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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린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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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글 :  ❮스피노자 서간집❯을 읽으며  (2019.10.8) 작년 이맘 때, 페북에 쓰고 자물쇠로 잠가놓은 글이다. 1년이 지나 다시 올라와 얼굴을 내밀었다.  "어떤 사물(an object)이 다른 어떤 사물을 만날 때, 사건의 조합(combination)이 된다면, 만난 사물들이 바뀌었거나, 만나는 순서(permutation)가 바뀌면서 처음의 어떤 사물 속에 있던 성질이 드러난다."      "사물 속에 있던 성질"이라고 하면 하나의 속성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아니다. 그 사물이 '다른 사물'을 만났을 때 드러나는 역량은 속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 '다른 사물'을 만나지않았다면 '그 사물'은 그 속성을 가지지않았을/가졌다고생각되지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능력은 우발적으로 드러난다. - 스피노자, 들뢰즈 이런 까닭에 아무리 많은 성공 사례조사를 한다고 해서 그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진리(어떤 능력의 드러남)은 다르기 때문이다. 사례조사로 무엇을 흉내는 낼 수 있디지만 무엇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존재 자체의 능력은 그 존재 안에서만 찾을 수 없다. 관계, 외재적인 관계 속에서, 만남/부딪힘 속에서 들어난다. 그래서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가는 것"이다. 부딪히고 만나러 ... 사고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그러니 배우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 한계를 알아야 넘어설 수 있다는 원론이다. 한계는 자기가 만들 세계의 끝은 볼 때, 그것을 넘어서려 할 때만 드러나는 보이지않는 경계선이다. J.J. Park 2018년 6월 2일 아침 책을 읽다 신문을 읽으며 .... /////////////////////////////////////////// 6.1일 여름의 시작이다. 가을의 풍요함을 위해 열심히 일하자! http:/...

인공지능과 데이터에 대해 - AI 정의(defining)와 존재론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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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20:12 작성, 2020.5.20일 업데이트 2017.11.15일 르 메르디앙 서울 호텔에서 있었던 ❮제12회 SAC 2017 : 인공지능과 데이터, 그 진실을 말하다 / 세계적 리더들이 말하는 인공지능 기술과 사업의 실체❯ 컨퍼런스 참여 노트이다. 컨퍼런스 시작 전 : 실체와 진실 몇 천년 실체를 찾았다고도 했고, 또는 찾으려고도 했던 철학도 (현대로 오면서) 포기한,  적어도 변화와 생성말고 불변의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실체”, 이 낱말을 이곳에서 볼 줄이야 ....  실체를 밝히고 진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컨퍼런스 중에 ... 우리나라 “4차 산업혁명”을 많은 나라에서는 “Digital Transformation”이라고 한다. form은 (철학에서) 형상이다. 형상을 실체라고도 한다. transformation은 실체(form)가 변환(trans-)되는 작용/운동(-ation)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가 그것과 상호작용하면 의미(meaning)을 부여한다. 의미는 시간 속에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의미의 영역은 자연과학이 아닌 인문학의 영역이다.) in’form’ation 때문에 form이 바뀌는 것일까!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것일까! 진실은 변화와 세계의 무한성, 그리고 (조금 더 늘어날 수 있는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해) 가능성이라고 해두자. (세계의 변화 속에서) 정말 form이 바뀔 때, 기계/AI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기계가 스스로 새로운 지식(개념)의 발견/발명이 가능한지가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의 철학적 번역이 될 수 있겠다.  인간의 프로그램 없이 어느 순간 기계 스스로 그런, 개념 창조의 의지가 있을까, 생겨날까. 철학자라는 직업을 기계가 대체할 수 있을까. program은 미리(pro-) 정해놓...

