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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서간집, 아카넷, 이근세 옮김, 2018❯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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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린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간다!❯에 대한 update. 왜,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가느냐! 배치와 순서를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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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울덴부르크에게 이렇게 쓴다.

"청컨대 실체와 우유적 속성에 대해 제가 내린 정의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정의로부터 저의 모든 증명이 도출됩니다. 실제로 저는 실체를 자신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 안에서 생각되는 것으로서, 즉 그것의 개념이 다른 어떤 것의 개념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변용(modificationem) 또는 우유적 속성(accidentia, 偶有的 屬性)은 다른 것 안에 존재하고 그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점은 명백합니다.
첫째, 실체는 본성상 자신의 우유적 속성에 앞섭니다. 우유적 속성들은 실체 없이는 현존할 수도 없고 생각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실체 안에, 즉 지성 밖에는 실체들의 우유적 속성들과 우유적 속성들 외에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습니다. 주어진 모든 것은 자신에 의해서 생각되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의 개념은 다른 것의 개념을 포함하거나 아니면 포함하지 않습니다.
셋째, 다른 속성들을 가진 사물들(실체들)은 서로 간에 아무 공통점도 없습니다. 실제로 저는 속성을 그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끝으로 넷째, 서로 간에 아무 공통점도 없는 두 사물 중 하나는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결과는 원인과 공통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무(無)에서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도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친애하는 선생님, 인간들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생된다(generari)는 것, 그리고 그들의 육체는 비록 전에는 다른 형태였을지라도 이미 현존했었다는 점을 부디 고찰하시기 바랍니다." (pp. 25~27)

실체와 우유(우연?, 필연성이 결여된, 어떤 것의 본성이 아닌)적 속성의 관계

1. 실체의 우유적 속성에 대한 선차성
2. 세계는 실체와 그 실체의 표현(우유적 속성, 변용)만으로 현존한다.
3. 다른 속성을 가진 사물들 간의 배제성(?) - distinct : 

cf. 라이프니츠는 이런 원리(정의) 때문에 모든 (논리적) 사건들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모나드를 상정한다. 두 실체간의 인과성은 없고, 초월자인 신에 의한 예정조화된(충족이유율을 갖는?) 세계가 있다.

4. 원인과 결과는 공통된 속성을 전제하는 것에서 무에서의 창조를 거부하고, 내재적 발생을 주장한다.

이것의 순서를 논리적으로 하면, 세계는 실체와 그 실체의 표현만으로 현존한다(2). 이건 다분히 직관적(경험적)이다. 그리고 실체의 선차성(1), 속성이 다르다는 것의 의미인 distinct(공통점의 부재, 상호 배제성)(3), 마지막으로 그 결과 내재적 발생(4)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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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관계와 상관관계

(사회과학은) 인과관계에 대한 집착, 절대 원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적인) 상관관계에 집중한다. 세계(실체)는 우유적 속성, 변용, 표현으로만 현존한다. 관계의 변화, 강도와 운동 속도의 변화 속에서 그것은 무한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사물(an object)이 다른 어떤 사물을 만날 때, 사건의 조합(combination)이 된다면, 만난 사물들이 바뀌었거나, 만나는 순서(permutation)가 바뀌면서 처음의 어떤 사물 속에 있던 성질이 드러난다."  출처: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아마도 .. 

현대의 사회과학은 상관관계에 대한 파악, 확률적 또는 미분적 파악이다. 자연과학적 인과관
계는 (실험실에서) 정해진 사건의 조합이다. 하지만 자연(세계) 안에서는 우발성(contingency, eventuality)을 막을 수 없다. 심지어는 잘 통제된 실험실에서도 조차.

사물이 가진 능력의 발휘는 만나는 사람(회사,사물)들이 바뀌었거나, 만나는 순서가 바뀔 때이다. (경영학에서 어떤 성공) 법칙을 찾는다면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최적의 조합을 만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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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존재론의 적용, 경제학의 경우

경제학(어떤 학이든)의 대상은 경제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어떤 경제적 현상을 설명하면서 예측하는 것이다.

주류경제학(미시/거시경제학)은 경제모형(이론적 이상형)을 만들어 설명을 시작한다.

1. 경제현상에서 나오는(표현되는) 다양한 변수들을 수집한다.
2. 많은 변수 중에 몇 개만을 골라 해당 변수들 간의 관계(상관관계)를 가정을 세워 분석하고, 이를 논리적(수학적모델)으로 증명한다. 주로 미분한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많은 경우 '한계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하는 것 같다.
3. 증명된 모델을 적용하여 예측/추론한다.

2번의 과정이 중요한데, 수 많은 변수들 중 (그 모형에서 중요시하는) 몇 개의 변수만 변화를 허용하고, 나머지는 고정된 것처럼 가정한다. 중요변수는 수요량과 가격(수요곡선), 공급량과 가격(공급곡선), 효용과 가격/소비량(한계효용), 가격변화와 두 재화의 소비량 변화의 관계(대체재, 보완재) 등 ...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 경제현상을 [제한적이지만 - 전체 변수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들뢰즈)적인, 또는 엠페도클레스적인 강도/밀도적 관계로 보는 것일 수 있다. 강도/밀도는 미분식으로 나타난다.

(전체를 생각해야한다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생각해야할 것 같다. 모나드는 세계 전체의 내용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각 모나드는 특정한 부분(demension)에 빛을 받는, 그 부분의 강도와 밀도가 빛나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모나드 안에 논리적 술어(?)로 내재한다. 그 무한을 측량할 수 있다면 우린 세계 전체를 계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플라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들뢰즈 - “라이프니츠는 각각의 모나드는 세계를 표현하고 모나드들 내에 내속하는 술어들의 계열로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잘모르나 추측컨데) 경제학의 모든 법칙은 강도적 관계로 치환해 생각해볼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차원 중 어떤 한 차원(dimension)에서 봤을 때의 관계이다. 모형상에 상정된 둘(두 개의 변수)을 봤을 때는 그럴듯 하지만 다른 변수들을 모두를 풀어놓으면 2007년 금융위기처럼 이상한(우발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세계는 무한하기에 ... 경제학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석학들도 위기를 예측할 수 없다. 우발성은 (장기적으로) 새로운 체재를 발생시킨다/시킬 수 있다. '경제법칙'이지만 그 법칙이 보여주는 것은 특정 변수들 간의 강도적 관계인 상관관계이지 인과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등등 ....

연구와 모델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한계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른 법칙의 출현 가능성, 다른 전략의 가능성, 물질적으로 결정되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비물질적, 또는 물질적 변환(trans-formation) 가능성 등의 근거가 된다. 이론(형이상학적인 존재론, 또는 철학)은 이런 변화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미분은 스피노자 시대, 17세기에 만들어졌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를 전통적인(종교적인) 관점에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둘의 관계가 궁금하다면, 아래 책이 재미있다.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매튜 스튜어트 지음, 석기용 옮김/교양인

레닌 : 벤야민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들뢰즈식) 주석

벤야민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들뢰즈식) 주석에서 이야기한 레닌과 관련된 글들이다.



