운동뿐이겠지만), 인간은 물질 세계가 만들어낸 사건들을 만나 그것을 기억을 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 기억 속에서 변화하는 세계를 넘어서는 주체/자아/정체성(identity), 또는 개체성을 획득한다. 기억을 가진 인간은 누층적이고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함께 의미를 가지고 존재한다. 기억을 못할지라도 우리의 현재 속에는 과거가 꿈틀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기운을 느끼는 감수성이 남다른 사람들, 또 충격적 사건에 휩말려 감당못할 의미(회의)의 폭풍 속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그 기억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



위에 있는 <인간, 1984>에서 작가의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다. 짓이기기(60년대)에서 섬세한 붓터치(70년대)로, 이번에는 붓을 뿌려 세계의 운동성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 운동은 구멍이 숭숭난 바위(현무암?)와 같다. 날까롭거나 모나지않고 둥글둥글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시멘트 같은 질감이다. 또 이 운동성은 바위 속에 새긴 정지된 운동성일 수도 있다. (부동의 동자인) 정신에 새겨진 영원한 운동말이다.
아래 1983년 그림에서 우린 나무도 갖게 된다. 갖는다기 보다 이 세계에 우리와 함께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떠난 곳을 언제나 가득 채우는 녹색의 생명(나무)조차도 쇠붙이에 눌려 인간처럼 일그러진 듯하다. 녹색의 산과 들, 대지와 바위 위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듯한 사람도 출현한다. 흰옷에 머리를 질끈 묶은 것으로 봐서 어린시절 보았던 고향의 농부일 수도 있다. 생명은 약동하고 세계와 인간이 함께 변한다. 그래도 앙상한 육체, 웃음이 얼굴에 깃들었어도, 마음이 즐거워도 과거는 우리 육체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체와 정신 사이 어디에서!



그때 황용엽은 평화를 되찾으려는 그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만났음에 틀림없다. (아래 그림을 보면) 그 만남은 엘 그레코의 그림처럼 보인다. 뻗어올라가 기둥과 높이 치켜든 두손, 회색빛 하늘에서! 아니면 프란시스 베이컨을 뒤틀린 육체, 척추가 없는 살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과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세계(다른 인간을 포함한)와의 불화를 넘어설 수는 없는 걸까! 억압된 것들의 회귀일까! 다시 한번 기억은 누층적이고, 기억은 물질로, 그림으로 물화된다. (힘든) 기억은 (억누르는, 또는 평화를 바라는) 정신을 뚫고 나와 이 세계 속에서 '즐거워하는' 황용엽의 육체를 통해 표현되고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기억은 과거 함께 현재, 그리고 미래와 맞닿아 있기에 항상 다른 얼굴일 수도 있다. 기억은 지속되면서도 항상 새로운 것이 된다.






위에 있는 <옛이야기, 1995>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화면 제일 위로 산과 같은 곡선이 어어진다. 십장생에 나오는 산 모양, 위 아래로 3개씩 있는 모로 서있는 사각형과 그 안의 무늬들, 그 사각형을 있고 있는 밤색의 선들은 좀 더 안정적이고, 한국적이다. 또 기형적이지만 나무들도 좀 더 자랐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뛰어간다. 누적된 기억 안에는 항상 고달프고 피하고 싶은 것들만 있는 것는 아니다. 그 기억의 더 아래쪽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쌓인(체험한) 즐거운 것도 있었을 것이다. 누적된 기억과 변화된 세계/현재가 만나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고, 기억은 새롭게 배치된다. 황용엽의 인생 여정을 볼 때, 인간에게 구원의 힌트는 과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날>에서는 좀 더 민화적이고 한국적인 산, 개나리꽃이 가득 핀듯한 들과 나무가 등장한다. <옛이야기, Old Story, 1995>에는 붉은 꽃이 피고 그 나무 위에서 새가 울고 있다. 옷감에 놓인 수처럼 꽃과 나무, 새는 좀 더 장식적이다. 대지는 푸르르고 원색의 생명들이 넘실댄다. 황용엽은 나이가 들면서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 자리한 '옛 이야기' 속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고향은 기억 속에만 있으며 지금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아래 <고향 가는 길, On the way to hometown, 1995>은 기억 속에서 신화화된 물질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불로초와 닭 등으로 표현되는 영험성 또는 문화적 기억으로서의 역사성, 작은 흰색 천조각을 걸친 신화화된 육체, 슬픔게 쳐다보는 커다란 외눈(왼쪽)의 사람은 지친듯 엉덩이를 대지 위에 두고 쉬고 있고, 다른 두 사람은 나무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한다. 휴식과 갈망, 두 그림이 하나의 액자 안에 그려져 있다.

항상 흘러가버리는, 변화하는 물질 세계 속에서 변화지않는 것, 무엇인 인간을 담으려고 하면서 황용엽의 그림은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흐르고, 인간을 포함한 사물들은 부자연스럽고 기형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동적인 세계를 정적인 그림 안으로 끌고들어오려는 시도는 언제나 기형적인 것은 아닌까! 현재의 재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형화되기 마련 아닐까! 기억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또 그 기억이 만든 정체성들이 그렇다면 ...... 우린 기억과 물질세계 사이 어디쯤에 서있어야 할까!



황용엽 인터뷰 - TV미술관, 1992.4.10 (KBS)
"사실은 이런 것이 하나의 괴로운 기록이죠. 그리고 일기라고 해서 그날그날의 사건을 말하는 일기가 아니고, 전체적인 묶음 말하자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주기적으로 변화해오는 크게 봤을 때의 일기지. 그저 남과 같이 일상생활에 대해서 평범한 이런 것만 가지고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건 아닌가?"

황용엽 인터뷰 - EBS미술관, 1993.9.19
"너무 어둡고 너무 처절하고 이런 것들이 지속하여 왔는데 최근에는 그런 것을 좀 멈추고 좀 더 새로운 좀 더 긍정적인 무언가 이제까지 살아온 것보다는 앞으로 사는 것이 짧지마는 어떤 환희 또는 내가 고향에 갈 수 있는 또는 고향에 가서 가족 혈족을 만날수 있는 이러한 것들을 ... 여러번 죽음 앞에 부딪히는 일이 있었고 또 상대를 제가 죽이지 않으면 제가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죽음의 고비랄까 극한상황 이런 것을 여러번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적 기억은 지속의 한 형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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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3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_황용엽, 인간의 길을 본 후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느낀, 그런 풍으로 스케치를 시도했다. 23일 시작해 30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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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후

이 글은 2014.11.26 옛 블로그(태터툴즈)에 게시했던 글을 웹 아카이브에서 복원한 것입니다.

2007년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을 쓴 후 한 일들은 넓게 보면 새로운게 없다.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이 가능하다는 주장에서 혼자는 어렵고 '어떤 연합'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그리고 우회적으로 이것에 가는 과정이었다. 회사를 다녔고 그 일을 했다.

그리고 2008~2009년 몇명의 대학원생들에게 뉴미디어론을 강의하며,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을 읽고,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생겨난 '효과들/사례들'을 주워 모으며 지냈다. 그러다 박홍규 교수의 <플라톤 다시보기>를 읽었다. 그책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후 아테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패전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됨으로써 참여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주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 다른 책에서 연극 축제(디오니소스제)를 위해 "아테네가 일년 간 해군을 유지하는 비용의 10분의 1에 달하는 돈"을 썼다는 글을 읽었다. 아테네는 당시 지중해에서 현재의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였고, 바다의 왕이니 당연히 해군이 강했다. 이후 왜 아테나는 연극에 이런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아테네의 연극과 BBC의 뉴미디어 전략 중 "정서적 연대감"을 위해, 젊은 세대를 위해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연결되었다. 또 2500여년 전의 그리스와 현재의 영국, 그리고 우리나라를 보면서,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미디어의 본질'은 무엇일까? 본질이 형이상학적 용어라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효과'가 무엇일까? 뉴미디어에 의해 우리가 보고 겪는 일들 자체가 '하나의 효과'인데, 이런 것들, 새롭게 겪는 놀라운 사례들을 '주워 모으는 일'은 잊고 다른 관심 속으로 빠져들었다. 역사 속에 있던 미디어, 또는 인간(사회, 또는 공동체)에게 미디어는 어떻게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이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려(또는 두려움)'가 있었고, 또 그 세계가 걱정하는 것처럼 아주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했다. 생각지못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앉아서 당하지않을 만큼 현명하기 때문이다.