지상파 방송사 스마트 미디어 전략의 성과와 전망(10월호) - pooq, SMR 이후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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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추석 연휴 기간(2017.9월 말 ~ 10월 초)에 쓴 글 이다. 연휴 내내 썼지만 정작 쓴 글에는 생각의 일부분만 포함되었다. 노력 결과 문체는 좀 바꾼 것 같은데, 내용은 길다. 표/그림을 포함해 10페이지 정도를 요청받았는데 결과는 21페이지이다. 메모는 글을 쓰기 전, 어떤 내용을 쓸까 생각한 것 이다. 1번 "지상파는 없다"는 내용 정도를 썼고, 8번 "국지적 전투(pooq, SMR)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지고있다"는 내용이 좀 있다. 9번 "시장 종속의 문제"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을 하긴 했다. 나머지에 대해 항목들에 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다른 기회로 미룬다고 했다.  기술지대에 대해 좀 더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글을 쓰면서 미디어산업 내에서 플랫폼(기술지대)의 형태를 통한 전유를 검토해보려고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를 샀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학설사>와 김수행 교수의 <정치경제학 원론>도 다시 들쳐보았다. 리카도는 영국의 곡물법 논쟁에서 '분배의 관점'에서 지대에 대해 논한다. (첨부된)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복잡한 전체 과정(프로세스)이 얽혀있어 어디에서 가치가 증가되는지 알 수 없을 때(알기 어려울 때), 상황을 간단하게 모델링하는 방법을 도입해 리카도는 곡물법 논쟁을 분석한다. 미디어산업 내에서 플랫폼 지대 문제도 이런 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신문과 포털의 관계처럼 방송(영상)과 플랫폼(통신)의 관계를 생각해선 안된다.  그런 관점에서 글을 썼다. OTT나 포털 때문에 (국내의) 방송산업이 어려워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1차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떤 에센스(본질)/프레임(문제틀)을 상정하고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된다. 실재존재(실존/fac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정부정책...

갈라파고스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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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시반에 깨 막 현관문에 던져진 신문을 읽었다.   "이 작고 메마른 바위섬이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창조력에 놀랐다"고 다윈은 <비글호 항해기>에서 갈라파고스의 경험을 적었다고 한다.  IT산업에서 '한국 갈라파고스'라는 부정적 맥락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묻고 싶었던게 있다. 나에게 갈라파고스는 종의 다양성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문제라면 세계화 속에서 (언어, 문화 때문에 상대적으로) 반도에 갇힌 시장 크기와 창업가적(또는 영역 구분 안하는 '융합적인' 투기적) 기질, 하지만 빠르게 구조화된 패권적 시장 질서에 따른 어려움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국에서 거대한 육식공룡이 못나온다라는 의미로 '갈라파고스' 이야기하는 거라면 할 말이 없음. 땅이 작아 ... 외에) 밖에서 한국을 볼 때 어떨까? (언어 문화적 한계로) 글로벌기업은 못되도 많은 새로운 시도들과 국지적으로 성공한 서비스들이 있어 벤치마킹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판단한다. 지금도 유효하다. 종의 다양성이 지리적 격리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한국 문화적(언어적) 격리 속에서, 그러면서도 세계화된 경제 - 이전 같으면 종속적!?, 국제분업 질서 속에서의 위치 - 때문에 묘한(thisness한) 환경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건 느낌이고 시장의 역동성을 저해하는 요소를 지적하면서 '갈라파고스화 된다'는 말을 쓰는 게 실제와 맞을까 다시 생각해 본다. 적어도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등이 지배하지 못하는 환경인 것이다. 그런 회사(공룡)가 안나오는 것은 미국 빼고 전세계 대다수(모두) 아닐까. 한국의 상황이 다른 나라보다 나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좀 과장(거짓)이라 말씀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의 '갈라파고스'도 과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렵다면 '갈라파고스'에 사는 먹이사슬 최상위 종의 폭식성 때문일 수 있다. 삼성, 네이버 등등이 갈라파고스 전체처럼 보일...

풍수화의 시방시와 다면적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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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을 따라 안개에 묻힌 산머리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미술관을 찾았다. 저수지 얼음은 작은 비방울을 받아 자기 몸을 보태어 이고 지고 나르기에 바빴다. 노래하는 사람은 비를 맞으면서도 노래를 불렀고 웅얼거림이 우산 위 비소리와 한몸으로 뒹굴었다. 미술관 건너 산 허리, 지난 봄 붉게 피었던 꽃자리 나뭇가지 끝 모두 붉게 보였고 어둑해지는 산, 등진 가로등은 보름이었다.  마주본 비 방울 방울 속에 천개의 달이 뜨고졌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  한국화 소장품 특별전 : 멈추고 보다 - 2015.9.8 ~ 2016.3.6일까지 - 토요일에는 오전 10시 ~ 오후 9시까지 볼 수 있고 오후 5시부터 밤 9시까지는 기획전시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멈추고 보다는 원래 무료) ----- 우리에게 개념적으로 더 익숙한 투사 원근법, 입체적 관찰(피카소적인)보다 전통 한국 산수화가 더 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해주고 자연/세계의 역동적인 변화상과 사람이 '세계 내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같다. 풍경화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을 넘어 세계가 인간 경험 속에서, 인간-세계와 관계 속에서 인간의 심리적, 또는 내적 구성력(상상력)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다양성들이 대립된다기보다 다질적 세계의 자기 표현이라는 것을 조선의 산수화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지금껏 본) 그 다양성보더 더 무한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 몸이 이미 알고있는 변화와 융합(물아일체!)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면 그런 기대에 찬 눈으로 그림을 봐야 한다. 내가 변해야 그림도 변한다. 들뢰즈의 차이-생성과 동양적 세계관/기철학에는 공통된 것이 많은 듯하다. ----- 이종송_움직이는 산-경주남산 _흙벽화 기법에 천연안료_195×528cm_2003 1. 답사와 여행체험을 통해 그린 겸재적 전통의 실경산수 2. 벽화기법과 민화적 도상처리가 맞물린 독특...