서울역에서 종로까지
- 서울풍경 1

일주일에 한번씩 기차에서 내려 서울역에
서면 현기증이 먼저 그 다음은
구역질이 났다 기차는 대전을 출발해
조치원, 천안, 평택, 수원, 영등포, 그 다음
한강을 건너 서울역에 오고 사람들이
참새 떼같이 떠들면서 몰려 내렸다 소리로
날카로운 바람을 만드는 버스는 뒤에 검은
연기를 달고 머리 위 고가 밑을 달리고 나는
종로 3가에 어느 건물 안에 앉아 밖을 보며
콜라에 햄버거를 먹는다 앰프에 노래 소리 들리고
피켓팅에 가두행진이 있어도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 가슴은 뛰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 짱돌이라도 날라와 커다란 유리를 깨고
내 머리통을 치기를 바라면서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 생각도 있으리라 하지만
과거는 과거로 놓자 시간은 항상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고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역사가 뒤걸음친다 해도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리라 그것을 아는 내가 무엇을 어쩌란
말이냐 나의 속에 과거가 살아 꿈틀거린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난 이미 현재 위에 서 있다
피켓팅이 있고 운동가도 있고 사람도 있지만
바리케이트가 없고 적들이 없고 구경꾼도
없다 지금은 침체기다 ‘핵심을 보존해 퇴각하라’
레닌도 생각을 못했으리라 핵심도 없다면 아니
모두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면
누가 퇴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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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나이

오늘 시내에 나갔다 여기 저기
둘러보다 한 구석에 꽂혀있는
시집을 보았다 김남주가 있고 박노해가
있었다 백무산이 있고 김정환이 있었다 이 모두를
갖고 싶지만 돈이 오천원 밖에 없다 혁명,
동지, 노동자를 향한 외침은 돈에 팔려
나간다 그래도 경쟁에 직면한 조잡한
소비에트의 생필품처럼 이곳에서도 상품성이
떨어지나보다 음모하듯 음침한 구석에 이들만
몰려 있는 것을 보면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저것들을
굶주린 소비에트의 인민처럼 아귀처럼 먹던 때가
있었다 김정환의 「희망의 나이」를 샀다 목 매단
다섯명의 레닌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시집을 팔아
집이라도 장만하려나 목 매단 역사를 보면서
희망을 간직한 채 있는 그도 참 대단하다 그를
한번 흉내내 본다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 하지만 엄연히 우리는 패배했다 아니
지금이 시작인가 단돈 삼천원으로 혁명을 사려는
내가 우습다 그도 그렇다 단돈 삼천원에
희망을 팔지는 않을 것이다 내 나이는 그보다
젊다 나는 그보다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다

- ‘희망의 나이’ 김정환의 시집 (1992.11,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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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심급


• • • • • • 전략 • • • • • •


우리가 알았던 것은
온다던 약속된 시간
우리가 안 것은
기다림과 지루한 고독
우리가 알 것은
날개를 접기 시작하는 의지의 시간
몰랐던 것을 몰랐다 말하는
부끄러운 고백의 시간이 왔다
진린 누가 지고 나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뚫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자

이성의 간지!
그래 우린 더러운 신앙의 시대에 살았다
가누지 못할만큼 무거운 짐들에
우리 다리는 휘청이면서
주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그런 신념의 교조의 뼈다귀를 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힘겹게 걷던
어둠의 나날들이 있었다

우리가 아는 필연의 세계에서도
우린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란 좌절의 자유일 뿐
아니면 우린 필연의 세계를
정말 알지 못했다
자유란 무지의 자유일 뿐
우린 가쁜 숨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버리지 못하는
아쉬움과 주저하고 우물거리는
회의의 거리를 쏴다닌다

• • • • • • 중략 • • • • • •

우린 다시 귀를 막고 고함을 친다
이제 가난에 찌든 의진
서푼짜리 관직과 바꾸고
등 따습고 배 부른 자들의 침묵의 시간이 왔다
바로 그 시간이 왔다
우리의 신념이 우리의 의지가
이 땅엔 절대로 절대로 오지 않는다던
오지 못한다던 그 시간이 왔다
고립감에 모두가 고독에 잠기는 시간
고독을 잊기 위해 무언가에 몰두하는 시간
술에 마약에 담배에
자위에 계집질에 사내질에
그리고 강요된 노동에
어쩔 수 없는 연구에 잠겨
허우적거릴 시간이 왔다
신한국의 건설과 선진조국 창조의 시간
모든 것의 초점이 그것에 집중하는 시간
헛눈 팔면 짖터지리라 위협하며
시작되는 생산의 정치의 시간
강요된 과학의 시간
최종심급에서 경제결정의 시간이 왔다

• • • • • • 후략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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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3월 졸업을 했다. 92년 말부터는 '백수'였다는 이야기다. 졸업 후 몇 달간 대전과 서울을 오갔다. 대학원엘 갈 요량으로 대학 1학년 교양영어 이후 한번도 안봤던 영어 공부를 한다고 하며. 종로 3가, 하디스에 앉아 콜라와 햄버거를 먹으며 받침에 깔린 종이에 썼던 '넋두리'이다.

희망의 나이를 서점은 대전 역전통에 있는 대훈서적이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인영이던가. 대훈서적 2층인가 시집 코너, 전시 좌판 아래 책꽂이에서 출판된지 얼마안된 김정환의 시집을 샀다. 서울로 오가는 시간은 길었고, 그 시간마다 시집을 잃은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대학에, 철학과에 가도록 했던 그 글들. 그해 7월인가, 군에 입대했다. 입대하기 전 삼사개월 간 썼던 글들을 묶어 〖최종심급〗이란 제목을 달아 몇몇 친구와 선배들에게 보냈다.

노다메 칸타빌레의 치아키가 비에라 선생을 떠올리듯이, 나는 어떤 순간마다 대학 때 읽어던 레닌의 글을 떠올리고, 되뇌인다. 비에라는 꿈일 뿐이고 슈트레제만보다 못할 수 있지만 말이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레닌은 핵심역량을 보존하며 퇴각을 고민하고 실행했다." 이런 내용을 쓰며, 다시 레닌을 생각한다. '내 나이는 그보다 젊다 나는 그보다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젠 죽음을 맞이했던 1924.1월의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되고 말았다. 이젠 그 보다 오래 살 것이란 것에 걸어보자! 살아있는 한 여전히 희망은 유효한 것이다라고 ....

오늘 아침 아이는 2학년을 시작하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 우리의 대학시절처럼 홍콩은 울렁대고. 아내와 나는 아이를 걱정한다. 아내에게 우리도 그런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이렇게 살고있으니 걱정말라 이야기를 했다. 그 시절과 함께 한 '어떤' 친구들, '최악의 상황'이 마음 한구석에 있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희망은 불안의 쌍둥이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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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들뢰즈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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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에 페이스북에 남겨놨던 메모들이다. 2년 지난 오늘 다시 보고 글을 추가한다. 