BBC가 던졌던 젊은 세대와 정서적 연대감은 '산업'이나 돈으로 측정되는 '경제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 전략이 <미디어2.0>에서 봤던 돈을 위한 것도 아닌듯 하다. BBC 덕분에 내전 속에 살았던 영국의 16세기 철학자들이 직면했던 문제,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가 만들어낸 '인간학(인간이란 무엇인가?)'과 그들이 생각한 감정(정서)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부딪쳤던 문제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인쇄술-책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였다.

푸코의 1976년 강의를 묶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푸코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때 일군의 철학자들은 사회 구성하는 원리를 다시 만들려고 노력한다. 신이 아닌 인간 자체, 그 본질 속에서 신화적으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구체적으로는 영국 내전과 종교전쟁의 원인을 찾는다. 이들은 왜 그랬을까? 거칠게 말하면 '국가/공동체(commonwealth)'를 '보호/보전'하기 위해서인듯 하다. 새로운 기준(rule)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났다. 구술에서 문자로의 전환이 있었다. 해블록의 <플라톤 서설 - 구송에서 기록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디어 혁명>이 그런 내용이다. 이책 덕분에 철인왕의 전제와 시인을 추방하자는 플라톤의 과격한 책, <국가>를 읽었다.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현재 겪고 있는 일들을 과거에도 겪었고, 이런 문제와 철학자들은 대결을 하지않았나하는 가설이 마음 속에 움텄고, 6~7년간 읽은 책 대부분은 이런 가설에 끼워마추기에 적당한 구절들을 찾는 것이었다. 현재의 사례 이전에 역사적 사례와 이에 대한 이론적 대응, 그 속에서 공동체의 바탕을 만드는, 공감의 산출이 미디어가 아닌가 생각했다. 부정적으로 보면 사회적 시멘트가 되는 이데올로기. 하지만 그것이, 그런 환상과 신화가 없다면 이 공동체가 존재하겠는가!


2014.2.6일에 쓰던 글이다. 콘텐츠연합플랫폼에서 스마트미디어렙으로 옮겨가기 직전 '왜 일을 하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질문하며. 답이야 있겠는가! 모르는 것에 침묵하며 삶이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수 밖에 ...

SBS 유튜브 한국 서비스를 차단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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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일 미디어리더스포럼이 주최하고 (사)미디어미래연구소가 주관하는 ‘2014 미디어리더스 국제포럼’ 2부 토론에서 발표를 위해 쓴 글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토론은 토론이 아니다. 그래도 항상 약정 토론문을 준비한다. 투명하게 의견을 말한다기보다는 예절바르고 공손하게 이야기하고 일어서야 한다. 그때 작성했던 토론문을 올린다. 물론 작성한 토론문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조선일보 포럼 소개 기사: 미디어미래연구소, 2014 미디어리더스국제포럼 개최 


미디어 비즈니스 패러다임의 변화 (약정토론 발제문)

박종진 스마트미디어렙(주) 대표이사, 2014.10.26.

1. 발표문 요약

우리는 현재 인터넷, 디지털 기술에 의해 미디어산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는 것 같다.
1) PC, 태블릿, 모바일 및 스마트TV 등에 의한 OTT 서비스의 활성화
- 최근에는 모바일 퍼스트 
2) 이에 따른 플랫폼, 시장의 파편화
- N-screen, 모든 서비스 사업자가 자신이 플랫폼이라고 주장
- narrowcasting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용자 행태가 변화고 새로운 콘텐츠의 출현
- 소셜 미디어, 큐레이션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사실(fact) 기술이고, 다른 측면의 접근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사실 이외의 다른 영역(가치)에도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이다.

2. 미디어란 무엇인가? (사회적 효과)

이런 변화들은 아주 중요한데, 그 중요성은 사업(비즈니스)적인 것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미디어(media)는 세계와 인간, 인간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말 그대로의 매체(media)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디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다. 어떤 본질에 대한 질문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역할 또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효과에 대한 질문이다. 

2010년부터 구글, 트위터, 아이폰, 페이스북 등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고 있는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시라아, 예멘 등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란(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약 4년정도가 지난 지금 혁명의 결과로 시민들이 원하던 자유를 얻었는가라고 질문하면 대다수가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3. 정보의 이동과 인쇄술 (독일의 경우)

같은 일이 1517년 인쇄술에 의해 독일에서, 유럽 대륙 전체에서 일어났었다. 루터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박문은 비텐베르크 대성당 문에 걸린 후 엄청남 속도로 독일과 유럽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2주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졌고, 2달 후에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활자 인쇄가 초래한 예상치 못한 수많은 결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내셔널리즘’이 등장했다. 매클루언은 내셔널리즘이 인쇄에 의해 정보 이동의 속도가 빨라진 결과라고 지적한다. “내셔널리즘 자체는 집단의 운명과 지위에 관한 강렬하고도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로서 출현했고, 인쇄가 등장하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정보 이동의 속도라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터넷, 스마트폰 등에 의한 정보의 이동속도, 이것은 아니다. 그 후에 독일에서,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300년 넘는 기간 동안 내전과 국제전이 일어났다. 독일을 예로 들면 루터는 ‘거의 머릿수만큼 종파가 있다’고 한탄한다. 30년간의 종교전쟁 결과 주권을 가진 300여 개의 영방국가들로 독일은 쪼게져 버렸다. 이런 분열 상태는 1871년 프로이센이 보불전쟁에 승리해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200년 넘게 계속된다. 헤겔은 ⟪독일 헌법론⟫에서 이런 상황을 한탄한다. “독일은 이미 국가가 아니다. …… 종교는 그 자신이 분화하는 데서 자기를 국가로부터 분리해 내는 대신, 오히려 분화함으로써 국가 속으로 들어가 국가를 폐기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나아가 헌법 속으로 자기를 끼워 넣어 국법의 조건으로 되었다.”

4. 정서적 연대감 (인쇄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장르, 소설)

미시사가인 린 헌트는 <인권의 발명>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보고있던 서로 다른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현대적인 인권 등의 개념은 만든 것 또한 인쇄술을 이용한 ‘소설’이라고 말한다. 인쇄는 종교적 주장을 전파하기도 했지만, 동일한 이야기(story)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매체의 역사 속에서 우린 사상적(종교적, 표현의) 자유의 추구와 보편적(신화적) 공동체의 형성, narrowcast와 broadcast 등의 길항관계를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가치들, 사회적 역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적 ‘관용’이 필요하다. 특히 경쟁적 자본주의 내에서 서로 다른 산업을 배경으로 갖는 사람(특히 칼뱅적 태도의 IT인들, 기술 주도성을 주장하는 IT인들)에게도 필요하다. 

우리는 IT기술이 만들어난 재스민혁명의 가능성을 보면서도, 인터넷 또는 뉴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또는 다양성의 공동된 근거가 될 ‘인간성’ 또는 ‘공동체’를 지켜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런데 ‘공통된 감정(common sense)’는 narrow한 미디어를 통해서는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인간성’ 또는 ‘공동체’의 바탕은 하나의 이야기(story)에서 출발하는 ‘정서적 연대감(emotional connectivity)’이다. IS(Islamic State)와 같은 도덕적, 종교적 신조(dogma)가 아닌, 같은 사물, 사람들의 상태를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유교에서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이라고 말하는 ‘측은지심’이 이것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6월 SBS가 방송한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같은 프로그램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의 사회적 역할, 본질을 이것이라 생각한다.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의 기반, 공감 또는 정서적 연대감을 만드는 것이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story)를 보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은 모두가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해야한다. (전통미디어 입장에서 소셜미디어는 이런 확인의 과정 중에 배치된다.) 