여기, 슬픈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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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슬픈 사람이 있다
 - 용산 참사 7주기에 부쳐 2016년 1월 16일 신문 위, 시(詩)로 7년이 지난
 지금 막 부활 예수처럼 증거된 '학살자들' ! 거리가 점점 멀어지던 단어다.

 '시민은, 방관자들은 어디로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당신이 물을 때, 
찾을 때, 안보였던 것은 
아담(Adam)처럼 다른 세계에 서 있었던 거다. 
강퍅하던 정신, 몸은 그 거리를 떠났고
 결국, 같은 대지에 발을 딛고 서 있지 않았던 거다. 학살자! 
학살하는 자와 학살 당하는 자가 여전한 
세계, 밖, 그래서 '눈 앞에 없었던 사람' 당신, 죽음이 망각의 늪 속에서 또 다시 
죽지 않기를 바라며, 
아담아, 사람아! 부르는 소리에 부끄러워 고개
 숙이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가 공유한 유일한 땅,
 슬픔 위에 새긴다.
 언제나 이곳에 울고 서 있으라.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 옥상에
 사람이 있었다.   2016.1.16일,  심보선,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을 읽으며 ...  "그댄 죽어 갔지만 그댈 죽인 학살자는 살아 있어"  2011.5.19일에 "사실"(공통기억)을 지키는 것은 보수, 진보를 떠나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초이다라고 썼었다. 최근 '위안부 - 일본군 성노예' 관련된 건을 보면 더욱 더! http://www.dckorea.co.kr/tc/archive/201601#entry_277

❮Contents Evolution in Platform Age❯ 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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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미래성장동력으로 융복합 문화산업 육성 방안> 토론회에 제출한 토론문이다. 임성희 SK플래닛 신사업개발실 부장이 <콘텐츠와 플랫폼 융합>이란 제목으로 발제를 했고, 토론문은 발제문의 순서에 맞춰 작성했다. 발제문은 1.Contents Evolution in Platform Age, 2.Digital Video Platform Rush, 3.Change of Viewers, 4.Technological Background, 5.Evolution of Contents, 6.what is to be done?으로 구성되어있고, 1, 2, 6번에서 토론문의 소제목을 가져왔다. 어떤 토론회나 그렇듯이 시간에 쫓겼고, 사전 발제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내 몫의 시간은 토론문으로 대체했다. 대신 토론회에서 떠오른 생각 몇가지를 두서없이 짧게 이야기를 했다. 같은 섹션에 이인화교수(이화여자대학교)가 <콘텐츠와 타분야의 융합>이란 제목으로 발표하며 블로흐의<희망의 원리>를 인용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우발적 사건이었고, 사건적 융합(관계맺기, 연상작용)이었다. 발언의 요지는 이렇다. 웹툰은 한국에서 발견한 새로운 포맷이다. 많은 스토리가 그려지고 다른 쟝르(영화, 드라마, 연극 등)에서 활용된다. 그런데 웹툰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1년에 13만명(?) 정도가 경연에 참여해 30여명 정도가 살아남는 혹독한 경연시스템을 통과해야 한다. 그 안에서 훈련된 몇 명의 우수한 작가가 선발된다.  웹드라마, MCN 등의 사업을 보면서 일자리를 못찾는 젊은 친구들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고문이고, 구조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 한 개인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이 시장에 뛰어든 젊은이들 대부분은 부불노동으로 플랫폼(IT업계)에 착취당한다. 열정 페이만큼의 월급도 없이 일을 시키는 뉴미디어 플랫폼에서 수익률은 높을 ...