2019.8.29 전략 - 평가와 전망

벤야민의 비평과 들뢰즈를 연결해, 우린 하나의 전략적 테제를 도출했다/도출할 수 있다. 우리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있는 분들은 다른 전략을, 배치를 만들려 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미디어 전략'은 벤야민이 보았던 뉴미디어(사진, 영화)에 의한 전통적인 예술의 변화에 기반한다. 남이야 뭐라든! 비물체적 변환을 일으키기 위한, '새로운' 영토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들, 각 세력들(입장들), 현실적인 경제적 제도/구조/회사 등등이 전략의 승패를 가른다.

혼자 목표에 다다르기 어려울 때, 둘 또는 셋이 되는 방법으로, 친구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스스로 Contents Aggregator가 되기 위해 푹, SMR을, 하나의 형식을 만들었는데,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되려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간과했다.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 2.컨버전스 시대의 미디어 전략⟫

전략의 차원에서 '비물체적 변환'을 이루려면 내적 역량에 대한 확신(레닌식 주의주의)이 중요한데, 우린 여기(자기의심, 타자에 대한 부러움?!)에서부터, 자기확신의 결여로 패배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 그 최종판은 흉내내기 - 자기의 핵심역량 버리기이다. (돈키호테식 용기와 근거없는 희망으로) 다른 곳에서 벌여놓은 전장에 뛰어드는 것 - 자기가 유리한 위치로 적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또 '개인적인' 투항이 이어진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못한, 애석한 죽음과! 우연들이 겹쳐, 누층적으로 쌓여,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게 되면 무너져내리는 '필연의 법칙'이 들어서는 것이다.

알뛰세르의 말이 '경험적'으로 맞다. 너무 성급하게 개입하는 사람은 정확한 지점을 발견하지 못할 위험성, 너무 많이 구부리거나 너무 적게 구부릴 위험을 무릅쓰게 되며 과실을 처할 위험에 처함게 된다. '너무 많이 구부렸다'고 생각한다. 그 위험은 ....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 2.컨버전스 시대의 미디어 전략⟫

어려움이 닥쳤을 때, 레닌은 핵심역량을 보존하며 퇴각을 고민하고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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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 2016.8.27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한 메모


1900년경에는 기술적 복제는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 전래의 예술 작품 전체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았고, 전래의 예술작품의 영향력에 깊은 변화를 끼치기 시작
#벤야민 #기술복제

2019.8.27
  • 복제방식에 따른 물성의 변화 (그림을 찍은 사진, 연주를 녹음한 음악, 사진과 녹음은 원본과 다른 물성을 가진다.) - 기계적 배치의 변화
  • 복제의 양적 증가에 따른 역사성의 변화 (더 이상 원본의 목록에 기입될 수 없는 복제물) - 언표적 배치의 변화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결합된 추상기계인 '예술'의 변화가 일어난다.
2020.1.16일 추가: 아래 내용을 찾았다. 한겨레신문 2017.1.11. 수요일
언표적 배치 - 지식인의 사진에 대한 진실된 해석이 중요하다고 벤냐민과 브레히트는 강조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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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Park
2016년 8월 27일 오후 6:08 · 

기술복제 수준의 두가지 서로 다른 표현 — 예술 작품의 복제와 영화 예술 — 이 어떻게 전래적 형태의 예술에 거꾸로 영향을 미쳤는가 보다 더 풍부한 단서를 제공하 는 것이 없다.
#벤야민 #기술복제

2019.8.27 / 30
  • 거꾸로 영향 - 예를 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 복제물(사진, 영화)에 의해 원본은 아무런 물질적 변화가 없었는데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 - 비물체적 변환(들뢰즈) / 기계적 배치, 언표적 배치가 바뀌면서 기존의 예술영역에서 탈영토화된 후 '다른 의미'의 예술(추상기계)로 재영토화된 예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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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Park님이 상태를 업데이트했습니다.
2016년 8월 27일 오후 6:14 

두번째로 기술적 복제는 원작의 모상을 원작 그 자체가 이룰 수 없는 상황에 옮겨놓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 술적 복제는, 사진이라는 형태가 되었건 음반의 형태가 되었건 수용자들이 원작의 모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 게 한다. 대성당은 그 자리를 떠나 예술 애호가의 작업실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음악당이나 노천에서 연 주된 합창곡은 방안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원작의 모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만 여기와 지금에서는 더 멀어진다. 이에 따라 다른 배치, 탈맥락성이 이루어진다.
대성당, 음악당, 노천적 배치 vs. 작업실, 방안적 배치
#벤야민 #기술복제

2019.8.27
  • 비물체적 변환이 일어나는 매커니즘 - 말 그대로 탈영토화, 모상들이 (원작 자체를) 벗어나 다른 상황에 놓어진는 것. 이에 따라 모상이 가지고 있던 의미가 변화(모상의 위치 때문에 원작에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지고, 모상은 원작이 가지고 있던 의미를 탈각? 시킨다)
  • 탈영토성은 아우라(여기와 지금)에서 더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의 아우라 발생장치가 해체되고, 다른 형이상학적 표면이 만들어지면서 '다른' 사건/의미가 발생/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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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Park님이 상태를 업데이트했습니다.

2016년 8월 27일 오후 6:45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은 현존하는 예술작품을 훼손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술적 복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물리적 훼손은 없지만 여기와 지금의 가치는 떨어지데, 그것(여기와 지금의 가치)은 무엇인가?
#벤야민 #기술복제

2019.8.27
  • 비물체적 변화의 의미 - '현존하는 예술작품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 의미가 바뀐다.
  • 그것(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의미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수동적 종합'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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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Park
2016년 8월 27일 오후 6:51 

이것이 결코 예술작품에 만 해당하지 않고, 또한 예를 들면 영화에서 관객 앞을 지나가는 풍경에도 해당한다
여기와 지금이 만든 가치인 풍경성, 얼굴성이 바뀌는 것이다. 의미작용과 주체화가 바뀐다. 탈영토화되고 탈코드화된다. 물화된 장치/기계가 만든들어내는 효과가 가치이다.
#벤야민 #기계복제 #들뢰즈 #얼굴성

2019.8.27
  • 탈영토화(탈맥락화)는 이제 예술작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영화의 대상이 되는) 모든 가시적인 존재(자연, 풍경)에도 해당된다. 풍경은 영화 속에서 다른 의미를 담는다/갖는다.
  • 그런데 이런 배치의 변경은 단순히 예술작품, 풍경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 환경(umwelt) 내에 있는 사람(주체, 유기체)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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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Park
2016년 8월 27일 오후 6:59 

이러한 과정[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기술적 복제 과정]을 통해 예술의 대상에서 가장 민감한 핵심이 건드려 지지만, 자연적 대상은 그렇게 손상받을 핵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술대상의 가장 민감한 핵심이 여기와 지금의 가치라면 예술이 발견하는 지각에는 (이데올로기적인) 골/홈 파기가 존재한다. 긍정만이 아닌 부정적인 것도 있는 것이다. 기술복제가 골/홈을 매끈하게 만드는 것,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 한다.
#벤야민 #기술복제 #들뢰즈