5. 우리가 해오던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 (전통미디어의 뉴미디어전략)

인터넷, 또는 뉴미디어에 의해 그 이야기를 듣고, 보는 방식이 바뀌었지만, 사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TV Everywhere’이나, 전통매체(traditional media)들의 뉴미디어전략이 서있는 바탕이 이곳이다. 하지만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산업은 미디어산업과 다른 역사성을 가지고, 미디어산업으로 들어왔다. 미디어산업은 이들을 만나면서 좀 더 냉혹한 비즈니스 경쟁 속에 빨려든 것이다. 이 새로운 경쟁의 방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가 <역사의 연구>에서 한 말처럼,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 이해의 패러다임을 오늘 이야기하는 <미디어 비즈니스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용할 수 있다면 인터넷, 스마트미디어 등으로 표현되는 뉴미디어의 도전에 대한 전통미디어의 응전을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SBS는 2010년, 아마 TV 방송사 중 최초로 유튜브에 입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11월 중 다시 처음으로 SBS 방송물을 한국에서 서비스되지않도록 ‘IP차단’하고, 흩어졌던(파편화된) 시장을 모으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이미 2012년 pooq(푹) 서비스를 통해, 모바일과 PC에서 국내 full-VOD 시장을 모았고, 이번에는 clip-VOD를 중심으로 시작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국내 유튜브와의 관계를 바꾸려는 것은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global하지않고 local하다는, 즉 어떤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그 안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문화적 세계는 표준화할 수 없는 독특한 곳이다. 
(첨언하자면 나는 비즈니스 세계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서울경제신문 관련기사 : 유튜브로 국내방송 못 본다 (2014.11.24일 기사)






우리는 미디어의 본질에 주목하며, 기술 또는 콘텐츠는 그것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또한 세상에는 많은 플레이어가 있기에, 항상 그들 사이의 역관계에 의해 생각지도 못한 세상이 만들어지기에 더욱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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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경험’에서 매체로, 그리고 매체에서 ‘몸-효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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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스마트폰 동영상 이용 시 멀티태스킹에 관한 연구(임소혜)>에 대한 비평문이다. 임교수는 2013.4.26일 [스마트 미디어 시대의 멀티스크린과 멀티태스킹]이란 주제로 열린 한국언론정보학회 세미나에서 연구 내용을 발표했고, 이때 토론을 위해 이글을 썼다.




1.

스마트폰 또는 뉴미디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 ‘멀티태스킹’이란 (기계적인) 개념 대신에 ‘연속(sequence)’ 또는 ‘흐름(flow)’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지 제안하고 싶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1974년 <텔레비전론 -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 (Television: Technology and Cultural Form)>(현대미학사, 1996)에서 “방송 프로그램이 갖는 관심이나 범주의 배분” 즉 ‘편성’에 대한 분석은 “추상적이거나 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모든 발달된 형태의 방송시스템이 갖는 특정한 구조와 그에 따른 특정한 경험은, 다름 아닌 연속 또는 흐름”이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시간적 단위의 편성표를 보고 해당 시간에 TV를 켜는데 익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지하게 눈을 돌려보면, 우리가 방송을 경험하는 일상적인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을 본다’, 또는 ‘라디오를 듣는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가 개별적인 특정 프로그램의 경험만을 언급하는 것일까? 아니, 우리는 개별 프로그램 이상의 전체적인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강조는 필자) 

하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연속’ 또는 ‘흐름’이란 개념은 윌리엄스가 사용했던 개념과는 다르다. 다만 우리는 뉴미디어뿐만이 아닌 모든 미디어에 대한 전체적인 경험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는 측면이 강하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매체(media)가 아닌 신체에 의한 미디어 경험의 ‘연속’ 또는 신체의 ‘흐름’에 따라 선택되는/만나는/마주치는 매체(media)를 생각할 수 있다. 


2.

발표자는 연구 결과에서 “대중교통 이용은 가장 흔한 형태의 다중 행위 멀티태스킹”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유컨데 우리가 데카르트적인 회의를 한다면, 아무런 의미/근거가 없어보일 수 있다. 우리에게 제시된 ‘멀티태스킹’이란 개념은 너무 취약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항상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이 없어도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스마트폰을 통해 동영상을 본다’가 멀티태스킹이라면 ‘지하철을 타고 (나의 두 눈으로) 앞사람의 얼굴을 (적극적 의도/관심을 갖고) 유심히 본다’거나 또는 ‘지하철을 타고 신문/책을 본다’도 멀티태스킹이다. 

연구결과에서 “SNS와 대인 커뮤니케이션(채팅, 이메일 등)은 가장 흔한 형태의 cross- & within- media multitasking”이라고 밝히고 있다. 멀티태스킹의 사전적 의미는 “한 사람의 사용자가 한 대의 컴퓨터로 2가지 이상의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거나, 2가지 이상의 프로그램들을 동시에 실행시키는 것”(두산백과, http://goo.gl/aXdiU), 또는 “하나의 컴퓨터에서 복수의 작업(task)을 동시에 수행하는 운영체계(OS) 기능을 갖춘 조작 형태”(IT용어사전, http://goo.gl/CdfPr)이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는 연구에 참여한 270명의 학부생들 대부분이 보통 사람과 달리 매우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지닌 사람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두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학부생들의 대부분이 매우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지니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학부생들이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본다’가 아닌, ‘텔레비전을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학부생들은 컴퓨터처럼 멀티태스킹을 하지 못하지만 ‘멀티태스킹 한다’라고 생각하고, 일상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점에선 우리도 학부생들과 똑같을 것이다.) 우리가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가졌다는 것과 그것을 가진 사람이 멀태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것, 또는 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은 모르는 것은 아닌가? 

과거 우리에게 TASK(작업)은 어떤 의도/목적을 가지고 방송에서의 프로그램 편성처럼 계획된 일정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SNS, 이메일, 채팅, 동영상 시청 등은 “가장 흔한 형태의 다중행위 멀티태스킹(대중교통 이용)” 환경에서 불가능했다. 이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또는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비교해서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않은 것이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다시 멀티태스킹에 대한 사전적 정의 속에 해답이 있는 듯하다. “시분할 다중 작업에서는 각 프로그램이 1초의 수분의 1정도씩 CPU의 처리 시간을 할당받는다. 컴퓨터의 처리 시간은 사람의 감각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사용자에게는 복수의 작업이 동시에 처리되는 것처럼 보인다.”(IT용어사전) 하지만 “멀티태스킹은 대형 컴퓨터에서 여러 명의 사용자가 단말기를 통해 시분할시스템으로 동시에 작업을 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두산백과) 

다시 스마트폰을 가지고 지하철을 탄 학부생 A를 관찰해보자. A는 어제 방송한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본다. 그때 여자/남자 친구에게 ‘주말에 영화를 보자’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온다. 메시지를 터치해 카카오톡을 띄우고 답을 한 후 다시 VOD 본다. 우리는 학부생 A가 과거와 비교해서 훨씬 빠르게 작업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기에 복수의 작업이 동시에 처리되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봐야 옳을까, 정말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 집중해 보면서, 또 어떤 영화를 보자는 생각까지 더 해 메시지에 대한 답을 동시에 쓴다고 봐야 옳을까?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다시 방송 편성에서 항상 있는 상이한 장르의 ‘끼어들기(interruption)’-이것의 극단적 예는 중간광고이다-를 ‘침해’라는 것보다는 “이런 과정의 본질을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이 맞다/났다고 제안한다. 이런 제안을 제기하는 태도/방법론이 텔레비전이란 하나의 매체가 아닌 다양한 매체가 존재하는 현재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까닭은 이런 매체들이 이전처럼 (상대적이지만) 독립적이지 않고 우리 신체를 중심으로 융합적(또는 맥락적)이기 때문이다. 

윌리엄스식으로 보면 A는 친구의 메시지 때문에 ‘끼어들기/침해’를 당했지만 침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몸이 생각’을 하듯이 먼저 검지 손가락이 메시지 위로 갔을 것이다. 그후 학교에 도착할 때쯤 드라마가 끝나고 오늘 밤 어떤 내용이 전개될까 궁금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학부생들은 A는 어제 밤 집에서 같은 드라마를 보다 전화가 와서 TV시청과 전화통화를 동시에 한 그의 어머니보다 더 잘 멀티태스킹을 했다/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A의 어머니는 남편의 갑작스런 전화에 중요한 장면/대사를 놓쳤다고 짜증/화가 났었기 때문이다. A의 어머니의 짜증/화는 ‘과업 수행(task performance)에 대한 주의력 분산과 인지능력저하’를 의미한다면, A의 만족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A의 어머니와 달리 A는 ‘매우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가졌던 것일까, 아니면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았지만 한 것처럼 생각했기/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한 후에 연구를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자문해 본다.

이런 측면은 연구자도 연구의 한계와 향후 과제를 제시하면서 “멀티태스킹 개념화의 엄밀성”에 대해 논의했다는 점에서 알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연구는 “스마트폰 동영상 이용시 멀티태스킹에 관한 연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컴퓨터처럼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도록 진화하지 못했는데, 혹시 스마트폰을 든 인간이 마치 컴퓨터인듯 생각하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인지적 효과 이전에 인지적 능력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멀티태스킹한 기능을 가진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도 멀티태스킹한다라는 것은 ‘부당 전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논의를 위해서 ‘멀티태스킹’이란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하고, 그것을 학문적 용어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컴퓨터 공학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발표자의 연구결과에 대한 비판적 태도라기 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학문적 엄밀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3.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텔레비전론> 마지막 부분에서 매클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 또는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테제에 대해, 테크놀로지/미디어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한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기술결정론에 대한 우려이다. 기술이 어떤 사회적 맥락이 있는지, 누구가 왜/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전체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윌리엄스가 학문공동체에서 사용되는 매클루언 자신이 아닌 매클루언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흐름/연속 속에서 전체적 경험에 대한 강조나 미디어를 ‘인간 신체의 확장’으로 보고 접근한다는 점에서 둘의 유사성을 더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맞다면 전체적 접근은 개별 학제간의 공동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를 들어 감각 추구 성향(sensation seeking)의 문제는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특정 미디어(예를 들어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MMORPG))의 이용이 고감각 추구 이용자(high sensation seekers, HSS)를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인간이 컴퓨터와 같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하지를 규명하는 것도 마찮가지인듯 하다. 이런 것은 뇌과학과 연계된 실증적 연구/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른 분과학문들과의 협업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좋은 발표에 감사를 드린다. 끝. 

참고 

1. 필자는 일반적인 인간이 멀티태스킹의 능력을 아주 쉽게 획득할 수 있다고 믿지않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2. '몸-경험'에 대한 배경 글은 ⟨connected-TV,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질문⟩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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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에서 발표문을 읽거나 배포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청중을 두고하는 공개적인 세미나는 세미나가 아니다. 발표문을 내용을 '대충' 이야기하고 아래와 같은 내용이 추가로 보충되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OTT 현황과 전망>을 발표한 최형욱 퓨쳐디자이너스 대표가 말한 '사람 중심으로 변하는 시간과 공간 구조'라는 개념의 필요성에 동의한다.

멀티스크린은 환경이고, 이에 대한 이용(usage)이 있다. 이용은 시분할적 이용(sequential usage)와 동시적 이용(simmultaneous usage)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동시적 이용은 멀티 태스킹(multi-tasking)과 보조적 이용(complementay usage)로 나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멀티 태스킹은 동시에 수행하는 '2개 이상의 일이 관련없는 활동(unrelated activity)이라고 하자. 이때는 임교수의 연구 내용에 있는 것처럼 주의력이 분산되고, 인지능력이 저하된다. 하지만 보조적 이용은 '2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일어나지만 관련이 있는 활동(related activity)'이다. 이때는 멀티미디어(multimedia) 교육에서처럼 동시적 사용이 인지력 저하나 주의력 분산과 관계하지 않는다. 보조적 이용은 방송 등에서 '긍정적인' 세컨드 스크린(second screen)' 이슈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는 멀티스크린환경에서 멀티태스킹을 논의할 때 정교한 개념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관련기사 : 멀티태스킹은 능력? 뇌에 과부하 걸린다이글과 관련된 내용을 최근(2019.6.27일)

⟨인터넷과 TV의 연결/배치에 관하여 (미디어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란 제목으로 포스팅하였다.



http://www.dckorea.co.kr/tc/archive/201306#entry_267

플랫폼 제국들을 가로지르는 유목적 삶에 대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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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2년 5월말에서 6월초에 썼다. 함께 동호회(?) 활동을 하는 분들끼리 모여 플랫폼 관련 책을 내자고하여 차일피일 미루다 쓰게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투'(경어체)가 전체 쓰여진 글과 같지 않다고 퇴짜를 맞아고, 어투를 고친 후에는 원고가 너무 늦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때 엮여서 나온 책이 <플랫폼을 말하다>이다. 나는 이책 제일 뒤에 운영위원의 한명으로 이름만 올렸다. 

지금 살펴보니 아래 글과 그책의 편집방향이 많이 달라보인다. 우리 이야기는 최신의 것도, 또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내용도 아닌듯하다.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old'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도 '노구'를 이끌고 분투하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어렵게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글을 쓸 때가 pooq 서비스(www.pooq.co.kr)를 만들고 있을 때니 10개월이 가까이 되었다. 우린 여전히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길을 가고 있다. 

글의 제목과 달리 우린 빠른 기동력을 무기로 한 몽골의 기마병이 아닌듯 하다. 전쟁터에 내몰린 농사꾼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만난 우리는 말 잘타는 유목민이 되었으면하고 꿈을 꾼다.

어투를 바꾸며 추가된 내용들이 있다. 제일 마지막 <콘텐츠 연합 플랫폼>에서만 바뀐 내용 중 일부를 more/less 버튼으로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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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전략 

- 플랫폼 제국들을 가로지르는 유목적 삶에 대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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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2005년부터 진행된 SBS의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전략”이 변화된 뉴미디어 환경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산물이었다면, 현재 진행 중인 “콘텐츠 연합 플랫폼”은 이를 실천하면서 얻은 경험적 교훈의 결과입니다.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2005, 2006년 SBSi에서 뉴미디어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이하 ‘미디어2.0’이라고 함)이라는 아주 재미없는 책을 썼습니다. “SBS 디지털 콘텐츠 전략”에 관한 책이지만 지금의 주제인 플랫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책에서는 ‘플랫폼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먼저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OSP, Online Service Provider)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뉴스 콘텐츠 유통 플랫폼이 된 포털, 디지털 포획물들의 저장고인 블로그나 카페, 가장 일반화된 디지털 멀티미디어 콘텐츠 유통양식인 팟캐스팅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는 동영상 플랫폼, 웹TV, 인터넷TV란 이름으로 곰 TV, 판도라TV, 엠엔캐스트(www.mncast.com), 다모임 (www.damoim.net) 등이 연일 화제였습니다. 2006. 12월 타임(Time)이 ‘올해 최고의 발명품’으로 유튜브를 선정했을 때, 저는 유튜브와 동영상 플랫폼들을 보며 ‘혼자 살아남기 어려운 최고의 발명품’으로 인수나 합병 이외에 ‘독자적 생존 모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썼습니다. 왜냐하면 키치문화와 B급 콘텐츠로서 한계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술주의와 시장주의로 무장한 통신 사업자들, 구체적으로는 IPTV 사업자들이 미디어 세계에 들어와 일을 막 시작하고 있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KT가 올리브나인, 싸이더스FNH의 지분을 인수하고 영화와 드라마 펀드를 만들고 영화배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SKT도 IHQ, YTN미디어, 서울음반의 지분을 인수하고 음악과 영상펀드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통신사들은 미디어사로 변신을 하지 못하고 흉내를 내고 있다. 전통 미디어의 기반이 산업적이기 전에 문화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콘텐츠산업을 돈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이런 시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키 마우스가 된 스티브 잡스와 팟캐스팅’이란 제목으로 가전사들의 ‘기기+콘텐츠’ 또는 ‘기기-미디어 되기’ 현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디지털 기기와 관련된 전체적인 흐름의 배경에는 콘텐츠의 유통구조가 다양화되면서 이용자와 직접 접촉하는 기기를 장악하는 것이 미래에는 PC에서 OS(operating system)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 또는 유틸리티 컴퓨팅(Utility Computing)에 의해 네트워크가 지능화되면 사람들은 디지털 장신구이거나 디지털 가구인 휴대폰이나 스마트TV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와 콘텐츠에 더욱 관심을 집중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가 콘텐츠 유통에 있어서 전국적인 극장 체인, 방송사, 통신사, 월마트나 테스코 같은 대규모 유통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에 콘텐츠가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디지털 세계가 되면서 처음으로 콘텐츠가 방송, 통신, 웹, 기기 등의 다른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플랫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고 이 영역이 디지털 콘텐츠 자체가 곧 바로 플랫폼이 될 수 있는 ‘Digital Content = Platform’ 영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전제는 웹과 같이 개방된 플랫폼, 개방된 통신망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디지털 콘텐츠를 어떤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든, 통신사업자든, 가전 기기든 상관없이 무엇을 통해서도 볼 수 있어야만 이런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지털 콘텐츠가 스스로 플랫폼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전의 콘텐츠들이 가지고 있던 형식들, 물질적이고 장인적이며 연속적인 아날로그적 속성과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틀에서 벗어나 콘텐츠가 디지털화되면서 하나의 ‘수학적 알고리즘 덩어리-흐름’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

⟪미디어2.0⟫은 뉴미디어 환경에서 전략적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통신사, 가전사, 그리고 포털과 같은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들 사이에서 전통 미디어 사업자, 즉 콘텐츠 제작자의 입장도 있음을 주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 했던 대부분은 맞았지만 제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틀린 것 같습니다. 콘텐츠 사업자의 미래, SBS의 전략에 대한 부분입니다.