2019.8.27
  • 자연(풍경)과 예술의 차이 - 핵심이 있는 예술, 핵심이 없는 풍경(자연)-예술은 문화적인 것이다. 인간적인 구성체/의미체이다. 그 (사회적) 의미가 핵심이다.
  • 풍경이 영화가 될 때, 어떤 '의미'가 부여된다면 문화적 차원에서 하나의 '핵심'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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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Park님이 상태를 업데이트했습니다.
2016년 8월 27일 오후 7:21 

사물의 진품성은 그 기원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 지속으로부터 역사적 증거물에 이르기까 지의 모든 것의 총괄이다. 후자[역사적 증거]는 전자[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자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게 되는 복제에 있어서는 후자, 즉 사물의 역사적 증거도 위협받게 된다. 물론 위협받 게 되는 것은 역사적 증거 뿐이지만, 그러나 이처럼 위협받게 되는 것은 또한 사물의 권위[진품성]이다.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게 되는 복제"로 사물의 역사적 증거가 위협 받고, 사물의 권위(진품성)도 위협 받는다. 이데올로기적인 탈구가 발생하는 것이다. 재배치로 인해
#벤야민 #기술복제 #이데올로기적탈구

2019.8.27
  • 전시효과 - (복제에 의한 예술작품/원본의) 비물체적 변환의 중요성- 전승된 가치, 사물의 권위, 진품성 등이 부서져내리는 것이다. <-- 제의효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서져내린다는 것보다, 이제 재구성(새로운 의미의 탄생)된다는 것- (물질적 배치의 변화에 의해)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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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Park
2016년 8월 27일 오후 11:22 · 

사물의 진품성은 그 기원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 지속으로부터 역사적 증거물에 이르기까 지의 모든 것의 총괄이다.
기계적 배치=물질적 지속
언표적 배치=역사적 증거물
이질적인 두계열의 교직으로 만들어지는 게 진품성이다. 푸코의 접근 <말과 사물>에서인가?
#벤야민 #기계복제 #푸코 #들뢰즈

2019.8.27
  • '사물의 진품성'(을 갖은 예술작품)은 계속되는 기술적 복제물(의 양산/양적 확대?)과 그것의 재배치(장소변환, 여기 저기 출몰)에 의해 계열화의 논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새로운/다른 의미가 지속적으로 생산될 가능성이 열린다. - 계열화의 논리에서 벗어날 - 무수히 많은 계열들이 생성될, 특정하게 계열화된 것에 벗어나 있는 다른 계열들의 존재, 계속해서 차이가 생성되는- 하지만 이렇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 - 계열들은 제도/장치에 의해 그 물질성을 담보하고 어떤 하나의 계열이 우점종이 될 게다. 그렇지않다면 '예술의 장'에서 벗어난/쫓겨난 것이거나 등등 ..
  • 진품이 가지고 있던 '무한한 잠재성'이 솟아오르며 차이의 생성하게 할 수 있는 터(기반)가 만들어졌다.
  •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지 진품의 의미가 사라진다/사라졌다는 아니다. 새로운 색, 무늬, 촉감 등을 지닌 다른 직물(text)가 짜여지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여전히 참조되는 '진품'이 존재한다/존재할수밖에 없다. - 예술에서 '장(field)'의 역할

페이스북, 날짜 옆에 Amazon이라 뜨는 건 뭐가! amazon.com 링크가 걸려있는데..



http://dckorea.co.kr/tc/archive/20190827#entry_301

사업/서비스를 위한 메모들 - 배치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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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16년 어느날 ~
들뢰즈의 기계적 배치, 언표적 배치, 사건 개념을 연결

  • 기계적 배치 - machine / 제작. 내적 맥락
  • 언표적 배치 - 해석. 계열화 / Social. 서비스-소비적 맥락
  • 사건 - contents. story적 맥락

사건이 이렇게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기계-언표-콘텐츠가 함께 교직되면서 어떤 사건/의미가 생겨난다. 기계-언표도 과도할 수 있다. 어떤 것(사업/전략)을 구조화할 때, 사용해보는 도구/개념 정도로 생각해보자. (2019.7.18)


콘텐츠나 사건을 어떻게 놓을까! 콘텐츠를 사건에 놓는 것은 category mistake이다. 콘텐츠는 기계적 배치 내에 내용이나 성질로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것이 놓여있는 미디어기계와 사람이 접속할 때, 어떤 의미와 사건이 일어난다.


그 내용(콘텐츠)에서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나 그 콘텐츠의 제작자(감독,작가, 편성/투자자 등)의 의도에 따라 가는 사람들 .. 의미가 갈리는 방식) - 성상을 파괴하는 신교도와 그것을 만들고 신성시 하는 가톨릭교도


어떤 특정 의미나 사건을 지속하도록 만든 게, 가톨릭 종교개혁의 '아우라(벤야민)' 장치라고 한다면 우리 옆에는 그 보다 유연한 '페북/facebook 기계'가 있고, 그 안에서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아우라' 장치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페북을 어떻게 쓰는지, 그 안에 어떤 peer들, 어떤 contents, context ... 기(氣)들이 우글대다 어떤 정향(개체화, 몰적 형태)이 발생하고/되고 고착될 것이다. (2019.7.19)

아래 글은 2019.7.23일 업데이트 --------------------



2014.5.22일, 2015.3.12일 메모 - 메타데이터, TMI


meta-data에서 meta는 변하지않는, 근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형이상학, meta-physica의 meta. meta를 뺀 data는 현상적인 것, 경험적인,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user-experience에 가깝다. 많은 철학자들이 data를 허상이나 환상에 가깝다고들 생각을 했다.

user의 입장에서 보면 search(function, thchnic)이라기 보다는 find다.
다른 곳이 검색으로 돈을 벌었으니 우리도 검색을 하자, 그것을 위해 데이터를 넣자가 아닌.


"meta-data가 아닌 사용법/범례"에서 사용법/용례는 잘못썼다. 사용과 용례가 맞다. 사용법은 meta-data에 가깝다. 말그대로 law(법/칙)이니.

data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변하는 콘텐츠의 맥락성, 의미,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판단과 관련된, 구체적인 글(클립에서 제목을 뽑거나, 댓글을 달거나, S짤방 같은데서 드립(!)치는 것이 된다. meta가 될 수 없는 일시적인 정감들/분위기와 관련된 정보(information)


meta-data는 칸트의 범례에 가깝다. 아래 메모에서 "meta-data가 아닌 사용/용례"에서 용례는 실제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파롤(Parole)'이다. 

〈 칸트는 취미 판단에서 "우리가 명시할 수는 없는 어떤 보편적 법칙의 한 실례처럼 여겨지는 판단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필연성" 즉 범례적 필연성을 발견했다. 이 필연성이 도출되는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상호 주관적으로 보편적인 까닭에 (즉 그 근거는 자유로운 유희와 합목적성의 선험적인 원리이므로), 우리에게는 마치 그러한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칸트는 공통적인 느낌의 이념으로서의 공통감을 도입한다. (인용 사이트) 〉 이 인용문처럼 생각하면 칸트의 범례는 쿤의 패러다임이 범례와 가깝다. 둘이 다르다면 칸트는 범례의 '필연성(?)'을 이야기했다면, 쿤은 그 패러다임 마저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 정도일 듯 하다.