SBS,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전략의 성과와 한계

"SBSi의 미래: 3가지 길(위 장표)"은 책을 쓰기 바로 전 해인 2006. 11월 ⟨대한민국 동영상 컨퍼런스⟩에서 발표했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인터넷 기반 기술회사가 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겨우 인터넷 기반 뉴미디어 회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책에서는 당연히 될 수 있다고 주장을 했겠죠.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SBSi는 2009. 9월 유통 계열사와 합쳐져 SBS콘텐츠허브가 되었고, 그때부터 기술회사라기보다는 더욱 콘텐츠 유통회사의 성격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이런 일 이전에 변화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우리 스스로 그런 선택을 안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핵심역량의 부족이 맞을 수도 있는데, 그것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하려는 의지가 부족했고, 따라서 진화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르그송(Henri -Louis Bergson)의 말에 따르자면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진화도 없습니다.

“통신-방송되기는 쉽게 통신사의 DNA 일부가 바뀌어 새로운 형질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통신사업자들이 스스로 방송과 콘텐츠 산업의 ‘신체나 행동의 코드를 읽어내고 그것을 이용해 그것과 섞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보다는 손쉽게 이미지를 사들이고 있는 현상을 흉내라고 부른다.” ⟪미디어2.0⟫에서 통신사들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딱 저희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하는 척’은 하면서 진짜 실행을 못했고, 변하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하는 척’의 전위였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이것을 멋있게 ‘도상훈련’만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좀 더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았습니다. 책에서는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전략 모델⟩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 유통시장이 커질수록 양질의 콘텐츠를 대량으로 제작해내는 기업의 경우 인터넷 플랫폼의 특성을 이용하여 이용자에게 직접 판매하거나 플랫폼 기업과 직접 거래가 시작되기 때문에 에이전트(agent)의 필요성이 낮아지고 스스로 콘텐츠 애그리게이터(content ag-gregator)가 된다. 애그리게이터 모델의 핵심은 이에 대한 대규모의 투자나 기술적 능력보다도 콘텐츠의 집적과 집중을 통해 단기간 내에 규모의 경제(economics of scale)의 달성이다. 따라서 방송 콘텐츠를 웹에서 서비스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SBSi와 같은 회사는 사업적 기반이 확장되면서 통신사와 같은 자본, 기술 중심의 회사나 국내 최고 규모의 영화제작사보다도 더 쉽고 자연스럽게 애그리게이터 모델로 경쟁력을 가지고 진화해 나갈 수 있다. 이런 효율성과 규모의 경제는 영화, 음악, 해외드라마, 케이블 방송 등 다른 콘텐츠까지 확대할 수 있는 서비스 구조, 즉 범위의 경제(economics of scope)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항상 통제가 안 되는 변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콘텐츠연합플랫폼을 하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통제안되는 것을 통제하려는 발버둥보다 실력을 올리는 것이 더 나아보입니다. 실력이 올라가는 것이 통제력을 강화하는 지름길이니까요. 하지만 항상 격정에 휩싸입니다. 이러저러한 것(타사와의 계약 등등)을 막아야 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대로 안되어도 '아 우리의 실력이 이정도구나'가 타인을 미워하는 것보다 났습니다.)


2005, 2006년은 우리나라에서 웹하드와 IPTV가 막 시작될 때입니다. 이것은 콘텐츠의 집적과 집중이 단기간 내에 방송사의 사이트(www.sbs.co.kr)에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 그 시점은 국내에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한류의 확산으로 해외시장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굳이 전략이 없더라도 시장의 트랜드만을 따라가도 성장이 보장되는 시기를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웹하드와 동영상 포털들에 의해 SBS사이트의 성장 가능성, 규모의 경제에 다다를 수 있는 잠재역량은 갉아먹히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술회사로, 자체적인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회사로 가기 위해 필요한 내적 역량들이 비용(cost)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자기 방어적 망상일까요? 이렇게 피하고 싶어했던 길로 자기도 모르게 들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신사의 IPTV와 모바일 서비스(June이나 Fimm)에서 빠르게 콘텐츠가 집중, 집적되었고, PC 웹에서는 무섭게 번져나간 웹하드에서 모든 종류의 디지털 콘텐츠가 ‘근(종량제)’으로 팔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웹하드에 대한 법적 대응과 함께 합법적 유통을 시작하기 바로 전인2009. 8월에 지상파 및 관련사가 모여 콘팅(www.conting.co.kr) 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 콘팅은 한국판 훌루모델을 만들기 위해 시작했는데 용두사미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미국과 다른 한국 방송사들의 뉴미디어 경험과 역사가 있습니다. 콘팅의 성과는 지상파 콘텐츠 다운로드 판매 매출 비중이 가장 크다는 계량적 지표보다도 지상파 콘텐츠의 다운로드 서비스 가격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콘팅을 준비하면서 지상파 온라인 서비스를 표준화하여 API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웹하드를 합법화는 방안과 N스크린 서비스를 만드는 것도 이야기되었지만 아직 때가 이른 것이었습니다. 



통신사와 웹하드 등으로 콘텐츠가 집중되고, SBS 콘텐츠의 외부유통이 확대되었습니다. SBS 자체적으로 규모의 경제나 범위의 경제에 도달하고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 좀 더 어렵게 되어갔습니다. SBS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여럿 중 하나(one of them)’일 뿐이었습니다. 서비스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부터 지상파 콘텐츠들을 상호 개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상파 연합 컨넥티드-TV 플랫폼>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고, 2010년 SBS TV포털 전략을 수행하면서 지상파 공동으로 IPTV 표준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폐쇄적인 IPTV와 SBS 웹서비스 시스템을 결합시켜 반-개방 플랫폼(Semi-Open Platform)을 만들기 위해 방송협회 내에 "TV포털 분과"를 설치했습니다.





콘텐츠 연합 플랫폼 


⟪미디어2.0⟫에서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을 만들고 모든 콘텐츠에 대한 애그리게이터, 디스트리뷰터가 되겠다는 이야기는 ‘수사적’ 희망이었습니다. SBS 콘텐츠를 뉴미디어 환경에서 직접 서비스 하겠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렇게 된 후라면 그런 희망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겠지요.

지금 보면 통신사, 포털 등과의 관계에서 ‘플랫폼 인 플랫폼(Platform In Platform)’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타 플랫폼과 협력, 활용하여 그것과 SBS 사이트의 웹 자원을 통합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런 목표가 구체화된 것이 “SBS TV포털 전략”입니다. 이 전략의 특별한 점은 특정 회사에 서비스나 가전 기기에 한정되지 않고 사용자 입장에서 서비스를 합쳐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한번 결제로 모든 플랫폼에서 사용(One Pay, Multi Device & Platform)’하도록 하는데 그 중간의 환전소, 사용자에 대한 인증기관 역할을 해보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사업자와 플랫폼은 달라도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하지만 혼자서 통신사와 힘을 겨루는 것은 힘들었고,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지상파 TV포털 표준 애플리케이션⟩입니다. 

플랫폼이 꼭 물리적인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용자든, 파트너든 우리가 만든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플랫폼의 힘은 전투의 규칙과 그곳에 주거하는 시민들이 따를 법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저희는 콘텐츠 리더십(contents leader-ship)이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희 입장에서는 콘텐츠가 여러 강력한 제국들로 이루어진 플랫폼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사용자 환경에서 플랫폼들은 파편화되었고, 이런 것이 더욱 심화될 것 같습니다. 인터넷은 망 중립성 논의를 볼 때 더 이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 플랫폼으로 파편화되고, 네트워크의 개방성이 제한되려는 상황에서 통신사나 포털, 가전사가 아닌 콘텐츠 사업자에게는 이것을 파편화와 폐쇄를 막으려는 단일한 전략적인 목표 하에서 체결된 계약들이 아주 중요한 플랫폼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전략은 콘텐츠 시장, 뉴미디어 서비스에서의 거버넌스(governance)를 가지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답변 이니까요.



--- 참고---

NHN에서 N스토어를 준비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N스토어는 PC, 스마트폰에서 네이버 (www.naver.com) 회원이 전자책, 음악, 동영상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그분이 저희 이야기를 듣더니 ‘제휴가 되면 (네이버에서 지상파 콘텐츠를 사용하던) 네이버 회원도 연합플랫폼의 사이트인 POOQ(www.pooq.co.kr)에 로그인하여 똑 같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겠군요. N스크린 서비스만이 아닌 N스크린의 모든 윈도우 통합까지 하려는 것이군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윈도우 통합’이 무엇인지를 몰랐지만 이런 것이 콘텐츠 연합 플랫폼의 목표입니다. 또한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의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 참고 끝 ---

콘텐츠들이 사용자들과 함께 플랫폼의 제국들을 가로지는 자유로운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이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하지만 저희 경험에 따르면 여러 제국들을 혼자 가로지르는 것은 위험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여행을 위해2010년 말부터 지상파 방송사들이 모여 콘텐츠 연합 플랫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최근 SBS는 MBC와 함께 ⟨콘텐츠연합플랫폼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미 충분한 도상훈련을 했습니다. 시작은 작지만 생각은 크고 움직임은 빠르게(Start Small, Think Big, Move Fast)! “콘텐츠 연합 플랫폼”의 지침입니다. 저희는 타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 독자 플랫폼을 구축 것, 또 연합하는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전략적 목표는 제국의 병사들이 쌓은 성를 가로질러 초원을 마음껏 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SBS는 이 길을 함께 갈 MBC란 ‘좋은 친구’를 만난 것입니다. 여행 동안 더 많은 새로운 친구를 만날 꿈으로 벌써 마음이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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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을 말하다 V 1.5 
플랫폼전문가그룹 지음/클라우드북스



http://dckorea.co.kr/tc/archive/20130224#entry_266

방송통신 융합시대의 공정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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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3.02.23 옛 블로그(태터툴즈)에 게시했던 글을 웹 아카이브에서 복원한 것입니다.

이글은 함께 콘텐츠연합플랫폼(주)에서 일하시는 분이 <방송문화>에 기고한 글의 초고이다. dckorea.co.kr에서 처음으로 다른 분의 글을 올린다. 이글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김혁이사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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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문화 [방송가 정책]
방송통신 융합시대의 공정거래 (SBS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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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방송사들이 함께 N스크린 플랫폼 푹(POOQ)을 만들어 서비스 확산에 노력 중이다. 그 동안 자신의 플랫폼이 워낙 확고한 위치 우위에 있어서, 외부 플랫폼에 대해서는 보조적 차원에서 콘텐츠를 제공하고 대충 정한 대가를 받는데 만족했던 지상파방송사들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된 환경변화 때문이다. 매체 분산과 실시간 시청집단 감소 속에서 광고라는 주 수익원이 흔들리고 시청자(이젠 사용자나 이용자라는 표현이 더 자주 사용된다)를 접촉(통신사업자 표현에 따르면 B2C)할 기회가 거의 없어지는 등 디지털 다매체 환경 속에서 지상파방송이라는 플랫폼이 급속히 약화되는 것에 대한 대안 찾기를 위해서다. 결국 지금의 N스크린 전략은 지상파방송사의 플랫폼 전략인 것이다.

  플랫폼은 ‘배제’를 전제로 한다. 내가 플랫폼이 되겠다는 것은 다른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미며, 스스로 무엇을 진입시키고 무엇을 내보내고 어떤 것들 사이에 연결을 지어줄 것인지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서비스 범위와 가격과 구성을 스스로 정하겠다는 의미다. 따라서 지상파방송사들이 플랫폼 전략을 구사하며 기존 거래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배제와 진입의 경계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N스크린 콘텐츠 거래에 대한 공정 경쟁 이슈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가장 민감한 쪽이 경쟁 N스크린 서비스 플랫폼들이다. 케이블 방송처럼 원래 지상파 콘텐츠를 전제로 서비스를 해왔거나 위성, IPTV처럼 뒤늦게 시장에 진입하면서 지상파 콘텐츠를 요청했고 이에 대해 지상파방송사들이 (경쟁관계로 판단하지 않고) 쉽게 허용해서 이미 관행화된 사례와 달리, 막 생성되며 경쟁을 하는 N스크린 영역에서는 지상파방송 콘텐츠를 마음껏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있지는 않다. 고작해야 몇 십만 수준의 이용자며 대안이 무궁무진하다는 점도 콘텐츠를 배타적으로 허용하게 되는 배경이 되고 있다. 현재 N스크린 내 시장 상황을 지상파방송 콘텐츠 사용 범위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KBS, MBC, SBS N스크린 콘텐츠 공급 현황

이 표에서 알 수 있듯, 몇 몇 플랫폼은 자신이 거래에 있어 공정하지 못한 조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도 실시간 채널이나 다시 보기 월정액 상품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비슷한 성격의 자체 플랫폼을 구축, 운영하는 지상파방송사 입장에서 전략적 선택을 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들의 요청을 다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가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이런 지상파방송사의 의사결정이 거래 거절이나 불공정 거래에 해당되는 것 아닌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콘텐츠 거래만 두고 본다면 이런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간 경쟁은 N스크린 플랫폼간 경쟁이다. 콘텐츠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각 경쟁 요소를 모두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N스크린 서비스도 미디어 플랫폼이며 서비스를 위해서는 콘텐츠, 디바이스(단말기), 네트워크와 결제, 고객관리 등을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상파방송사의 콘텐츠는 이 중 한 요소에 불과하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정반대 현상이 숨어 있다.

어플리케션 선탑재(pre-load)와 가격결합 마케팅 등은 공정한가?

예를 들어 디바이스(단말기)를 살펴보자.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하는 N스크린 서비스에서 디바이스에 물리적인 진입장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어플리케이션이 같은 경쟁상황은 아니다. 통신사업자가 직접 하는 N스크린 서비스들은 자사 고객의 스마트폰에 해당 어플리케이션을 미리 설치해서 내보낸다. 이는 매우 큰 차이다. 푹(POOQ)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각 이용자들에게 푹(POOQ)을 알리고 이들이 스스로 마켓에 가서 어플리케이션을 검색하고 설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수십 억 원 이상의 마케팅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엄청난 기득권의 차이다.
또한 통신사 N스크린 서비스들은 유료서비스라 해도 다양한 요금제와 연결되어 사실상 무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가입 과정에서 각 대리점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하며 가입시키기도 한다. 그룹 내 타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무료로 제공하는 경우까지 포함해보면 이들이 수십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유료 상품을 파는 것은 무척이나 손쉬운 일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반면, 이러한 조건 없는 푹(POOQ)이나 티빙(Tving)의 경우에는 수십, 수백 억 원을 들여 이들을 따라 잡아야 하는데 그마저도 통신사업자들이 허용하지 않는다. 푹(POOQ)을 단말기에 선탑재해서 내보내 달라고 하면 과연 어떤 통신사업자가 그 요청을 수락하겠는가? 자신의 플랫폼이니 자신의 서비스 어플리케이션을 탑재해서 내보내고 경쟁관계가 될 서비스 어플리케이션을 배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서비스 환경에 자리 잡혀 있다. 이런 통신사업자들에게 지상파방송사들이 공정거래가 아니라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까?

네트워크는 또 어떤가?

우리사회도 망중립성이라는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비록, 방송통신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실상 통신사업자의 관리를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지만 이용자가 원하는 서비스가 차별 없이 제공되어왔기 때문에 지금의 인터넷 산업환경이 만들어진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이런 점에서 이미 중립적인 망의 성격을 재론하면서 그 이슈를 ‘망중립성 이슈’로 포장한 통신사업자들의 아젠다 세팅 파워가 대단하다) N스크린 서비스 영역이 유무선 인터넷과 3G/4G를 넘나드는 서비스 영역이다 보니 각종 네트워크에서 과연 통신사업자의 서비스와 그 외 서비스가 동일한 품질로 보장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버릴 수가 없다.
 당장은 이용자가 몰리는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만 나타나는 문제 같지만, 지난 해 삼성전자와 KT의 충돌처럼 접속 용량과 품질의 문제가 아니라 각 해당 사업자의 이해관계의 문제로 노출될 경우, 언제든지 서비스 네트워크의 차별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과연 지상파방송사들이 통신사업자들과 공정경쟁 환경에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 밖에도 차이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유료서비스를 사용하기 위해 결제를 하나를 하더라도 결제 시스템이 유연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결제 수단은 다양한지 등에서 차이는 크다. 실제 푹(POOQ)의 유료상품 이용자들 중 90% 가까이가 휴대전화 소액결제를 이용하는데 전화요금에 묶어 결제하는 방식과 같지 않다. 수수료 차이도 크고 번호이동 등으로 결제수단에 변경이 생길 경우에 대한 대처방안도 같을 수 없다.