"환경을 만들다가 아닌 환경에 들어가 하나의 용례가 된다." 이게 '실제' 서비스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 메모다. 전략의 남발처럼 메타데이터의 남발 ... 어떤 존재론적 층위 없이 모두 넣고, 쌓아두자는 '실증주의적' 접근. 아니, 실증주의도 아닌 듯 하다. 실증주의는 현상을 가장 단순하게 description하는 것이니. 범례나 법칙성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naver 검색은 메타데이터가 아니라 용례이다." 용례=자연어 검색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 콘텐츠'쟁이'들은 모두가 메타데이터라 생각한다. 빠르게 용례를 찾을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검색.

결론. 내가 아는 메타데이터는 칸트적인 범례에 가깝다. 그런데 많은(대부분의) 경우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를 메타데이터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용자의 용례, 웹 활동보다 자신이 '쓰레기(현재의 상황에서만 의미있는 것)'까지 넣는 것을 좋아한다. 위에서 '환경을 만들다'가 아닌 '환경에 들어가다'를 이야기한 것은 이런 이유이다. 콘텐츠를 둘둘 감아 (저작권을) 지켜서는 서비스를 만들기 힘든 이유다. user들이 기억 속에 있는 콘텐츠를 찾아, 자기 맥락에 맞춰 놀 수 있어야 하는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

맥락에 따라 특이하게 쓰기 -->소셜화 되기 


이런 것을 자신이 모두 직접 만들려고 하는 무모한 접근. walled-garden 증후군
자신은 모든 사람의 감정을 다알고 있다는 (제작자의) 당찬 자신감 ....

이 메모는 지금은 다른 회사로 간 분이 메타데이터, 메터데이터 이야기를 해, POOQ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을 때, 쓴 메모이다. 그러다 장대익교수의 ⟪빅 퀘스천⟫을 읽으면서 칸트 메모를 해 덧붙여놨다.


이 소셜화 되기는 플랫폼 되기, 부불노동자 고용하기와 연결된다. user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플랫폼 사업의 진수이다.





5년이 더 지난 메모를 자리 뒷편 기둥에서 떼내 버리며 ....

기술지대, 테크놀로지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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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후 '기술지대'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술지대'에 관한 이해없이 '플랫폼(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술지대'에 대한 논의가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란 점을 고려하면 플랫폼사업과 연결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Marx의 <자본> 전체가 그렇지만 지대이론도 고전경제학자인 D. Ricardo에서 왔다고 생각하면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지대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사는 <방송과 통신정책, IPTV 융합정책의 지대추구론적 분석 : 지대추구의 효율성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nvergence Policy of Broadcasting and Telecommunication in IPTV Convergence Service with Reference to Rent Seeking Theory> 때문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이상호 교수/박사이다. 2007년, 나는 KT IPTV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박사는 KT에 근무하는 counter partner(차장)였다. 그가 지대이론에 근거해 플랫폼 사업자의 wining을 이야기했고, 우리가 추구했던(?) 'Digital Contents Platform'이란 허무맹랑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있는 친구에게 예전에 서점에서 서서 읽었던 만델의 <후기자본주의>를 제본해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도 관심을 갖고 관련된 책과 논문들을 읽고 있고, 또 그 사이 기술지대와 플랫폼의 관계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정리해 <문화경제학> 시간에 짧게 강의를 했다.

기술지대는 기술(기술과 기술적 장치들, 그리고 지적 재산권 등의 법률적 제도 등도 포함된 기술)을 기반으로 부(가치)의 전유를 위한 회로 중 하나이고, 부불노동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이 구체화된 형태가 플랫폼, 또는 FAN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 알파벳)이란 것을 모른다면 그 '사업'의 경제적 핵심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자본>이 과학이거나 어떤 경제학적 진리를 담고있다면 객관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적 회로/기계'에 대한 이론적 분석의 명확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진리가 아닌 '인간적인 진실', 계급의 존재와 착취구조 그리고
그것의 철폐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기술지대'에 대한 관심은 '양가적'이다. 한편이 새로운 착취구조에 관련된 것이 있다면, 반대편에는 '어떻게 하면 플랫폼 사업에 성공할 것인가'라는 측면이 있다. 우린 이런 모순 속에 살고 있다. 2007년부터 살펴보던 것들이지만 내 짧은 지식으로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지난 10년 사이 기술지대와 플랫폼에 관련된 논의들에 많은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 문화과학의 <플랫폼 자본주의> 특집호를 읽으면 '왜 플랫폼 사업자가 돈을 버는지'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문화과학 92호 - 2017.겨울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지음/문화과학사

이 글은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빌렘 플루서, 그리고 기술적 복제 시대의 우리>(2008)와 <텔레비젼: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을 읽으며>(2013) 사이에 있던 글이다. 아래 글에는 정작 기술지대에 대한 내용은 없다. 기술지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 '기술지대'로 검색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2007년 <유비쿼터스 환경에서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한국정보처리학회지에 관련 내용을 발표했었다.

▸ 블로그에 게재된 내용 http://dckorea.co.kr/tc/28

또, 2009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나온 2009년 말 발간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이란 책자를 읽다가 이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매클루언과 윌리엄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매클루언이 윌리엄스의 생각(비판)처럼 '기술결정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기술이 나온 사회, 경제적인 배경에 대한 관심보다 기술의 변화에 의해 변화된 미디어-인간의 '배치'와 그 '효과'에 관심이 켰다고 본다. 이런 그를 한국에서는 다시 호명해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과 같은 글들이 아전인수/침소봉대로 해석해, 뉴미디어를 위한 기술결정론자로 재탄생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어찌보면 윌리엄스 역시 그렇게 호명된 매클루언을 향해 당대에 기술결정론자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불려나온 면이 있다.

정부(정책기관)에서 세금을 써서 연구를 한다면 '미리 답을 정해놓고' 보다는, 열린 형태의 연구를 후원하는 형태가 맞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비전'에는 기술에 대한 맹신과 (방송통신융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기합리화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미래 세대와 우리의 삶을 걱정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산업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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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지대

“싫어하는 것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조절하기 위해 스위치를 끄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두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
마샬 매클루언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미래(1966)>, 스테파니 매클루언 ․ 데이비드 스테인즈 편저, 『매클루언의 이해: 그의 강연과 대담』, 커뮤니케이션북스, p.139


테크놀로지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


기술 발전과 문화


우리시대의 총체적인 삶의 경험, 이에 따른 감정과 생각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변화의 근원에는 공통적으로 놓여 있는 것은 기술이다.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기술을 생성하는 첨단 공학들과 이에 기반을 둔 기술 산업의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이미 우리 삶 속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 공학, 컴퓨터 공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은 기술의 영향이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등의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까지 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문화는 ‘기술적 문화(Technische Kultur)’라 할 수 있다. 기술은 이제 삶의 형식의 총체이자 인간이 역사적으로 이루어낸 모든 내적 ․ 외적 산물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문화라는 개념에 비견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

* 문병호, 「테크놀로지 시대에서의 예술적 계몽력 - 전통적 표현 수단에 기초한 예술 작품들의 위기와 기회」, 『비판과 화해 - 아도르노의 철학과 미학』, pp.109 ~ 110을 참고함

최근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이 문화예술 ․ 인문사회등과 융합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문화 기술( Culture Technology)’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문화기술대학원을 설립했다. 문화기술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하여 방송 ․ 영화 ․ 음악 ․ 애니메이션 ․ 게임 등의 문화예술 산업을 첨단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

** http://100.naver.com/100.nhn?docid=794689(2009.9.14)의 ‘문화기술(文化技術, culture technology)항목을 참고함
하지만 문화기술의 비약적 발전 때문에 문학, 회화, 음악,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예술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디지털화된 예술 작품들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즉 정보통신 수단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면서 전통적인 문화예술의 수용 형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디지털 음원에 대한 기사를 추가 인용할 것) 또 생산방식도 이에 영향을 받아 전통적 표현 수단을 따르는 예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디지털화된 예술작품들이 새로운 소통 양식인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감에 따라 전통적인 문화산업의 시장 질서역시 무너졌고, 새로운 질서는 아직 생성 중에 있다. 이런 위기의 근저에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특징인 대량성・신속성∙복제성 등과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의 생존 논리인 상업성∙오락성∙소비성 등이 함께 놓여있다.


테크놀로지 발전의 효과(effect)


기술은 어떤 대상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용하는 인간 행위의 방식이다. 사람들은 기술을 이용해 주어진 대상에서 무엇을 얻기도 하고, 대상을 자신의 필요나 욕구, 희망에 맞도록 변화시키기도 한다. 기술에는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와 소망이 깃들어있다. 이런 까닭에 기술은 인간이 손과 도구를 이용하고 지적 사고 능력을 갖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왔다. ***
*** 문병호, 같은 책, pp.110~111을 참고 함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경험과 삶을 총체적으로 바꾸고 있는 현실을 빗대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변화하는 것은 액자 속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액자 자체” ****라고 한다. 그에게 동시적이고 즉각적인 정보의 이동이 이뤄지는 전자기술시대는 특정 중심지역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 중심에 해당되며 경계선도 없는 영역이다. 이 공간은 세계 전역에서 동시에 도착하는 전자정보(모자이크)에 의해 만들어지며, 정해진 연결성이 없는 접촉이 이루어지는 곳(우발성)이다.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의 정보환경을 떠받치는 동시성을 가진 정보들은 시각이 아닌 촉각이나 후각 등 여러 가지 감각에 어울리는 청각에 의존한다. ****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커뮤니케이션북스, p.253
▸ "전자기술시대는 특정 중심지역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 중심에 해당되며 경계선도 없는 영역"이라는 표현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 그런가! 현실은 그 반대의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즉각적인 정보의 이동 가능성이 실제적인 정보의 이동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기술의 영역 밖에 정보를 취사 선택하는 구조가 온존한다. 기술적인 층위와 그것을 전달하는 언론-미디어의 층위가 만난 지점에서 '정보의 이동'이 결정된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publishing(공개) 가능성이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경로를 벗어나 우발적으로 '이슈들'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맞지만 하나의 층위, 기술적 가능성의 층위만을 볼 때 우리는 현존하는 강고한 힘들을 읽어낼 수 없다. (2019.7.15일 추가)
하지만 19세기 이래 서구인들이 생각한 자신이 사는 공간은 정규적이고, 자연 그대로의 합리성을 지닌 시각적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유클리드가 마련했던 기하학적 공간으로 연속적으로 균일하며 상호 연결적이고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공간이다. 이런 시각적 공간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전자기술시대의 동시성을 가진 정보환경에서 쉽게 자리를 잃고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런 변화와 혼란은 테크놀로지, 특히 전자기술의 총화인 텔레비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낙관론자인 매클루언은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전자정보시대가 청각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나면, 새로운 환경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예상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할 위험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에 대한 변화에 즉시 적응하며, 그래서 20세기 전자기술시대의 정보서비스에 의해 형성된 환경구조상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원인을 알기도 전에 우리의 감각들은 이런 변화에 먼저 적응하게 되고, 적응의 결과가 먼저 드러나기조차 한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 삶의 총체적 경험을 바꾸는 것이다. *****
***** 마샬 매클루언, <직업윤리의 종말(1972)>, 같은 책, pp.266~268을 참고 함

▸ 매클루언은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에 대한 변화"에서 '강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양화하기 어려운 상대적 위치. 유클리드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있는 인간의 감각(더나아가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술에 의해 우리의 감각들이 '지각(의식적인 앎)보다 먼저' 적응한다고 이야기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전개체적・전의식적인 신체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기술이 우리의 지각과 어떤 개념을 만들어낸, 자각하게 만드는 시발점이 된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이 때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의 변화(환경의 변화)'는 우리 신체(몸)의 강도 변화를 수반한다. 다른 신체(불빛, 열, 소리)와 만난/접속한 인간 신체의 변화는 단순한 수동적 적응이 아니라 신체의 잠재성(역량, 힘)의 표현이다.
"역량은 하나의 양 이다. 그렇지만, 역량은 길이와 같은 양이 아니라 힘과 같은 양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반적이고 단순한 양, 곧 이른바 외연량(des quantités extensives)이 아니라 강도 단계(une échelle intensive) 를 갖는 강도량(des quantité intensives)이다. 그건 곧 이런 뜻이다. “실재들 은 다소간 강도를 갖는다. 그 자신인 실재의 강도, 그 본질을 채우는 실재의 강도, 그 실재를 그 자체로 정의하는 강도, 그것이 바로 그 실재의 강도이다.” "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2013.2 (서울대학교 대학원), p.120 (2019.7.15일 추가)

따라서 매클루언은 테크놀로지에 의한 인간의 확장이 어떻게 인간의 지각 능력을 변화시키는가 하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제기했던 문제,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내는 효과라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매클루언은 관심사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기존 과정(旣存過程)의 진폭(振幅)을 증가시키거나, 속도를 빨리하는 방법, 혹은 그 표현 방법이 심리적 ․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에게 관계하게 되면 그것에 의해 인간의 척도(尺度)가 달라지고 혹은 진도가 달라지며 혹은 기준이 달라진다. 철도는 달리는 일, 수송하는 일, 혹은 바퀴, 선로(線路)를 인간 사회에 도입해 온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도시와 일과 레저를 낳게 하여 종래의 인간의 기능을 촉진하고, 또 규모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 열대 지방이건 한대지방이건 마찬가지이며, 또한 철도라는 매체가 운반하는 물건이나 내용이 무엇이든 조금도 상관없다. 한편, 비행기도 그 사용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이 운송 속도가 빨라짐으로써 철도형의 도시 ․ 정치 ․ 인간관계를 해소하려 하고 있다.” ******
****** 마샬 맥루한, 같은 책, p.8에서 인용