고객센터도 큰 차이며 공동 마케팅 수위도 크게 다르다. 모든 면에서 마케팅의 최강자인 통신사업자를 방송사업자가 따라갈 수 없다. 이처럼 N스크린 플랫폼을 구성하는 요소 중 콘텐츠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 우위를 지닌 쪽이 통신사업자다. 유일하게 아쉬운 것이 콘텐츠다. 그런데 콘텐츠를 자기 원하는 방식대로 공급해주지 않으면 공정 거래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지금의 콘텐츠 거래 조건이 공정하지 않다면 나머지 영역에서는 어떻게 공정 경쟁 환경을 제공해주겠다는 것인가? 그야말로 아흔 아홉 마리를 갖은 자가 나머지 한 마리를 찾는 셈이다.
 
t프리미엄 200만 돌파 이벤트
(SKT의 Freemium, OTN, 호핀의 가격 할인 등에 대한 마케팅 그림 삽입)


융합시대 공정경쟁 판단기준의 혼선

과거에는 방송사업자는 방송사업자끼리, 통신사업자는 통신사업자끼리 경쟁해왔다. 그래서 그들끼리 공정하면 공정한 경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른바 방송통신 융합시대가 되었고 어디까지가 방송서비스고 어디까지가 통신서비스 영역인지 모호해졌다. 당현히 공정경쟁에 대한 판단 기준 역시 광범위해졌다. 관련된 여러 측면을 한꺼번에 고려하고 판단을 내려야 하게 된 것이다.
방송통신융합시대에 공정경쟁 이슈는 더욱 자주 쟁점화될 것이다. 비단 N스크린 영역에서 문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TV 시장에서 케이블, 위성, IPTV간 OTS나 DCS 논란도 결국은 공정 경쟁의 이슈로 볼 수 있다. 특정 사업자가 자신만 갖고 있는 자산을 통해 상대사업자에게 가격과 서비스에서 우월적이고 배타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측과 그러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측의 다툼이다. 최근 스마트 셋톱박스 등으로 인터넷 기반 서비스를 강화하는 시도가 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기존 유료매체 플랫폼에 비해 규제부담이 적어진다. 이 역시 공정한 경쟁인지 여부를 두고 다툴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다툼이 그 동안과 달리 쉽게 결론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있다. 국내 서비스에 대해 규제 틀을 새롭게 정비한다고 해도 인터넷 특성 상 글로벌 서비스 제공 사업자들을 그 규제 범위에 다 포함하지 않는다면 실효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마저도 가능한지 불확실하다. 시장획정이 점점 어려워지니 그 시장 내 경쟁에 대한 공정성 판단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맺음말

다시 N스크린으로 돌아가 보자. 결론적으로 통신사업자들이 푹(POOQ)에 대해 자신들의 N스크린 플랫폼과 같은 수준으로 단말기에 선 탑재하고 마케팅에서도 동등하게 통신 요금제와 결합시키고 영업 사원이 가입절차 진행하고 광고도 하고 네트워크 품질도 동등한 수준에서 유지해준다면 그 때는 콘텐츠에 대해서도 같은 조건으로 공급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콘텐츠 거래 조건에서만 공정 경쟁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방송과 통신이 이미 하나의 시장으로 묶였고 서비스 경쟁을 하게 된 이상 통신만의 기준이나 방송만의 기준으로 경쟁의 공정성을 판단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각자의 자원을 극대화시켜 상대방을 배제하고 시장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서로 다른 “플랫폼과 플랫폼간 경쟁”이 오히려 공정한 것일 수도 있다. 시장의 변화가 판단 기준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미디어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기술 - 왜 뉴미디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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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9.5일 DICON에서 발표한 자료이다. 7.24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연 콘텐츠미래전략포럼에서 <콘텐츠 유통환경 변화와 콘텐츠 생태계 건전화 시나리오>에서 일부 내용을 업데이트했다. <콘텐츠의 미래, 플랫폼과 스토리텔링>이란 제목을 달았다.

뉴미디어로 인한 "콘텐츠 비즈니스 환경변화"에서는 C-P-N-T모델을 가지고 플랫폼과 터미널의 역할 증대와 전통미디어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가 플랫폼 사업자가 될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과 이 기술적 잠재력을 이용해 플랫폼을 구축한 사업자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위기론'의 핵심이다. 개인적으로 위기론의 많은 부분이 부풀려졌다고 생각한다. (<미디어2.0>의 첫번째 이야기였던 "경계없는 세계, 위기론과 대세론"에서의 생각이 유지되고 있다.)

새로운 병목 


그런데 앞으로 시장에서는 '더 큰 위기'를 보게될 것 같다. (포털 중심의) 인터넷 환경에 길들여진 많은 사업자들이 무주공산이라고 여겼던 콘텐츠(Contents)와 네트워크(Network)가 새로운 병목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는 러셀 뉴만(Russell Neuman)의 에서 "부족한 것은 기술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니라 대중의 관심이다"를 인용했다. 앞서 말한 '위기론'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 중 하나이다. 플랫폼이 파편화되고 앞으로 정말 '관심경제'란 개념이 더 중요해진다면 뉴만의 91년 통찰이 맞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또 네트워크에서는 올해 2월에 있었던 KT에 의한 스마트TV 접속차단을 예로 들었다.



새로운 소비 행태


N스크린 서비스를 <월인천강>에 빗대 설명했는데 '달-콘텐츠'는 '천개의 강-N개의 스크린'에 비춰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도달이 비친 강도 멋져보이지만 뉴만의 말처럼 '달'이 중요하다.

N스크린이 '밥벌이'와 관련 있다면 개인적 관심사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이다. 뉴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미학적(?) 효과들과 이에 의한 미디어 자신은 어떻게 될까이다. 2007년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서문에서 이야기했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아우라의 부활'에 대한 연장선이다. 미디어에 의해 사람들의 '지각(perception)' 능력의 변화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사람들에게 잠재해 있던 지각 능력이 활성화되는 현대적 조건을 알고 싶다. 이를 위해 라이프니츠의 "미세지각"이란 개념에 의지해서 몇년간 책을 읽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고 있다. 

같은 맥락이지만 또 다른 관심은 매스미디어의 사회적 역할이다. (어떤 시대의 매스) 미디어가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공감"과 "스토리텔링"이란 키워드로 살펴보고 있다. 

미세지각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적 조건을 만나 사람들에게 잠재해 있던 '지각들'이 어떻게 집단화 되는지, 이런 것들이 현재의 민주주의, 정서적/윤리적 혼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또 매스미디어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를 보호'하고 (지각 및 공감의 일반화를 통한)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까, 또는 그런 것을 막을까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아래 장표)




미디어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기술


미디어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기술은 DICON을 위해 새로 작성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개인적인 관심의 연장이다. 스피노자가 '종적인 특징들은 그것들이 동일한 정서(affection)들을 가질 수 있을 때이다'라는 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사물/사건을 보고 느끼는 것이 틀리다면 같은 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스피노자의 시대에 종교전쟁에서 구교도가 신교도를, 신교도가 구교도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종이 틀리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 시대의 철학자들은 공감(common sense)에 대해 이야기 한다. 홉스, 흄, 아담 스미스 등의 영국 경험론자들도 이런 대열에 세울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재는 인터넷 기반의 개인미디어에 의해 동일 사물을 보면서 다른 정서를 갖고, 이를 퍼브리싱(publishing)하고, 서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폭발(다양한 지각들의 출현)에 따라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런 정서적 폭발에 대한 (형이상학적/인간학적) 전제가 앞서 이야기한 "미세지각"이다. 무한한 세계를 알 수 있는 무한한 지각들!

또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3일 간 지행된 연극 경영인 디오니소스 축제를 위해 대략 노동자 100가구 정도가 4년간 생활할 비용, 아테네가 일년 간 해군을 유지하는 비용의 10분의 1에 달하는 돈'을 왜 썼을까?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30세 이상의 남성이 모두 볼 수 있는 규모의 디오니소스 극장을 왜 세웠을까? 이런 질문을 한다. 공동체(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정서적 연대감(공감)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질문을 한다.

18세기 ⟪사회계약론⟫을 쓴 프랑스의 장자크 루소의 소설인 ⟪신엘로이즈⟫를 살펴보면서 당시의 뉴미디어 기술인 인쇄술과 스토리(소설)이 만나 대중들의 특정 정서를 집단적으로 발전시켜 인권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지, 또 '상상된 공감'을 통해 어떻게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었는지를 살펴본다. 매스미디어가 현재의 사회를 만들고 또 보호(달리 보면 진보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TV가 "매순간 대규모의 대중 수용자로부터 인정을 얻고, 빠르고 예측 가능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나쁘던 좋던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 정서'를 만들어내는 역사상 가장 발전된 형식의 미디어이다. 그리고 그 정서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스토리'이다. 이 스토리 위에서 우리의 윤리적 감성이 공조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언제나 미디어는 이를 위해 그 시대에 가장 발전된 배포 기술(또는 체계)을 이용했다.