▸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에게 관계하게 되면 그것에 의해 인간의 척도(尺度)가 달라지고 혹은 진도가 달라지며 혹은 기준이 달라진다"고 매클루언은 말한다. 왜 인간의 척도, 진도, 기준이 달라질까? 그것은 인간의 역량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재인박사는 "
유한 실존 양태는 그것을 규정하는 다른 유한 실존 양태와 외적으로, 연장적 부분에 의해 관련된다"고 하면서 아래 글을 주석으로 달았다.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몸들이 다른 몸들 에 의해 제약되어(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몸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몸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몸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분된다.”(Spinoza E II P13 이 하 「자연학 소론」. 강조는 원문, 밑줄은 필자) 김재인, 같은 책, p.121

스피노자의 말에 기대어 살펴보면 인간의 몸이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의 메시지'와 연합되어 다른 몸(개체)이 된 것이다. 이때 메시지는 '고양이의 웃음'이 고양이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의 전달형식(표현방식?, 기계적 배치?, 또는 인간 몸과의 접속방식/interface)이라고 생각해보자. (2019.7.15일 추가)

그런데 이런 접근 안에는 증기기관・철도・텔레비전, 그리고 지금의 인터넷과 같은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일반적인 명제가 들어있다.

'빛나는' 효과에 눈이 멀어버린 기술결정론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의 현재적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1973년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텔레비전 분석을 위해 사용했던 틀을 그대로 현재의 인터넷에 적용한다 하여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1)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그후 뉴스와 오락을 제공하는 매체로서 인터넷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이전에 존재했던 뉴스와 오락 매체를 대체하게 되었다.
(2)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인터넷이 갖는 힘이 너무 커져서 제도와 사회적 관계의 틀을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3)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정보통신매체로서 인터넷이 가진 고유한 성질은 실재에 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을 변화시켰고, 이어 개인과 개인의 관계 및 개인과 세계에 대해 갖는 관계까지 변화시켰다.

(4)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커뮤니케이션과 오락의 강력한 매체로서 인터넷은 물리적 유동성의 증가 등 다른 테크놀로지의 발명으로 초래된 요인들과 함께 사회의 규모와 형태를 변화시키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5) 인터넷은 과학기술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발명되었으며 오락과 뉴스 매체로 발전했다. 이어 예기치 않은 결과로 텔레비전은 다른 뉴스와 오락 매체의 생명력과 중요도를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가정, 문화, 사회생활의 핵심적인 과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6) 인터넷은 과학기술 연구에 힘입어 하나의 가능성으로 개발되었다. 이 가능성이 새로운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것이라는 잠재력을 인정받아 투자와 개발의 대상으로 선택되었으며, 특히 분권적 의사 소통과 민주적 견해 형성 및 행동양식 형성에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7) 인터넷은 과학기술 연구에 힘입어 하나의 가능성으로 태어났으며, 새롭고 수익성 있는 전자적인 상거래, 콘텐츠 전달, 커뮤니케이션 및 커뮤니티 서비스의 면모를 인정받아 투자와 장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인터넷은 특징적인 디지털 가전 기기들과 결합되어 확산되었다.

(8)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특징과 사용이 발전함에 따라 능동적 참여성, 집단지성 등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사람들에게 항상 잠재되어 있던 것인데, 인터넷이 보다 구체적으로 발현하게 만들었다.

(9)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의 고유한 특징과 사용에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사회, 곧 분산되어 있고 복합적이면서도 세분화되어 있는 사회의 요구를 야기했으며 동시에 충족시켰다. 새롭게 창출된 롱테일(long tail)경제가 그 예이다.


이런 견해들은 윌리엄스에게는 텔레비전, 우리에게는 인터넷과 같은 어떤 테크놀로지가 우리 세상을 바꾸었다는 익숙한 명제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 중 일부일 뿐이다. 많은 경우 여러 해석들이 동시에 혼합되고, 중복되어 나타난다.
윌리엄스는 (1)~(5)와 같은 형식으로 설명할 경우 테크놀로지를 순전히 우연적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라 지적한다. 이런 입장은 어떤 기술적 발명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이유를 그 자체의 내적 발전에서 찾는다. 따라서 그 발명에 따르는 결과는 테크놀로지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연적이다.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그에 따르는 특정한 사회적 ․ 문화적 사건들도 생겨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을 기술결정론이라 부른다.


“이 관점은 현재 사회변화의 성질을 밝히는 정설로 자리잡을 만큼 그 기세가 매우 강하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본질적으로 내적인 연구개발의 과정에 따라 개발되며, 그에 따라 사회적 변화와 진보의 여건이 조성된다. 진보란 특히 이러한 발명의 역사이며, ‘근대세계를 창출해 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예견된 것이든 예기치 못한 것이든, 테크놀로지의 효과는 역사적 산물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텔레비전론』, pp.49~50


(6)~(9)의 입장도 인터넷을 테크놀로지의 우연적 산물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인터넷의 사용을 그 중심에 두고, 그 사용이 다른 맥락에서 결정되는 어떤 사회적 질서나 인간 본성의 몇가지 특징에 대한 징후로 여길 뿐이다. 따라서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특정한 어떤 매체에 의해 참여적 질서를 만들었거나 세분화되고 협업적인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현재보다는 좀 더 영향력이 적은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을 수 있다. 앞의 입장보다 덜 결정론적인 이런 입장을 윌리엄스는 징후적 기술론(symptomatic technology)라 한다.


“이 관점은 특정 테크놀로지 외에 사회적 변화의 동인이 되는 다른 조건들도 강조한다. 또한 특정 테크놀로지나 테크놀로지 집단이 다른 어떤 징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테크놀로지는 그것과는 별개로 결정되는 사회과정의 부산물로 여겨진다. 이미 드러나 있는 사회과정의 목적들을 위해서 어떤 테크놀로지가 사용된다면, 그것은 단지 효과 차원의 위상만을 가질 뿐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0


테크놀로지와 사회적 제관계


우리가 1970년대의 윌리엄스에 의지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본 것은 이런 견해가 지금도 여전히 테크놀로지와 사회에 관한 우리의 사고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말 발간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은 이런 사고를 대표한다. 이 책에서는 매클루언의 이론을 정리하며 “매체가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을 넘어서 인간의 의식 패러다임과 의사소통의 구조, 그리고 사회구조 전반의 성격까지도 재편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방송통신 융합의 철학적 출발점으로 삼기 적절한 이론가”라고 주장한다. 또 “그의 매체론은 커뮤니케이션의 물질성에 따라 문명의 성격까지도 바뀔 수 있다는 관점에서 ‘문명의 미디어론’으로까지 명명될 수 있다”며, 이를 기반으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한다. *********
********* 황성주 외,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2008.12), p.59, p.110을 볼 것. 강조는 필자. 우리는 매클루언의 통찰을 기술이 만들어낸 사회적 효과라는 차원에서 이후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듯 현재의 뉴미디어에 대한 입론들은 대부분 기술결정론에 서있다.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관계를 살필 때 “기술을 고립적인 요인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기술은 “자율적인 힘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출하거나, 또는 자율적인 힘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루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1
그런데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은 기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조성하는 것, 담론과 대화, 방송과 통신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의 융합, 공급자중심에서 이용자의 참여와 협력을 중심으로 한 융합을 방송통신융합의 추진방향으로, 자유, 참여, 다양성, 창의성을 그것의 가치로 제시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일반적 당위론과 보편적인 가치,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사회적 효과를 적당히 버무린 몇 가지 트렌드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뉴미디어의 철학과 가치를 대변할 수는 없다. ***********
*********** 황성주 외, 같은 책, pp.110~113을 볼 것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테크놀로지는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와 소망이 깃든 기술이라는 일반적 특성을 넘어선 기술,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작동하여 인간을 종속시키고 장악해버린 기술, 자본주의적 상황 아래에서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위험사회’ ************* 에 살고 있고, 테크놀로지 자체가 새로운 삶과 더 나은 문명이 만들어낼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갖을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지 않다.
윌리엄스의 통찰에 따르면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과 같은 입장이 갖는 강조점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동의 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근대 이후 사회관에 깊이 뿌리박힌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다른 관점에 서서 테크놀로지, 구체적으로 텔레비전을 살펴 볼 것을 권유한다.