정서적 연대감


이런 이야기들의 배경에는 2005년 시작한 SBS 뉴미디어전략, 그리고 그즈음 나온 BBC의 전략(Creative Future)가 있다. 국내에 소개된 BBC의 전략은 대부분 (눈으로 확인한 것은 모두) 기술환경의 변화, BBC의 (기술적) 대응과 그 결과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들의 전략의 개념 셋 안에 있던 "강한 정서적 연대감(stronger emotional connections)이란 말이었다. 그리고 또 "젊은 세대(the yong)" 이야기. 

개인적으로 하는 '쓸데없는' 고민들 중 하나가 왜 회사는 나에게 월급을 주는가? 또 왜 사회는 회사를 부양하는가이다. 우리가 생산적인 노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공감'을 만들고 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상상이든 어떻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인듯하다. 이런 이유로 내가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공동체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마음에는 들지않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내에 에이전트로 일하는 것이니. 하지만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이 가치가 있고, 또 많은 사람의 삶을 위해서 더 났다고 생각한다. 

BBC의 전략에서 가장 근저에 있는 것이 '강한 정서적 연대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뉴미디어를 통해 방송을 넘어선 세계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들 한다. 그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않는다. 방송이란 무엇인가? 왜 사회에 방송이 존재하는가? 방송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어떤 효과를 만들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가 온다면 그때야 현재적 의미의 방송이 없어질 것이다. 방송에 대한 기술적 접근이 아닌 본질주의적 접근이랄까. 이렇게 해야 과도한 기술주의자 - 자본주의적인 뉴미디어 테크노크라트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맞서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힘의 균형이 깨져 한쪽으로 너무 쏠렸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BBC 톰슨사장의 글을 2006년 읽었다. 어떤 분이 기사를 쓰면서 인용문으로 번역해 놓은 글이었다. 그리고 최근(벌써 1년이 되었나보다) 원문을 찾아 다시 읽었다. 원문과 번역되어 인용된 내용이 180도 달랐다. 원하는 대로 만들어놓은 '번안소설'이었다. 뉴미디어를 바라보는 과도한 '기술주의' 환경의 영향 때문이다. 머리 속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프레임(사고패턴)'의 힘이다. '존재의 이유' 중심으로 어떤 사물을 보려는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왜곡과 이것의 확대재생산, 근원(origin)에 대한 무시와 가상(virtual)에 대한 열광 ...... 


우리가 해오던 것 ... 방송의 본질에 대한 질문


BBC의 전략을 원문 그래로 읽으면 디지털의 두번째 물결인 인터넷은 방송 영역 너머의 세상으로 방송을 데려다 줄 것이라고 예측한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닌 밀려가는 것이란 의미가 강하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방송은 'Push Service'에서 'Pull Service'로, 즉 온디맨드 서비스로 바뀔 것이다. 그런데 BBC는 이 환경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잘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해오던 것을 잘하겠다고 한다. 인터넷에 대한 대응은 "이는 새로운 서비스에 관한 것 아니라, 이미 우리가 해오던 것을 어떻게 달리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The second wave of digital will be far more disruptive than the first and the foundations of traditional media will be swept away, taking us beyond broadcasting. The BBC needs a creative response to the amazing, bewildering, exciting and inspiring changes in both technology and expectations. ... On-demand changes everything. It means we need to rethink the way we conceive, commission, produce, package and distribute our content. This isn't about new services it's about doing what we already do differently."
우리가 해오던 것이 무엇일까? 공공 서비스 콘텐츠(public service contents)를 수용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방식("어떻게 달리")으로 하는 것 뿐이다. 뉴미디어에 대한 접근이 '규범적'이다. 도구적이지 않고 당위적이다. '수용자들이 집에 있든 이동 중이든, 어떤 미디어 방식이든 어떤 디바이스 유형이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사회가 그들을 부양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왜 사회가 그들을 부양할까?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다시 하겠다. 그런데 나는 사회 -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가 스토리(콘텐츠)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연대감'이라고 생각한다. 즉, 공감이다. 

이런 까닭에 BBC 뉴미디어 전략의 핵심이 '강한 정서적 연대감'이라고 달리 읽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적어도 내가) 뉴미디어 관련된 일을 '열심히'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가는 길


2005~2006년 이후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부터 지금의 '콘텐츠 연합 플랫폼'까지, 우리가 seamless('천의무봉'/끊김없는/이으매가 없는)한, 또는 유비쿼터한, 지금의 n스크린 서비스를 하는 이유이다.
"텔레비젼 프로그램은 매 순간 대규모의 대중 수용자로부터 인정을 얻고, 빠르고 예측 가능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이 ⟪재매개: 뉴미디어의 계보학⟫에서 한 말이다. 우린 텔레비젼과 같은 효과를 뉴미디어 속에서도 얻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지금의' 방송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막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뉴'미디어에 들어온 신참자들과 다른 Mission과 세계상을 가지고 '같은 일'을 한다. 정말 '같은 일'일까? 

P.S. 정서적 효과를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따라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또는 싫어하는 미디어가 된다.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닌 ...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싫어한다. 중립성이나 객관성 이전에 왜 미디어가 이 사회에 있는지를 생각한 후,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살펴야한다. ... 미디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환상일까? 소설이나 시, 문학처럼 말이다. 




2012.10.04일 쓰기 시작하여, 12.22일 완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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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가 수신료 시장형성과 콘텐츠연합플랫폼(www.poo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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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7.24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연 콘텐츠미래전략포럼에서 ⟪콘텐츠 유통환경 변화와 콘텐츠 생태계 건전화 시나리오⟫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방송산업의 문제를 "초저가 수신료 시장 형성"이란 구조적 문제로 풀었다. 아래 "콘텐츠 비즈니스의 문제점(한국의 경우)"가 발표 내용이다.
씁쓸한 내용은 IPTV 가 초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가입자를 모았는데, 실제 사업성에서는 초기에 이정도면 '비관적'이라는 수준의 매출을 달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음악산업처럼 점진적으로 통신산업의 번들상품화가 되어가는 듯하다는 것이다. 음악산업에서 콘텐츠 홀더가 "100만명 구매, 3000만원 매출"이었다면, IPTV에서는 SVOD(1주일 PPV 판매 후 월이용료를 낸 가입자에게 추가 과금없이 제공하는 VOD)의 경우 "100만 뷰잉에 1000만원~2000만원" 수준으로 더 못하다. 그래도 콘텐츠 가격이 비싸서 IPTV 산업이 어렵다라고 이야기한다. 

아래 그림은 작년말에 IPTV사업성이 '비관적'이란 것을 간략히 분석한 자료이다.IPTV 사업 예측과 현황에 있는 내용을 사후적 체크한 것이다.


뉴미디어에서 "건전한 생태계"는 콘텐츠 사업자 스스로가 활로를 찾아 '힘의 균형이 찾아질 때'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2007년 KT와 같은 통신사업자가 나서 "방송의 산업화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다 보니 현재 이런 문제가 나지않았겠냐는 진단이다. 콘텐츠연합플랫폼(www.pooq.co.kr)을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늦었지만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방송이 산업화 된다는 것에 심리적 저항감이 있지만, 해야한다면 남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해서 해야한다. 그럴 때 사회적으로도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년말 자료를 만들면서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에서 이야기했던 '흉내내기' 개념으로 돌아갔다. 기술적 융합이 아니라 현재의 성공은 '물리적 조합'처럼 보이고 '이종교배'한, 약속했던 새로운 서비스는 없지않았냐는 질문이다. 그렇게하다보니 디지털케이블과 동일한 사업구조를 '지향'하게 된 것은 아닌가라고. IPTV에서 KT의 선전도 Olleh TV Skylife(OTS)라는 물리적 조합의 결과가 아닌가! 상대적으로 훌륭하지만 말이다.

초저가 수신료 시장과 콘텐츠산업의 통신산업 번들화를 제외하면 대부분 "우공이산의 정신,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그리고 지상파 연합 플랫폼"의 첨부자료에 있는 내용들과 유사하다. 개인적으로 현재 케이블TV 내 지상파 재전송 문제도, 외주 프로그램 제작비 문제도 '초저가 수신료'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N스크린에서의 협력과 경쟁도 이 틀 안에서 접근한다면 문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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