************ 문병호, 같은 책, pp.111~113을 참고 함
*************
울리히 벡,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새물결을 볼 것, 이 책에서 울리히 벡은 기술에 의해 구조적으로 조작되고, 통제되는 산업사회는 더 이상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조종될 수 없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의 역사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여러 가지 사용까지 살펴볼 수 있다. 텔레비전과 관련한 이 관점은 연구개발의 과정에 의도라는 요인을 되돌려 놓는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상정된 어떤 목적이나 실천을 실현하기 위해 테크놀로지가 추구되고 발전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목적과 실천이 직접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징후적 기술론과도 다르다. 곧, 드러나 있는 사회적 요구, 목적, 실천 등에 대해 테크놀로지가 주변적인 요인이 아니라 중심적인 위상을 갖는다는 뜻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1, 강조는 필자 


따라서 우리시대의 총체적인 삶의 경험, 이에 따른 감정과 사고 양식의 급격한 변화 양상을 살피기 전,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이끄는 사회적 요구, 목적, 실천을 살펴보아야한다.

비판적 기술사(技術史) ․ 기술학(技術學)


‘쟁기를 끄는 황소가 경제적 범주가 아니듯이 기계 ․ 기술도 경제적 범주가 아니다. 기계 ․ 기술의 현재와 같은 적용은 우리의 현재 경제체제의 제관계에 속한다. 기계 ․ 기술이 적용되는 방식은 기계 ․ 기술 자체와는 전혀 다르다. 화약을 사람들이 인간을 해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든,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사용하든 언제나 화약인 것과 같다.’ + 사회적 제관계 속에서 기술 발전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은 일반적 당위론과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자의적인 가정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테크놀로지의 실제적인 발전과 그 ‘철학적 가치’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 p.55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술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거나 그것을 회피하는 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
기술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는 대답은 기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과 기술은 인간의 행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기술에는 연장, 기구, 기계 등의 제작과 사용이 속하고, 이때 제작된 것과 사용된 것 자체도 기술에 속한다. 더 나아가 욕구와 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들도 기술에 속한다. 이러한 장치 전체가 곧 기술이고, 기술 자체 또한 장치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고찰할 때가 최악의 경우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기술에 내맡겨지고, 이것이 옳다고 신봉하며 기술의 본질에 대해 맹목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볼 때 기술을 하나의 수단이며 인간 행동의 하나라고 보는 현대인의 통념은 기막힐 정도로 올바르다. 하지만 이 통념의 올바름이 현대 기술의 본질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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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강연과 논문』, 이학사, pp.9~11을 볼 것


“따라서 현대 기술도 목적을 위한 도구라는 말은 올바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념이 인간을 기술과 올바르게 관계 지으려는 모든 노력을 규정하고 있다. 모든 것은 기술을 도구로서 적당한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듯이 기술을 “정신적으로 장악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루려 한다. 이처럼 기술을 지배하려는 의지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절박해질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에도 그것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가능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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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책, p.11에서 인용, 강조는 필자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버린 기술이다. 19세기 중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경제학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기계의 발명이 어떤 인간의 매일매일의 노고를 가볍게 했는가는 참으로 의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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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자본론 I-2』, 이론과 실천, p.427에서 재인용, 원문 <Of the Stationary State - from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John Stuart Mill (1848)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왜냐하면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의 목적은 이러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그 밖의 모든 노동생산력의 발전이 그러하듯이 상품을 저렴하게 하는 것이며,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로 하는 부분을 단축하여 그가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주고 있는 다른 부분을 연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 칼 마르크스, 같은 책, pp.427~443을 볼 것. 마르크스는 기계와 대공업을 논하면서,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서 ‘기계의 발달’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살펴볼 때 개념적 ․ 도구적 정의 ++++++ 에서 벗어나 그것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즉 ‘비판적인 기술사(技術史)’ 입장에 서야한다. 1735년 존 와이엇(John Wyatt)가 방적기계를 발명했고, 그것이 18세기의 산업혁명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불완전한 것이지만 방적기는 이미 그보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영국과 같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비판적인 기술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어떤 기술 발명의 사회적 맥락과 그 사용 방식을 살핀다. 이런 입장에서 18세기 산업혁명 시대를 보면 한 개인에 의해서 발명이 이루어진 경우가 얼마나 적은가를 알게 될 것이다.

++++++ 하이데거는 이를 “기술에 대한 도구적 ․ 인간학적 규정”이라고 부른다.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책, p.11을 볼 것
또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 및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때 기술이 인간 노동 과정과 관련을 맺고 있다면, 기술학(技術學)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태도와 인간 생활의 직접적인 생산과정을 밝혀줄 수 있다. 인간 생활은 사람들이 맺고 있는 온갖 사회적 생활관계와 거기서 생겨나는 정신적 관념들을 포함한다. +++++++

+++++++ 칼 마르크스, 『자본론 I-2』, p.428~429를 볼 것
기술에 의한 사회적 효과, 즉 기술에 따른 경험과 지각을 포함한 삶의 총체적 변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기술의 사회적 성격을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술 자체가 아닌 기술의 사회적 이용방식에 따라 우리의 생활 방식과 경험들이 달라지고 거기서 정서와 지각, 정신적 관념들・가치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 메모들 ----------

하지만 이 모순은 우리가 미리 상정한 고정 관념과 실제적 운동 사이의 모순일 따름이다.


먼저 테크놀로지 발전의 원인을 살핀 후 이에 따라 문화산업, 방송통신융합의 내에서의 변화를 기술지대(技術地代)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 볼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예술 작품의 생산과 수용 형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원인 :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논의를 살필 것
기계에 대한 프루동의 주장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자본론 서한집

▸ 정동자본주의와 자유노동의 보상 - 독점지대, 4차 산업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 이항우, 한울(2017.8) 정동자본주의는 감정노동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인지자본주의, 인지와 자본 등과도 공명한다.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있다면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의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렙소디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2019.7.16일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